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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다테 마사무네와 스리아게하라 전투 (1)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45호(2001년 2월호) p.50 ~ 65쪽의 기사인,《결전! 스리아게하라決戦! 摺上原》를 번역한 것으로, 카와이 히데오河合秀郎 님께서 집필하신 글입니다.


 [다테伊達와 사타케佐竹의 성쇠 - 명암明暗을 가른 혈연외교]


  다테 가문 3대의 숙원

  텐쇼 12년(1584), (일본) 중앙에서는 급속히 세력을 확대한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죽음으로 빚어진 혼란을 제압하였고, 칸토 / 시코쿠 / 큐슈에서는 호죠 / 쵸소카베 / 시마즈 등에 의해 지역별로 통일이 진척되고 있었다. 오우(奥羽, 무츠陸奥 지방과 데와出羽 지방)도 예외는 아니었다. 텐쇼 원년(1573)이라는 이른 시기에 노부나가와 우의를 쌓고 있던 다테 테루무네伊達輝宗는, 주변의 중소영주들을 외교와 군사 양면에서 굴복시켜가며 오우 남부의 패권을 장악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해 10월, 41세의 테루무네는 갑작스럽게 은거하고 18세의 장남 (다테) 마사무네政宗에게 가문을 물려주었다.

다테 가문의 문양(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이 가독상속은 이상할 정도로 빠르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20세의 테루무네가 가문을 상속받을 당시 아버지 (다테) 하루무네晴宗의 나이는 45세였다. 통치연수로 봐도 테루무네는 아버지를 5년 앞선다. 이 이른 가문상속에는 부자 2대에 공통된 목적이 깃들어 있었다. 남 오슈(南奥州, 역주 : 무츠 지방 남부) 전역에 뻗어 있던 세력권을 회복하겠다는 비원悲願 말이다.

  오우에서도 손꼽는 대세력이었던 다테 가문은 테루무네의 할아버지인 (다테) 타네무네稙宗가 주변 영주들과의 혼인婚姻과 양자 보내기養子縁組로 맺어진 혈연관계를 이용하여, 데와 오키타마 군置賜郡과 무츠 지방 남부 절반에 걸친 판도를 쌓아올렸다. 막대한 공작비용을 들여 무츠 슈고陸奥守護로 취임한 타네무네는, 혈연관계를 공적 경찰권으로 보완하면서 의사적擬似的인 지배체제를 완성시켰다.

빨간 색으로 칠해진 곳이 무츠 지방(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타네무네가 혈연관계와 공적 권위에 의존하게 된 배경은, 물론 고루한 세대에 속해 있었다는 점도 한몫하겠으나, 그와 동시에 강설량降雪量이 많은 관계상 작전기간이 한정되어 방위거점을 가진 쪽이 극단적으로 유리했던 오우에서는 세력권을 군사력으로 확장하는 게 곤란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외교에 보다 중점이 놓이는 건 필연적이었던 것이다. 타네무네가 가부장제적 질서와 공적 권위를 배경삼아 세력을 확대한 건, 이 점에선 결코 잘못되지 않았다.

  그러나 아들들을 양자로 보낼 때마다 가신들을 수행시키고,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직할지를 떼어주던 방책은 세력권을 확대하고 유지하는 수단으로선 일시적인 처치에 지나지 않았으며, 장기적으로는 다테 본가를 약화시켜 지배의 근간을 뒤흔들 위험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장남 하루무네와의 대립은, 7년에 걸친 '텐분의 난天文の乱' 으로 발전하여 타네무네의 세력권을 급속히 붕괴시켰다.

마사무네의 증조할아버지 다테 타네무네(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타네무네의 세력권이 붕괴되는 과장에서 두각을 드러낸 자가, 타네무네의 2녀를 아내로 두고 있던 아시나 모리우지蘆名盛氏였다. 아이즈会津 / 오오누마大沼 / 카와누마河沼 / 야마耶麻 4군과 에치고 칸바라 군越後蒲原郡의 오가와 장원小川莊을 지배하던 모리우지는 다테 가문의 영향력이 약해진 아사카 군安積郡 전역과 이와세 군岩瀬郡 일부를 제압하고, 아다치 군 니혼마츠安達郡二本松의 하타케야마 가문畠山家 등을 영향 아래에 둠으로써 다테 가문을 위협할 정도의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한편 우다宇多 / 나메가타行方 / 시네하標葉 3군을 지배하던 소마 가문相馬家은, 당주인 아키타네顕胤가 타네무네 맏딸의 사위로써 우대받았기에 타네무네의 은거로 난이 종결된 후에도 하루무네에게 저항했고, 아키타네가 죽은 후에도 그 장남 모리타네盛胤가 다테 가문의 직할령으로 침공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하루무네는 슈고직보다 상위인 오슈탄다이奥州探題에 취임하는 한편으로, 장남을 이와키 시게타카岩城重隆 / 3남을 루스 아키무네留守顕宗 / 4남을 이시카와 하루미츠石川晴光의 양후계자로 보내고, 니카이도 모리요시二階堂盛義에게는 맏딸을 시집보내 영향력 회복을 시도했다.

