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칭관찰자

beholderer.egloos.com

포토로그



《역사군상》다테 마사무네와 스리아게하라 전투 (2)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45호(2001년 2월호) p.50 ~ 65쪽의 기사인,《결전! 스리아게하라決戦! 摺上原》를 번역한 것으로, 카와이 히데오河合秀郎 님께서 집필하신 글입니다.


 [反 마사무네 연합 - 요시시게의 포위전략과 마사무네의 분단전략]


  센도스지를 둘러싼 마사무네와 요시시게의 공방

  (다테伊達) 테루무네輝宗가 급사하면서 다테 가문의 당주 마사무네政宗는 완전히 고립무원이라 해야 할 상황 속에서 자립을 도모해야 했다. 가문을 이은지 1년이 지났다고는 하나, 마사무네에게는 아직 특기할 만한 실적이 없었다. 테루무네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풍향은 급변하여, 지금까지 주로 테루무네의 신용에 의해 유지되어 오던 주변 다이묘들과의 외교관계는 대폭 후퇴하였다. 다시 기세가 붙기 시작하던 다테 가문의 무츠 남부 평정 대업은 좌절되고, 하루무네晴宗와 테루무네 2대에 걸친 복구 노력도 수포로 돌아가고 있었다.

  천재일우의 기회를 맞은 (사타케佐竹) 요시시게義重는 마사무네의 위기를 틈타 자비없이 개입했다. 이와키岩城 / 이시카와石川 / 아시나蘆名 / 니카이도二階堂 네 가문에 공작을 하여 다테 집안의 친척ㆍ외척연합을 형성, 그 압력으로 마사무네를 굴복시키려 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싸움을 되풀이해오던 소마相馬 / 이와키 두 가문을 화해시켜, 反 마사무네 연합군을 결성했다. 마사무네 아내의 친정인 타무라 가문田村家을 제외한 무츠 남부의 거의 모든 다이묘들이 다테 가문과 적대한 것이다.

히토토리 다리 전투 전적비(출처 : じゃらんnet)


  테루무네가 죽은지 며칠 지나지 않아 니혼마츠 성에 보복공격을 개시한 마사무네에 맞서 요시시게는 군사개입을 결의, 11월 10일에 연합군의 첫 공동작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연합군은 2배가 넘는 병력적 우위에 있으면서도 예상을 뛰어넘은 마사무네의 저항에 부딪혀 고전했다. 17일에는 히토토리 다리 전투人取橋の戦い를 우세 속에 종결지었으나 그날 밤, 요시시게의 삼촌 오노사키(사타케佐竹) 요시마사小野崎義昌가 진중에서 살해당하고, 본거지 히타치에서 反 사타케 세력이 공세에 나섰다는 오보가 들어왔기에 연합군은 해산하여 철수해버렸다. 외압으로 다테 가문의 내정에 개입하려던 시도는 조금도 성취하지 못한 채 요시시게로선 굴욕적인 철퇴를 알리는 결과가 났다.

  그러나 연합군 최초의 개입을 물리치기는 했으나, 센도스지에 돌출되어 있던 다테 가문의 세력권 남부, 즉 직접 지배하고 있던 아다치 군安達郡, 그리고 마사무네의 처가妻家가 다스리는 타무라 군田村郡이 집중공격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연합군의 연대를 끊어버리는 건 마사무네에게는 방위상 최저한의 요구였다.

  마사무네의 타겟은 아시나 가문蘆名家이었다. 이 무렵 아시나 가문은 당주 (아시나) 모리타카盛隆가 급사急死하면서 주체성을 상실한 상태에 있었던 데다, 그럼에도 여전히 다테 / 모가미 가문最上家과 맞먹는 오우의 유력영주로서 그 동향이 커다란 영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사무네 외가쪽 큰삼촌이기도 한 모가미 요시아키最上義光의 동상.
껍데기만 남은 가문을 57만 석 다이묘로 도약시켰다.(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아시나 가문의 지도체제가 약체화된 건 텐쇼 3년(1575), (아시나) 모리우지의 장남 (아시나) 모리오키盛興가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자, 니카이도 가문에서 인질로 보내진 모리타카에게 마사무네의 숙모이자 모리오키의 아내였던 여성을 맺어주어 양자상속을 시키면서부터였다. 모리타카는 니카이도 가문의 외동아들이기도 했기에 텐쇼 8년(1580)에 양아버지 모리우지, 텐쇼 9년(1581)에 친아버지 니카이도 모리요시二階堂盛義가 죽은 이후엔 아시나 가문과 니카이도 가문의 당주를 겸하게 되었다. 그리고 텐쇼 12년(1584) 10월 6일, 모리타카가 측근 오오바 산자에몬大庭三左衛門에게 살해당하면서 두 가문은 동시에 당주를 잃었다. 아시나 가문은 태어난지 1개월 되는 갓난아기 카메오마루亀王丸를 당주로 앉히고 숙로들과 일족들이 합의체제를 운영하게 되었으며, 니카이도 가문은 모리타카의 생모, 즉 모리요시에게 시집온 마사무네의 백모伯母가 가문을 대행하게 되었다.

