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故 시바 료타로 씨의 역사 에세이집인《역사의 세계로부터》의 38 ~ 50쪽에 수록된〈역사를 바꾼 황금의 성〉을 번역한 포스트입니다.
- (오사카) 겨울 전역冬ノ陣은 (토쿠가와德川) 이에야스家康의 위력 외교전이었다고 앞에서 서술한 바 있다. 그는 일본의 수많은 다이묘大名들을 오사카 성大坂城 밖에 집결시켜 성 안의 의기를 꺾은 후, 결국엔 오사카 성의 바깥 해자外濠를 메우게 하는 조건으로 일단은 철군하였다.
이 조건에는 앞에서 언급한 낭인 출신 대장牢人大將들이 맹렬히 반대했으나, 어디까지나 전쟁기술자로서 고용된 데 지나지 않던 그들은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외교에 발언력을 갖지 못했다는 게 비운이었다. 이에야스는 바깥 해자만을 메우겠다는 조건을 흐지부지 어기고 안쪽 해자內濠까지 싸그리 메워, 성을 알몸으로 만들어버렸다. 공성전에 서툴렀던 이에야스는 비로소 안도했다.
다음 해인 겐나 원년(1615)에 벌어진 여름 전역夏ノ陣에선 성 병사들은 어쩔 수 없이 성에서 나와 야외결전을 시도했다. 야전을 득의로 삼는 이에야스의 술책에 말려든 것이다.

야외로 나온 이상 병력의 차이가 힘을 발휘하게 된다. 사나다 유키무라真田幸村 / 고토 마타베에後藤又兵衛 등의 지도하에 호쾌하고 교묘한 조우전遭遇戰을 벌였음에도 결국 전투는 하루만에 끝이 났다. 이 성에 꿈을 걸었던 10만 낭인들의 꿈도 그와 함께 끝이 났다. 일본 역사는 토쿠가와 봉건체제德川封建體制 쪽으로 크게 선회하였고, 그 후 열마 지나지 않아 일본은 쇄국鎖國을 단행했다.
- 오사카 성은 기이한 성으로, 이 성은 한 번도 승리한 적이 없다.
가장 먼저 이 땅에 축성을 한 인물은 전국시대 초기에 혼간사本願寺를 중흥시킨 법주 렌뇨連如로, 이 성에는 '이시야마 혼간사石山本願寺' 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후 쇼뇨証如 시대에 일본에서 손으로 꼽을만한 성곽으로 완성되어, 켄뇨顕如 대에 이르러 드디어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결전을 벌였다. 이미 노부나가는 교토京都를 제압하고 천하의 패권을 거머쥐려 하고 있었고, 모리毛利를 위시한 먼 지방의 反 오다 세력은 이 이시야마 성을 응원하면서 노부나가에게 항전했다. 말하자면 전국시대 최후의 통일전쟁으로, 선수권 시합이기도 했다.

이시야마 혼간사를 건립한 혼간사 8대 법주 렌뇨의 동상(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혼간사 측은 크게 분투하여, 전세는 비금비금했다. 공략하는데 애를 먹은 노부나가는 오기마치 텐노正親町天皇를 움직여 칙명으로 강화和睦를 맺은 후, 혼간사 측을 성에서 퇴거시킴으로써 일단락을 짓는데 성공했다. 노부나가가 천하의 장병들을 동원하고도 무력으로는 끝내 함락시키지 못한 걸 보면 어지간히 견고한 성堅城이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성 측은 외교로 인해 패배했다. 이 점은 훗날의 오사카 전쟁과 닮은 데가 있으며, 역사의 전환점에 이 성이 있었다는 점에서도 극히 흡사했다.
(토요토미豊臣) 히데요시秀吉는 당시 노부나가의 부장이었다. 노부나가가 이시야마 공략에 애를 먹는 걸 보고 이 성을 탐내게 된 것이리라. 그는 훗날 천하를 잡은 후, 득달같이 이 곳에 성을 쌓았다.
토쿠가와 시대가 시작된 이후 오사카 성은, 초기 몇 년을 제외하면 막부가 쓰러질 때까지 쇼군將軍이 이 성의 성주를 겸했다. 그리고 후다이다이묘譜代大名들 가운데서 인선을 하여 성주대리城代를 삼았다.
오사카 성주대리 / 교토 정무대리京都所司代를 역임하지 않은 자는 보통 로쥬老中로 등용하지 않는 게 막각幕閣 인사의 관례였다. 이 점은 현대의 대기업들 인사와 많이 닮았다.
유신維新 전야였던 메이지 원년(1868) 새해 첫날, (토쿠가와) 막부 최후의 쇼군 요시노부慶喜는 이 성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 때 쿄토에서는 사츠마薩摩 / 쵸슈長州 두 번을 주력으로 삼은 막부 토벌군이 어린 황제(幼帝, 역주 : 메이지 텐노明治天皇. 무츠히토睦仁)를 옹립하여 집결해 있으면서 오사카 성의 막부군과 일촉즉발의 분위기를 연출했다.

