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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다테 마사무네와 스리아게하라 전투 (3)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45호(2001년 2월호) p.50 ~ 65쪽의 기사인,《결전! 스리아게하라決戦! 摺上原》를 번역한 것으로, 카와이 히데오河合秀郎 님께서 집필하신 글입니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 - 마사무네의 공세방어전략

  (아시나蘆名) 가문 쟁탈전에서 패배한 (다테伊達) 마사무네政宗는 아시나 가문蘆名家의 연합군 탈퇴 가능성을 포기해야만 했다. 사타케 가문佐竹家과 아시나 가문의 일체적인 행동은 외교적 수단으론 저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무츠 남부南陸奥의 거의 절반 가까이를 점유한 아시나 가문의 세력권은 도자마外樣 토호들의 영지까지 합치면 40만 석을 가볍게 상회한다. 그런 아시나 가문과 일체화함으로써 사타케 가문의 세력권도 100만 석을 상회하게 되었다. 거기에 비해 다테 가문의 세력권은 동맹관계에 있던 타무라 가문田村家의 영지를 합쳐도 70만 석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대략적으로 잡아도 연합군의 절반 이하로 열세했던 것이다.

요시시게의 장남 사타케 요시노부(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그러나 승리의 열쇠가 될 사타케 / 아시나의 분단分斷은, (아시나) 모리시게盛重가 가문을 상속하면서 외교적으로는 달성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마사무네에겐 이를 군사력으로 성취하는 길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궁지에 몰린 마사무네는 적극적인 공세방어를 취하기로 결정했다. 이미 요네자와 가도米沢街道를 따라서 히바라 고개桧原峠 아이즈 쪽 입구까지를 점령하였던 마사무네는 히바라 고개를 거점으로 아시나 군을 교란시키고, 센도스지仙道筋 방면에서의 돌출부를 더욱더 남쪽으로 확대시키는 전략으로 돌아섰다. 사타케와 아시나의 연락을 차단하고 反 마사무네 연합을 분단시키기 위해서였다. 지금까지 했던 대로 수세守勢를 취해서는 (사타케佐竹) 요시시게義重가 아시나 가문을 완전히 삼킬 시간적 여유를 주고 만다. 이보다는 공세로 나서서 두 가문을 떼어놓는 쪽이 오히려 리스크가 적다. 다행히 가문쟁탈을 둘러싼 이면공작 싸움의 영향으로 아시나 가문은 내부에 마사무네 지지자들을 많이 끌어안고 있는 상태였다. 그들을 적시에 내통시킴으로써 일시적인 전략우위를 만들어내는 건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사타케 / 아시나 진영도 이러한 위험성은 충분히 감지하고 있었기에, 코지로 파 숙청을 목적으로 한 가신단 재편성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이를 총대맨 자가 모리시게의 쿠로카와(黒川, 역주 : 아시나 가문의 본거지. 지금의 아이즈와카마츠 시会津若松市) 입성 때 그를 수행한 오오나와 사누키노카미 요시토키大縄讃岐守義辰들로, 요시시게의 명령에 따라 전출된 사타케 가문 가신들이었다. 그들의 우두머리격인 오오나와 요시토키는 요시시게의 옛 측근으로, 오슈 공략을 담당하던 사타케 동가東家에 배속되어 시라카와 공략전에 참가하고, 무츠 난고陸奥南郷의 점령지 행정을 담당하면서 사타케 본가의 직할지 대관까지 겸임하였던 군사 / 행정의 고급관료였다. 아시나 가문으로 출향한 이후로는 오슈 문제의 전문가이자 요시시게의 분신으로서 모리시게를 후견하고 있었다.

