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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다테 마사무네와 스리아게하라 전투 (4)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45호(2001년 2월호) p.50 ~ 65쪽의 기사인,《결전! 스리아게하라決戦! 摺上原》를 번역한 것으로, 카와이 히데오河合秀郎 님께서 집필하신 글입니다.


  [궁지 속의 기회 - 전국戰局을 역전시킨 마사무네의 혜안]

  다테 군의 대패와 이나와시로 가문猪苗代家의 내분

  텐쇼 16년(1588), 기회는 (사타케佐竹) 요시시게義重의 기대와는 상당히 다른 형태로 찾아왔다. 그 해 2월, (다테) 마사무네政宗의 명령에 따라 오오사키 가문大崎家의 영지로 출병한 다테 군이 대패大敗한 것이다.

아시카가 쇼군 일족인 시바 씨斯波氏의 분가分家였던 오오사키 가문.
본래 오슈탄다이奧州探題 지위는 이 가문이 세습하였었다.(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마사무네가 센도스지仙道筋 남하작전을 벌이는 데 있어서 최대의 장애는, 소마 가문相馬家과 오오사키 가문에게 배후를 위협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사무네로선 두 가문을 적극적으로 공격할 만한 메리트는 없었고, 지배지를 불필요하게 늘리면 수비병력이 분산된다는 것도 뻔히 알고 있었다. 다행히 소마 방면에는 (다테) 테루무네輝宗 시대에 구축된 방위체제가 여전히 견고하게 기능했기에 마사무네는 이를 굳건히 지키면서 때에 따라 위협하는 식으로 평안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오오사키 방면도 마사무네가 가장 신뢰하는 삼촌 루스 마사카게留守政景와 그 장인인 쿠로카와 겟슈사이(黒川月舟斎, 역주 : 하루우지晴氏)가 쿠로카와 군黒川郡 일대를 고수하고 있었기에, 오오사키 군이 단독으로 침공하는 건 불가능했다.

  문제는 양 가문이 연대할 경우로, 소마 군이 이구伊具 / 와타리 군亘理郡으로 침공하고 오오사키 군이 남하하게 되면 마사카게가 맡은 전선은 남북에서 협공당하여 고립될 가능성이 있었다. 이를 예방하려면 소마나 오오사키 중 하나를 철저히 격파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를 위해 대규모 침공을 벌이는 건 분명 센도 방면에서의 병력부족을 불러오게 될 터였다. 그동안 연합군이 북상하면 아다치 군安達郡을 지켜내는 건 도저히 불가능하다. 마사무네로선 북방전선에서의 동원을 최소한으로 억제해야 했고, 이 점은 연합군에 비해 열세인 현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차꼬가 되었다.

오오사키ㆍ모가미 군에게 참패한 마사무네의 둘째삼촌 루스 마사카게의 초상화(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오오사키 가문 주류파가 親 다테 세력을 탄압한 반동으로 발발한 텐쇼 15년(1587)의 오오사키 가문 비주류파의 반란은, 이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두텁게 쌓인 눈을 활용하여 연합군 측의 연대를 끊어버린 건, 기동성의 우위를 확립한 자군의 일방적 각개격파를 보증할 것이었다. 다테 군의 세력권에 침공한 연합군 쪽은 적설의 영향을 그대로 받게 되지만, 자군의 세력권 안에서 이를 요격하는 다테 군은 사전에 제설작업을 벌여 기동성의 저하를 예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림으로 그린 듯한 이 기회는 결과적으론 마사무네와 다테 군의 발을 걸어, 대패의 원인이 되었다.

  이 패배소식을 전해들은 요시시게는, 마사무네를 전선으로 끌어내기 위해 反 마사무네 연합군을 다테 가문의 영지로 침공시키려 했다. 결국은 지금까지와 같은 패턴이 반복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직전, 아시나 가문의 세력권에서 큰 사건이 터졌다. 이나와시로 모리쿠니猪苗代盛国 / 모리타네盛胤 부자의 내분內紛이 전투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반다이磐梯 산기슭과 이어진 대지 변두리에 위치한 이나와시로 성猪苗代城은 손톱만한 평지를 사이에 놓고 이나와시로 호숫가의 저습지에 반도 모양으로 돌출되어 있었다. 지금의 나가세 강長瀬川에서 서쪽 대부분은 당시엔 아직 호숫바닥이거나 저습지여서, 에치고 가도越後街道는 저습지를 크게 우회하여 이나와시로 성 북쪽을 따라 동서로 달리고 있었다. 이나와시로 성은 그 가도를 제압하는 아이즈 분지会津盆地의 관문 중 하나였다. 아이즈 분지를 방어하는 동쪽의 요충지로, 전략적 / 전술적으로 큰 의미를 갖고 있는 성이었기에 아시나 가문은 이 성의 존재를 대단히 중시해왔으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이나와시로가 아시나 가문의 직할령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반다이 산 정상에서 촬영한 이나와시로 호수의 모습(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영지의 이름을 묘지(苗字, 역주 : 우리나라의 성姓 개념)로 삼은 이나와시로 가문은 아시나 가문蘆名家과 같은 조상을 둔 그 일족으로, 뒤이어 아이즈로 내려온 아시나 가문에 의해 두 번이나 멸망당했고 그 때마다 당시 아시나 가문 당주의 자제가 가문을 계승했으나, 야마 군耶麻郡에 뿌리를 내리며 여전히 확고한 세력 / 일가친척으로서의 특별한 지위 / 도자마다이묘外様大名와 같은 영주권력을 계속해서 유지해왔다. 아시나 가문에 있어서 전략상 최중요거점이던 이곳을 하필이면 이런 집안이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나와시로 부자간의 내홍內訌은 다테와 사타케의 항쟁이 시작된 텐쇼 13년(1585) 당시, 50세가 된 당주 모리쿠니가 장남 모리타네에게 가문을 물려주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다테) 코지로小次郞 옹립 실패 / 자기 가문보다 격이 낮은 카나가미 가문金上家에 의해 옹립된 (아시나) 모리시게盛重에 대한 불만 / 사타케 계열 가신들에 의한 코지로 파 탄압 등이 모리쿠니에게 장남의 능력을 의심하게 만드는 한편으로, 본인이 은거한 것을 후회하게 만들었다.

