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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 료타로] 역사를 바꾼 황금黃金의 성 (3) 역사



  이 글은 故 시바 료타로 씨의 역사 에세이집인《역사의 세계로부터》의 38 ~ 50쪽에 수록된〈역사를 바꾼 황금의 성〉을 번역한 포스트입니다.


  - 케이쵸 5년(1600)에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역関ヶ原の役의 승리로 천하의 패권을 잡은 (토쿠가와德川) 이에야스家康에게도 아직 두통거리가 있었다.

  천하의 제후들이 모조리 에도 막부에 신종臣從하기는 했으나, 오사카大坂에서는 (토요토미豊臣) 히데요시秀吉의 아들 히데요리秀賴가 일본에선 견줄 데가 없는 견고한 성에서 그 아버지가 남긴 막대한 부를 가지고 웅크리고 있었다.

세키가하라 전적비(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세키가하라에서 승리한 후 기세를 몰아 장병들을 이끌고 이 성에 일격을 가했더라면 좋았겠지만, 그렇게 개전開戰하기엔 명목名目도 없었고 만약 이에야스가 사려깊지 못하게 이를 결행했더라면, 기껏 복속시켜 놓은 토요토미의 은고를 입었던 다이묘들이 등을 돌려 서쪽으로 넘어갔을 거란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실제로 이에야스는 천하의 인심을 얻기 위해, 세키가하라 이후인 케이쵸 6년(1601)까지는 매 해 오사카를 찾아가 히데요리에게 새해인사를 올렸다. 가신으로서 히데요리에게 예를 취하였던 것이다.

  케이쵸 10년(1605), (토쿠가와) 히데타다秀忠가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将軍에 보임補任되었다. 다이묘들에 대한 처분도 대략 마무리되고, 오랫동안 복속하지 않고 있던 사츠마薩摩의 시마즈 제후島津侯도 결국 에도 성으로 와 문안을 올렸다. 에도 정권의 기틀이 드디어 굳혀진 셈이다. 그는 이 해에 비로소 오랜 염원이었던 對 오사카 작전에 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느긋한 노인은 단병短兵을 몰아 급히 오사카를 들이치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가 착수한 작전은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이에야스의 후계자가 된 3남 히데타다(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제 1단계 작전은, 히데요리로 하여금 여러 지방의 신사와 사원社寺들의 조영을 하도록 명령하는 것이었다.

  오사카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히데요시가 유산으로 남긴 막대한 양의 금은을 낭비시키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했다. 이 1단계 작전은, 경제작전이라 할 수 있었다.

  히데요시가 남긴 금은이 얼마나 있었는지 명확히는 알 수 없으나,《케이쵸츄카이덴慶長中外伝》에 기록된 오사카 창고에 있던 재물은【 금 9만 매 / 은 16만 매 / 금전 5관 문 / 은전 2백 관 】이라 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화폐만을 기록한 것이다. 이것만 해도 엄청난 액수이나 아직 화폐를 만드는 주형에 들어가지 않은 '오오반센마이부키大判千枚吹' 라든가 '니센마이부키二千枚吹' 등으로 불리던 '금분동金分銅' 은 앞의 몇 배에 달했으므로, 온 나라의 부를 긁어모아도 일개 토요토미 가문의 재산에 견줄 수가 없었다.

  히데요리는 이전 시대 주권자의 아들이라곤 해도 세키가하라 이후엔 셋츠摂津 / 카와치河內 / 이즈미和泉 지방에서 65만 7400석을 영유하는 영주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만한 금은을 가지고 있다면, 천하의 병력들을 육성하여 대전을 일으키는 것도 가능하여, 이에야스는 이를 두려워했다. 우선 이부터 무너뜨려야 한다.

  히데요리에게 시킨 신사 / 사원 조영 업무 가운데서도 최대의 과업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교토 호코사京都方広寺의 대불전 조영 사업이다.

  이는 케이쵸 7년(1602)에 착공되었으나, 도중에 실화가 일어나 불타고 말았다. 심술궂은 관점으로 추량해 본다면, 막부의 간첩間者이 들어가 방화한 것인지도 모른다.

  히데요리는 허허벌판이 된 곳에 다시 대불전을 지어야만 했다. 그야말로 쓸데없고 애처로운 사업이었다. 케이쵸 15년(1610)에 다시 기공을 시작, 케이쵸 17년(1612)에 완성을 보았다.

  대불전 조영에 의해 소비된 토요토미 가문의 금金은, 막부의 긴자銀座를 담당한 고토 가문後藤家의 기록에 따르면 케이쵸가네慶長金 기준으로 3만 9766매에 달했다고 한다.

  이만한 낭비를 하였고, 이후 전국의 10만 낭인들을 부양하며 전쟁을 시작, 결국 성이 함락되었을 때도 아직 금이 남아났다고 전해진다. 이 금들은 화폐로 만들어지지 않은 채 분동 상태로 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것들이므로, 히데요시의 유산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막대한 것이었다. 어찌됐든 이 대불전 조영은 경제적으로 토요토미 가문을 기울게 하는 데는 이르지 못했으나, 정치적으로는 궁지에 빠뜨리는 데 성공하였다.