  테루무네의 누나와 여동생이 시집가 있었기에, 두 가문의 가신단에는 親 다테 세력이 확고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마사무네로서는 그들에게 공작을 시도함으로써 두 가문에 대한 요시시게의 영향력을 뒤집고, 연합을 해체로 몰아넣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아시나 가문의 후계문제와 다테 / 사타케의 암투

  절호의 기회는 히토토리 다리 전투로부터 거의 1년이 지난 후 찾아왔다. 텐쇼 14년(1586) 11월 21일, 카메오마루가 고작 3살의 나이로 요절하면서 아시나 가문에 다시 상속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모리타카에게 카메오마루 이외의 남자아이가 없는 이상, 모리우지가 취한 선례를 따라 카메오마루의 누나에게 사위를 들여 또다시 양자상속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선발에서 마사무네의 공작은 효험을 보았다. 친동생이자 테루무네의 2남인 (다테) 코지로小次郞가 물망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이 기회는 동시에 최악의 사태로 이어질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었다. 코지로의 대항마가 다름아닌 (사타케) 요시시게의 차남, 요시히로義広였던 것이다.

명군으로 평가받으나 자식복이 박했던 아시나 모리우지(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이 두 사람이 유력한 후보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다테 가문伊達家과 아시나 가문蘆名家의 혈연관계에서 기인한다. (다테) 타네무네稙宗가 모리우지의 숙모를 정실로 맞았던 관계상 코지로와 요시히로는 모두 증조할머니를 통해 아시나의 핏줄을 물려받고 있었다. 모리타카가 인질 신분에서 당주가 된 것도 어머니를 통해 아시나의 피를 물려받았기 때문으로, 이 타네무네의 증손자들은 아시나 종가와 가장 촌수親等가 가까웠던 혈족이었던 것이다.

  요시시게가 反 마사무네 연합을 유지하느냐, 마사무네가 이를 무너뜨리냐는 건 지금 아시나 가문을 코지로와 요시히로 중 누가 차지하는가에 달려있었다. 이는 즉 다테 가문과 사타케 가문 둘 중 한 쪽이 아시나 가문을 손에 넣어, 상대방의 숨통을 틀어쥐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사타케와 아시나의 일체화는 마사무네를 현재 이상으로 궁지에 몰아넣게 되며, 다테와 아시나의 일체화는 요시시게를 무츠에서 몰아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다테 / 사타케 / 아시나 세 가문뿐만 아니라 오우 전체의 판세와 센도스지의 대세를 결정적으로 좌우하게 될 가능성이 있었다.

  혈통으로도 완전히 호각이며 나이대도 거의 비슷한 두 사람이었지만, 한 가지 코지로에게 유리한 점이 있었다. 요시히로가 이미 시라카와 요시치카白川義親의 양후계자가 되어있었다는 점이다. 아시나 가문으로서도 타 가문의 후계자를 당주로 맞는 게 위험하다는 건, 모리타카의 선례로 인해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그 결과 일가친척들 중 필두인 이나와시로 가문猪苗代家 / '4천 숙로四天宿老'로 불리던 숙로 필두 4개 가문 중 태반 / 도자마外樣 토호 영주들 등 아시나 가문의 문벌영주들을 중심으로 한 코지로 파의 세력은 요시히로 파의 세력을 크게 압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후계자로 낙점된 건 요시히로였다. 만전의 자신감을 갖고 있던 마사무네의 기대는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히 배반당했다. 그런데 그 원인은 아시나 가문 내부의 사정이 아닌, 급변하는 카미가타(교토ㆍ오사카 인근지역)의 정세에 의한 것이었다.