성 내의 막부군은 서양식 훈련을 받은 보병步兵 / 기병騎兵 / 포병砲兵 외에도 산병散兵 / 총병부대銃隊 / 친위 총병부대奧詰銃隊 / 유격대遊擊隊 등이 주둔해 있었으며, 그 외에도 성하의 설비인 니시노미야 후다노츠지西宮札の辻에 쟈쿠슈 사카이 가문若州酒井家 / 모리구치 방면守口엔 탄바 카메야마丹波亀山의 이시카와 가문石川家 / 코보레 방면河堀口에는 히메지 사카이 가문姫路酒井家 / 스미요시 방면住吉口에는 키슈 토쿠가와 가문紀州徳川家 / 교토 가도京都街道에는 하타모토(旗本, 역주 : 막부 친위대)들을 배치했고, 후시미伏見에는 보병들과 신센구미新選組가 있었다. 그리고 이를 총괄하는 야전지휘소는 얄궂게도 성 밖의 사나다 산真田山에 있었다. 옛날 겐나 시대, 사나다 유키무라가 토쿠가와 군을 격파하기 위해 급히 축성하였던 성 밖의 성채(砦, 역주 : 사나다마루真田丸)가 있던 곳이다.
성 내에 있던 쇼군 요시노부는 막하의 주전론자主戰論者들을 억누르며 조정에 대해 오로지 순종恭順하는 태도로 임했으나, 에도(江戸, 역주 : 지금의 도쿄東京)에서 터진 사츠마 번 저택 포격薩摩藩屋敷砲擊 소식을 들은 주전론자들은 크게 용약하여 끝내는 요시노부의 명령서를 위조, 졸지에 토바鳥羽ㆍ후시미 가도伏見街道에서 전투가 시작된 게 메이지 원년 1월 3일이었다. 이 토바ㆍ후시미 전투鳥羽伏見の戦い는 고작 반나절만에 막부군의 패배로 끝이 났고, 전쟁터에서 궤주한 막부군은 일단 오사카 성으로 들어왔는데 이미 성에는 쇼군 요시노부가 없다는 것을 알고서 경악하였다.
원래 요시노부에게는 항전할 마음이 없었던 데다 이 전투를 지도한 것도 아니었기에, 정치적 책임을 모면할 목적으로 1월 6일 밤, 아이즈 번주会津藩主 마츠다이라 카타모리松平容保 등을 데리고 성을 빠져나와 텐포 산(天保山, 오사카의 항구)으로 도주했다. 그 길로 정박하고 있던 막부 군함에 승선하려고 했으나 깜깜한 밤闇夜이었기에 군함의 위치를 알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해안가 근처에 닻을 내리고 있던 미국 군함을 찾아가 그들의 보호하에 밤을 지낸 후, 다음 날 아침에 카이요마루開陽丸로 옮겨타고서 에도로 도망쳐 돌아갔다. 이 때 요시노부는 이에야스 이래 전해져 오던 우마지루시馬印를 깜빡 성내에 놔두고 온 것을 깨달았는데, 이를 나중에 신몬 타츠고로(新門辰五郎, 역주 : 막부 말기의 유명 건달 겸 소방수. 그의 딸이 요시노부의 첩이었던 관계상, 수백 명의 꼬붕들을 이끌고 요시노부를 호위하고 있었다.)가 육로를 통해 에도로 가지고 온 일화는 유명하다.
오사카 성을 함락시켜 천하를 얻은 토쿠가와 씨는, 오사카 성을 버림으로써 천하를 잃었다.
이 거성巨城은 노부나가 이래 언제나 새로운 권력자들의 목표가 되어, 역사상 몇 번이나 그 총공격에 노출되었다. 그러면서도 무력에 의해 함락된 적은 한 번도 없으며, 언제나 정치정세의 변화로 인해 지난 시대의 권력자가 이 성에서 나와야만 했다. 이 성이 성문을 열 때마다 일본사는 언제나 일변해 갔다. 기이한 성이 아닐까.
유신 당시, 오사카 성을 황거皇居로 삼아 제국의 도읍帝都을 오사카에 두자는 안건이 거의 결정되기 직전까지 갔으나, 결국 에도 성江戸城이 황거로 선택되었다. 오사카 성의 악운惡運을 감안한다면 그 쪽이 더욱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덧글
잊지 않고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__) 좋은 밤 되시기를....
누추한 곳 자주 들러주시고 격려해주시는 키키님께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