  부자간의 인식차이는 모리쿠니의 기대를 차남에게 쏠리게 하여 텐쇼 16년(1588) 5월 10일, 모리타네 폐출을 위해 구체적 행동이 벌어졌다. 모리타네가 쿠로카와 성黒川城에 출사한 틈을 노려 모리쿠니가 이나와시로 성을 빼앗은 것이다. 성을 지키고 있던 가신들 중 태반은 모리쿠니를 따랐고, 저항한 자들은 무자비하게 살해당했다. 모리타네는 곧바로 병사들을 모아 성을 탈환하려고 하였으나, 센도스지로의 출진을 앞두고 있던 모리시게에겐 모리타네를 지원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카나가미 모리하루金上盛備의 중재로 일단 부자간에 화해는 이루어졌으나, 문제를 뒤로 미루는 데 불과했던 이 임시방편적 대응은 훗날 아시나 가문을 궁지로 몰아넣게 된다.


  코오리야마 전투郡山合戰에서 드러난 약점

  연합군의 공세는 그러한 아시나 가문의 사정에 아랑곳없이 이루어졌다. 아직 이나와시로 가문이 내홍으로 허덕이고 있을 무렵, 소마 씨가 타무라 군田村郡으로 쳐들어간 것이다. 소마 씨는 미하루三春 방면과 아다치 군安達郡으로의 침공을 반복했으나 다테 군을 분주하게만 했을 뿐으로, 윤 5월에 철수했다.


당시 소마 가문 당주였던 소마 요시타네(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그러나 마사무네가 소마 방면에서 병사를 물린 직후인 6월, 이번엔 스카가와須賀川에 집결해 있던 연합군 주력이 아사카 군安積郡을 북상하기 시작했다. 아시나 군 쪽은 이나와시로 모리쿠니를 경계하여 수천 명밖에 동원하지 못했으나, 그래도 요시시게의 장남 요시노부가 이끄는 사타케 군 4천 명을 주력으로 삼은 연합군은 니카이도二階堂 / 시라카와白川 / 이시카와 군石川軍을 합하여 1만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이에 맞선 마사무네는 오오사키와의 전투에서 병력을 많이 잃은데다, 오오사키 / 모가미最上와의 접경지역 방어를 위한 병사들을 배치해야 했기에 병력변통에 음으로 양으로 고생했다. 최전선인 코오리야마를 지키는 수비병은 고작 6백 명으로, 정면에서의 전력비율은 18대 1에 달했다.

  그러나 다테 군은 선전하여, 완전히 주도권을 빼앗겨야 했을 마사무네는 주력군의 소재를 비닉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기적적으로 주도권을 탈환했다. 그리고 연합군이 총공격을 주저한 가운데 1개월을 버티며, 마침내 화의를 맺는 데 성공했다. 오오사키와의 전투에서 일격을 맞은 건 외교적 / 전략적으로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으나, 마사무네는 그 궁지에서 간신히 빠져나왔다.

오늘날의 코오리야마 시. 토호쿠에서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인해 상당한 피해를 입기도 했다.(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오히려 이 코오리야마의 대진에서 연합군은 치명적인 약점을 노출했다. 이 대진 중에도 아시나 군은 이나와시로 성에 대한 경계를 끝까지 풀지 않았기에, 모리쿠니와 모리타네 간의 화해가 '보여주기' 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폭로하고 만 것이다. 아시나 가문에 반항하고 있다면, 모리쿠니가 마사무네의 항복권유에 응할 가능성은 대단히 높았다. 아이즈 분지의 북쪽 출구를 다테 가문이 장악하게 된다면 센도스지에서 아시나 가문이 군사행동을 벌이는 것을 대폭 제약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외곽방어선을 무력화시키고 아시나 가문의 본거지 쿠로카와 성을 위협할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아이즈 공략작전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상황이 온다면, 센도스지를 따라 남하하는 건 차선책에 지나지 않는다. 아시나 가문의 본거지를 직접 위협하여, 경우에 따라선 멸망시킨다면 사타케 가문과 연대한 아시나 가문 그 자체를 없앨 수 있다. 아시나 가문이 망하면 다른 중소영주들은 눈사태가 무너지듯 이탈할 것이고, 마사무네는 무츠 남부를 지배하에 둠으로써 마사무네와 요시시게의 입장은 완전히 역전되고 만다. 마사무네에게 있어 이나와시로의 내통은 아이즈 공략의 길을 열어줄 것이며, 아이즈 공략은 무츠 남부 평정으로 이어질 것이고, 무츠 남부 평정은 요시시게의 본거지가 있는 칸토 북부北関東로 치고 나갈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주게 될 것이었다. 



덧글

  • 키키 2017/11/16 05:21 # 답글

    잘 읽었습니다 ㅎㅎ
  • 3인칭관찰자 2017/11/16 09:03 #

    감사합니다.
  • Sizz 2017/11/16 15:36 # 삭제 답글

    당주가 요절하는것도 문제, 오래살아서 후계자랑 싸우는것도 문제 (우리 뒤주대왕님처럼 ㅠㅠㅠㅠ )네요
  • 3인칭관찰자 2017/11/16 19:19 #

    역시 적당한 게 좋은 거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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