코에이 게임에서의 일러스트 덕에 컬트적인 인기가 있는 니카이도 모리요시(출처 : 트위터 #二階堂盛義)


  그러나 이들 노력은 꼭 만족스런 결과를 얻은 건 아니었다. 하루무네 시대는 아시나 가문의 득세를 간과하고, 소마 가문의 봉쇄에 실패함으로써, 타네무네 시대에 비하면 직할령 지배가 강화된 한편으로 세력권이 현저하게 축소되었다. 그런 하루무네로부터 에이로쿠 6년(1563)에 가문을 물려받은 테루무네는, 하루무네가 후반생을 들여 구축해놓은 기반을 강화해나가면서 착실히 세력을 확대했다. 타무라 군 미하루 성주田村郡三春城主인 타무라 키요아키田村清顕와 우호관계를 맺고, 형 이와키 치카타카岩城親隆 / 동생 루스 마사카게留守政景ㆍ이시카와 아키미츠石川昭光와 연대하여 소마 모리타네의 침공을 억제, 텐쇼 12년(1584)에는 그동안 빼앗겼던 마루모리丸森 / 카네야마 성金山城을 드디어 탈환했다.

  치세 20여 년만에 테루무네가 은퇴한 배경에는 이와 같이 세력권 회복이 일정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는 점이 있었다. 이를 기회로 권력이 집중되어 있던 (테루무네가) 키워낸 중신들을 정리하여, 숙로宿老들의 전횡이나 후계자 문제를 둘러싸고 가신들이 분열할 위험을 회피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마사무네로의 가문이양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세력권 회복의 기세를 지속시키겠다는 목적에서 보자면 오히려 시의적절한 은퇴였다.

  그러나 하루무네 이래의 숙원을 맡긴 테루무네의 배려는 예상밖의 사태로 인해 전혀 의미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텐쇼 13년(1585) 10월 8일, 테루무네는 하타케야마(니혼마츠二本松) 요시츠구畠山義継 일당을 모살하려다 역으로 납치당하여, 추격해 온 마사무네의 군대가 난전을 벌이던 와중에 목숨을 잃었다.


  對 호죠 전략의 일환을 이룰 사타케 가문의 남부 오슈 침공

  테루무네가 다음 세대의 비약을 위해 착실히 기반을 다지고 있을 무렵, 무츠 남부에서 새로운 세력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오오타 성太田城을 거점으로 히타치常陸 지방의 절반을 차지하고서 시모츠케下野 / 무츠 지방으로 세력을 넓히던 사타케 요시시게佐竹義重가 시라카와 유우키 가문白河結城家의 본거지인 무츠 시라카와 군白河郡을 침공한 것이다.

  에이로쿠 8년(1565)에 19세의 요시시게가 실권을 장악했을 당시, 사타케 집안은 히타치 북부 7군을 중심으로 무츠 남쪽 끄트머리에서 시모츠케 동부에 걸친 협소한 범위를 지배하고 있었을 뿐, 호죠北条 / 우에스기上杉 / 타케다武田와 같이 칸토関東에서 할거하는 유력 다이묘 가문에 20년은 뒤쳐져 있었다. 히타치 지방만을 보더라도 사타케 가문에 종속된 중부 영주들의 향배는 불안정했고, 남부에서는 오다小田 / 타이죠 가문大掾家 같은 적대세력도 적지 않았다.

빨간 색으로 칠해진 곳이 히타치 지방(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이들 적대세력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해 요시시게는 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의 지원을 등에 업으려고 했다. 그러나 켄신과의 제휴는 그들 중 다수를 우에스기 가문과 적대하는 호죠 씨의 비호에 기대게 했을 뿐이었다. 켄신이 칸토 서부를 유린하고 일시적으로 호죠 쪽의 상호지원 연락망을 차단하여 反 사타케 세력을 벌벌 떨게도 했지만, 켄신이 에치고로 돌아가면 사타케 가문에 그 반동이 집중되어 요시시게는 여러 번 성가신 상황에 빠진 바 있었다.