지금의 아이즈와카마츠 성 텐슈가쿠. 1965년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복원되었다.(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숙청의 결과 '사천숙로四天宿老' 가문들은 사세 집안佐瀬家을 제외한 세 가문이 정권 중추에서 배제되었다. 적극적으로 코지로 옹립을 획책한 토미타富田 / 히라타平田 양 가문의 당주는 은거로 내몰려, 누대의 당주들에게 소외되어 왔던 마츠모토 가문松本家과 함께 실각하였다. 그들은 대신하여 중용된 자들은 히라타 일족 출신으로 보이는 케이토쿠 젠고로慶徳善五郎와, 토미타 미마사카富田美作의 장남인 토미타 쇼겐富田将監 같은 모리시게의 측근들 / 누마자와 이즈모노카미沼澤出雲守를 위시한 숙로 가문 이외의 후다이 가신들 / 아시나 일가 사람들 중 유일하게 모리시게를 지지했던 카나가미 모리하루金上盛備였다. 아시나 가문은 사타케 계열 가신인 요시토키들과 사세 가문, 그리고 새로이 등용된 중신들에 의한 연합정권으로서 운영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이 구 문벌들의 불만을 키웠으리란 건 말할 필요가 없다. 요시토키는 구래의 대립관계에 의해 숙청이 자의적으로 행해질 것을 우려하여, 이 문제에서 아시나 가신들을 따돌리고 제 3자인 사타케 계열 가신들 중심으로 숙청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그것은 역으로 사태를 악화시켰다. 문벌들의 불만과 반감이 사타케 계열 가신들에게 집중되는 결과를 낳고 만 것이다.

  이 요시토키의 실책에 의해 마사무네가 아시나를 상대로 한 공작에 성공할 확률은 급격히 높아졌다. 그들 불평분자들에게 공작의 손을 내밀기만 해도, 만약 그들이 배반하지 않는다 치더라도 내통한다는 소문이 퍼지는 것만으로 가문을 혼란시킬 수 있다. 요시시게 / 모리시게 부자를 갈라놓는 건 불가능할지언정, 모리시게의 지배를 방해함으로써 연대를 견제하는 정도의 목적이라면 쉽게 달성할 수 있게 되었다.


  요시시게의 다테 군 섬멸계획

  마사무네와 요시시게의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던 텐쇼 15년(1587), 큐슈九州를 평정하고 서일본을 완전히 장악한 (토요토미豊臣) 히데요시秀吉는 칸토関東와 오우奥羽에 '소부지레이惣無事令', 즉 정전명령停戰命令을 내렸다. 히데요시의 '소부지레이' 는 위반자에 대한 중앙정권의 군사적 제재를 전제한 것으로 이론상으로는 충분한 담보능력을 갖춘 듯이 보이나, 마사무네는 물론 히데요시에게 적극적으로 환심을 사 호죠 가문北条家의 침공을 저지해야 했을 요시시게조차도 이를 수용할 정도로 사람이 좋진 않았다. 양자는 정전령 따윈 제쳐두고 상대방의 숨통을 끊기 위해 여전히 획책하기를 계속했다.

칸파쿠 히데요시의 저택으로 행차하는 고요제이 텐노 일행(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아시나 가문이 사타케 가문의 산하에 들어간 이상 한번 무너진 밸런스를 다시 균형잡는 건 힘들다. 마사무네가 '소부지레이' 를 따르려면, 그 전제로 연합군의 대표인 사타케 가문과 싸움을 멈추든가 연합 그 자체를 해소시킬 필요가 있었다. 싸움을 계속하지 않으면 멸망당하든 굴복당하든 어느 쪽이나 비참한 말로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즉 마사무네의 인식상으론 이 싸움은 완전한 자위전쟁自衛戰爭 / 정당방위正當防衛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마사무네는 '소부지레이' 를 위반하는 위험성에 조금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결과적으로 중대한 외교적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 호죠 가문과의 우호관계를 이 시점에서도 조건없이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호죠 가문과 히데요시의 관계가 악화되어, 그 사이에서 중재를 계속하던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노력으로 간신히 파국을 면하고 있는 상황이던 이 시기에 마사무네는 이에야스를 매개하여 호죠 씨와 관계를 맺든가, 그렇지 않겠다면 히데요시와의 직접적 우호관계를 중시해야 했다. 사타케 가문을 배후에서 위협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라고는 하나 호죠 가문이 실질적으로 공헌해주는 건 결코 많다고 할 수 없었다. 히데요시에게 호죠 가문과 한패로 간주될 위험성만이 일방적으로 높아지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요시시게는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시키는 데 이 마사무네의 실책을 이용했다. 배후를 위협하는 마사무네를 제거해야만 사타케 씨가 히데요시의 호죠 포위망北条包圍網의 일익을 맡아 활동할 수 있다는 논법이었다. "호죠 씨와 다테 씨에게 협공당할 위험성을 미연에 저지한다." 는 주장은 그럴 가능성이 사실상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다테 가문과 호죠 가문이 이전부터 우호友好를 주고받아 온 현실 앞에서 충분히 신빙성을 가진 정보로 받아들여졌다.