아시나 가문과 영지가 인접해 있었던 우에스기 카게카츠(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요시히로 파의 영수인 카나가미 토오토우미노카미 모리하루金上遠江守盛備는 아시나 일족들 중에서 예외적으로 종가의 집정에 참여하면서 對 카미가타 외교와 對 우에스기 전략을 담당하고 있었다. 모리하루의 주장은,

  "노부나가信長의 옛 영지를 대부분 병탄하고 칸파쿠가 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조기에 우호관계를 확립하는 건 지금 외교상의 최우선과제이다. 그리고 히데요시의 산하에 들어간 인접지역인 에치고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와는, (우에스기) 켄신이 죽으면서 벌어진 가문쟁탈전에서 아시나 가문이 (우에스기) 카게토라景虎를 지원하고 카게카츠와 적대한 이래 소원한 관계가 되었다. 그런 카게카츠와 친밀한 관계에 있으며, 히데요시에게 활발히 사신을 보내면서 우의를 다지고 있는 사타케 씨와 양자관계를 맺는 건, 우에스기 가문과의 관계회복과 히데요시와의 통신을 바라는 아시나 가문에 있어서 더없는 기회이다."
 
  카나가미는 이러한 정세와 히데요시의 의향을 무기로 코지로 파를 무너트려, 이렇게 해서 요시히로는 아시나 가문의 당주가 되어 아시나 모리시게蘆名盛重로 개명했다. 그러나 카나가미의 예상 이상으로 요시시게는 아시나 가문의 내부통제에 가혹하여, 결국 마사무네가 이 점을 찌르고 들어오게 된다.
 

덧글

  • Sizz 2017/11/10 14:29 # 삭제 답글

    이번글도 잘읽었습니다 전에 아키타번을 광산을 중심으로 다룬 책을 읽은적이 있는데 거기서 사타케 가문을 고케닌, 슈고, 전국다이묘, 에도막부 다이묘의 단계를 모두겪어본 유서깊은 가문이라고 하더군요 외손이나 사위양자를 들여 가문을 이어나가는게 부계중심인 우리의 눈으론 낯설기도 하네요 (친족간에 결혼이 성행한것도 관련이 있을까요) 이번편은 전국시대 합종 연횡을 연상시켰습니다
  • 3인칭관찰자 2017/11/10 19:15 #

    네. 사타케 가문은 그런 의미에서 정말로 희귀한 가문이라고 할 수 있지요. 거기에 견줄만한 다이묘 집안은 일본 전국을 통틀어도 다테, 시마즈, 우에스기, 오가사와라 가문 정도밖에 없을 테니까요.

    딸에게 데릴사위를 들여 후계자로 삼는 건 일본의 오랜 전통이고 현대에도 여전합니다만, 전통사회에선 사위를 '양아들로 맞아들인 후' 딸이랑 결혼시키는 서양자 풍습이 널리 행해졌다고 하더군요. 전국시대 당시 도호쿠 지방의 다이묘들은 대대로 자기들끼리 통혼&양자관계를 중첩적으로 맺어서 친척관계가 아닌 가문이 없을 정도였기에 양후계자를 두는 데 거리낌을 느끼지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 Sizz 2017/11/10 23:41 # 삭제 답글

    댓글보고 또 배워갑니다 오가사와라가는 신겐에게 시나노 털린것만 알았는데 재기에 성공했군요.
    사실 우리 민법에도 서양자조항이 있다가 오래전에 삭제된걸로 압니다. 일본민법의 영향이었는지......딸도 집안을 간접적으로 이을순있지만 결국 남자가 필요하단 점에서 (특히 부부사이에 아이를 못낳거나 딴데서 아이를 보면 막장드라마가.....) 한계가 있는 제도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번역에 감사드립니다
  • 3인칭관찰자 2017/11/11 22:09 #

    신겐에게 쫓겨난 본가와 신겐에게 복속한 분가 모두 다이묘가 되어 메이지 유신떄까지 존속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특히 본가 쪽은 이에야스의 손녀(노부야스의 딸)가 이리로 시집왔던데다 오사카 여름 전역 최종결전 때 당주와 그 장남이 전사하는 등 여러모로 헌신을 했기에 에도 시대에도 좋은 대접을 받으며 중용되었다고..

    민법이 제정된 1958년(추기 : 시행된 건 2년 후인 1960년) 이전에 대한민국은 일본 식민지 당시의 민법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는 거의 보급되지 못한 관습임에도 한동안 유지되었던 것 같습니다. 부계중심으로 양자를 들이던 대한민국과는 차이가 나는 제도입니다만 말씀대로 '남자' 를 필요로 했던 건 똑같군요.
  • 키키 2017/11/11 16:25 # 답글

    잘 읽었습니다 ㅎㅎ
  • 3인칭관찰자 2017/11/11 17:06 #

    감사합니다! ^^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통계 위젯 (블랙)

917
158
440725

이 이글루를 링크한 사람 (블랙)

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