츠키오카 요시토시가 그린 우에스기 켄신(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팽창하는 호죠 가문이 히타치로 밀어닥치려는 때에 당주가 된 요시시게에겐, 이러한 불안정 요인을 제거하는 것이 사타케 가문의 명줄을 좌우할 중요과제였다. 코쿠다카로 비교하면 호죠 가문의 5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사타케 가문으로서는, 아버지나 조상 시대와 같이 견실하고 느긋한 작전을 벌이거나 켄신을 믿고서 투기적인 작전에 모든 것을 걸어볼 여유는 없었다. 보다 저항이 적은 지역에서 급속히 세력을 확대해야만 했기에, 시라카와 가문의 영지와 그 앞에 펼쳐진 센도스지(仙道筋, 역주 : 토호쿠 지방 남단. 지금의 후쿠시마 현福島県 중부 / 동부 지역) 일대는 이러한 상황에 놓여있던 요시시게로선 반드시 획득하고 싶은 후배지後背地였다.

  그러나 요시시게의 궁극적이 목적이 히타치 전역을 평정하고 더 나아가 칸토에서 영토를 확대하는 것이었다는 건 달라지지 않는다. 혈연관계로 얽혀있던 오슈에서 후배지를 얻는다는 건, 어디까지나 호죠 가문에 맞서 칸토에서 세력을 확대하기 위한 수단, 즉 동원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중간목표에 지나지 않았다. 상황이 극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전력을 투입하는 건 불가능했던 것이다.

  사타케 가문이 이와키 가문과 이중삼중으로 혼인관계를 맺고, 요시시게 자신도 다테 하루무네의 5녀를 정실로 맞았으며, 이와키 / 이시카와 양 집안에 여동생들을 시집보낸 것도 결국은 다테 가문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군사적 부담을 경감받기 위해서였다. 사타케 가문 쪽은 이로 인해 충분한 소득을 얻었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두 가문은 외교정책상 큰 차이는 없었다. 그러나 그 차이가 사타케 집안과 다테 집안의 명암을 가르게 된다.

  친족간의 연합으로 시라카와 포위망白河包圍網을 완성시킨 요시시게는 텐쇼 3년(1575)까지 시라카와 성白河城을 제외한 시라카와 영지 거의 대부분을 점령했고, 3년 후에는 시라카와 요시치카白河義親를 굴복시켜 자신의 차남 카츠시키마루(喝食丸, 사타케 요시히로佐竹義広)를 시라카와 가문의 양후계자로 삼게 했다. 사타케 가문은 드디어 센도스지로 통하는 침공거점을 확보한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6년 후, 준비를 마치고 공격의 기회를 엿보던 요시시게 앞에 절호의 기회가 굴러들어오게 된다. 테루무네가 횡사한 것이다.  


덧글

  • 키키 2017/11/07 21:39 # 답글

    다테가문 이야기이군요. 번역 감사합니다!

    도호쿠 지방이 복잡다난하기로는 긴키 못지않지요. 다테-아시나의 아웅다웅, 웅크려있는 중소강국 사타케, 동쪽의 패자 호조, 거기에다가 늘 도호쿠에 적지 않은 관심을 두던 겐신.
    또 북쪽에는 난부가가 도사리고 있었지요.

    말 그대로 개판 오분전에서 어찌어찌 살아남아 100만석을 이루어낸 다테 가문은 정말 재미있는 가문입니다.
    100만석을 향한 그 첫걸음 스리아게하라 합전 이야기. 계속 보겠습니다. ㅎㅎ
    번역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
  • 3인칭관찰자 2017/11/08 00:14 #

    글 3개 중에서 저울질하다가 이 글을 번역하기로 했습니다. 대체적인 구도는 다테 vs 사타케&아시나.. 입니다. 마사무네 입장에서 보면 핸디캡 매치랄까요. ㅎㅎ(호죠나 우에스기 같은 비 토호쿠 다이묘들은 엑스트라 정도의 비중입니다)

    분량이 조금 긴 글이라 포스트 5~6개 정도가 필요할 것 같으니 아마 다음 주에 마무리가 날 것 같네요.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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