사타케 가문은 이시다 미츠나리를 통하여 히데요시에게 밀착하고 있었다.(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사타케 가문의 오슈 남부 지배목적이 호죠 가문에 대항할 힘을 획득하는데 있는 이상, 무력에 의한 침공은 필수적인 수단이 아니다. 외교를 통해 오슈 남부 지배를 실현시킬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리고 칸토에서 요시시게의 입장을 보증하고 지원을 해주는 존재인 히데요시는 칸토 / 오슈 두 지역에 '소부지레이' 를 내려, 호죠 가문 토벌의 제 1보를 내딛은 상태였다. 호죠 가문을 공공연히 공격할 수 있는 기회에 그 일익을 맡음으로서 이득을 챙기려 했던 요시시게의 본래 목적에서 보자면, 다가올 對 호죠 전에 대비해 사타케 가문의 존재와 실력의 편린片鱗을 히데요시에게 어필해야 할 적절한 시기였다.

  요시시게 자신의 최종목적이 호죠 씨를 공격한다는 점에서 히데요시의 꿍꿍이와 일치하는 이상, 사타케 가문이 취할 수 있는 전략은 단 하나. 여전히 향배가 정해지지 않은 히타치 남부의 영주들을 응징할 시간을 확보하고, 對 호죠 전을 벌일 준비를 조기에 갖추기 위한 여력을 만들기 위해 칸토 북부에서의 충돌을 감당할 수 있는 병력을 일시적으로 차출시켜 이를 무츠에 집중, 깝죽대는 마사무네를 제압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동력과 연대가 떨어지는 연합군이 병력적 우위를 살리려면 다테 군의 발을 묶어놓아야 했다. 요격전투의 주체임을 이용하여 자기 세력권 내에서 소재를 비닉할 수 있는 마사무네와 다테 군 주력을 영지 밖으로 끌어내지 못하면, 결정타를 먹일 수는 없다. 요시시게는 지금까지의 공세작전을 포기하고, 다테 군 주력을 무츠 남부 깊숙히 끌어들여 포착 / 섬멸하겠다는 필요성에 쫓기고 있었다.   



덧글

  • 키키 2017/11/12 18:49 # 답글

    사타케도 역시 만만치 않았던 가문이었군요. 히데요시의 반 호조 정서를 기민하게 활용해서 다테를 옭아맬 생각을 했군요. 실로 여기까지 보면, 다테가문의 '가문의 존망이 걸린' 위기입니다. 젊은 다이묘가 이 난관을 어떻게 해쳐나갈지 흥미진진하네요.

    빠른 번역 감사합니다. ㅎㅎ 추운 날씨, 건강 조심하세요
  • 3인칭관찰자 2017/11/12 21:05 #

    16세 나이에 가문을 물려받았을 때 사방에 적대세력 내지 잠재적 적성세력이 있었음에도 거대세력인 호죠 쪽과 부딪히는 전선을 제외한 나머지 방면에선 오히려 세력을 확장시켜 나갈 정도의 수완을 가진 인물이 사타케 요시시게였기 때문에....

    다테와 호죠를 견제할 목적으로 히데요시를 극히 잘 활용했지만 그 이전에도 그가 우에스기 켄신, 타케다 카츠요리, 오다 노부나가 등에게 접근하면서 호죠가 자기 쪽으로 눈을 돌리는 걸 철저히 견제해나간 걸 보면 그야말로 빈틈이 없었달까요. 마사무네의 능력으로도 만만치는 않은 적이었을 듯 합니다.

    말씀대로 날씨가 급하게 추워지고 있네요. 키키님도 건강 잘 챙기시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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