트집잡힌 문구 '君臣豊樂 国家安康'(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그 '종명사건鐘銘事件' 이 그것이다. 뭐 이 책을 읽으시는 분이면 다 아실테니, 번잡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그리고 케이쵸 19년(1614), 이에야스가 천하의 군대를 지휘하여 오사카 공격에 나섰을 때 그의 나이는 이미 73세라는 노령에 접어들어 있었다. 상대편인 히데요리는 20세였다.

  이 '나이' 문제가 이에야스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이에야스의 죽음은 언젠가는 찾아올 것이다. 이에야스가 죽으면 기껏 출범시켜 놓았던 에도 정권을 다시 오사카에 내 줄 위험은 다분히 존재했다. 종명사건과 같은 뻔히 속이 보이는 함정까지 파서 개전의 명분으로 삼은 건, 이에야스의 초조함의 발로라고밖에 볼 수 없다.

  그런데 이에야스는 야전野戰의 베테랑이긴 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젊은 시절부터 공성전攻城戰에는 서툴렀다.(이 점은, 야전보다도 공성전 쪽에 능했던 히데요시와는 대조를 이룬다)

  그렇기에 특히 성 공격을 두려워했다. 오사카 성의 공성작전에 10년을 투자한 건 그의 느긋한 성격이 이유라기보단, 익숙지 않은 작전인 만큼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자, 는 마음으로 주도면밀히 임했던 것이다. 이 정도로 장기적인 계획을 벌여 사업을 벌인 정치가는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일본 역사 내에선 찾아볼 수 없다.

  제 2기는 위력에 의한 외교전이었다. 즉 겨울 전역冬ノ陣이 그것이다.

  이에야스는 케이쵸 19년(1614) 10월 11일,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슨푸 성을 출발, 이보다 약간 늦게 2대 쇼군 히데타다가 동일본의 다이묘들을 인솔하여 에도를 진발進發했다. 이렇게 교토 내외에 집결한 동군 병력은 대략 20만 명. 역사상 미증유의 대군이었다.


  - 이젠 오사카 측을 보도록 하자.

  동군과 서군이 틀어진 후 허겁지겁 병력을 모았다. 히데요시의 은고恩顧를 입은 다이묘들에게도 구원을 요청했으나 모두가 이에야스를 두려워하여 거절했고, 고작 1만 석 다이묘인 후루타 오리베노쇼古田織部正가 참진(역주 : 기실 오사카에 입성한 건 아니며, 기밀누설 등의 내통혐의를 추궁받아 오사카 성이 함락된 후 막부로부터 자결을 강요당함)한 데 불과했다.

만화《효게모노》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 후루타 오리베의 초상.(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그러나 내밀內密하게 다양한 수단을 써서 오사카를 원조하는 다이묘들은 있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는 히데요리로부터 오사카의 저택에 있던 쌀 8만 석의 차용을 요구받자 자율처분에 맡기는 형태를 취하면서, 실질적으론 병량으로 제공했다.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는 가신 사노 도우카(佐野道可, 역주 : 본명은 나이토 모토모리内藤元盛)를 낭인으로 위장시켜, 은밀히 오사카로 파견했다. 도우카를 납득시키기 위해 테루모토는 "자네를 언제까지나 잊지 않겠네. 먼 훗날의 형제들 후손들까지 중용하지." 라는 뜻의 기청문까지 써 주었다고 한다.

  카토 키요마사加藤淸正는 이미 이 시기엔 죽고 없었으나, 그 중신重臣이었던 카토 미마사카加藤美作가 오사카 성에 쌀 1만 석과 황금 5백 매를 은밀히 보냈다.

  다이묘들은 (오사카로) 오지 않았으나 낭인牢人들은 몰려들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의 패배로 주군 가문을 잃은 무사들은 당시 천하에 십 수만 명이나 있었고, 그들은 곤궁한 생활 속에서 난이 터지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들 중 태반이 오사카 성으로 달려왔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 결전은 토쿠가와 VS 토요토미의 정권쟁탈전이라는 성격 외에, 취업자 VS 실업자의 싸움이기도 했다. 이 정도로 재미난 성격을 지닌 전쟁은 세계 역사상에도 사례가 없을 것이다.

  엄청난 숫자의 낭인들 가운데는 천하에 이름을 떨친 자도 많았는데, 토사 지방의 옛 영주였던 쵸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盛親도 그 중 하나였다. 그는 세키가하라의 패전으로 22만 석 영주에서 굴러 떨어져 교토에 있는 테라코야(寺子屋, 역주 : 일본식 서당)의 훈장으로 영락해 있었다. 마찬가지로 신슈 코모로信州小諸의 센고쿠 히데후미(仙石秀文, 역주 : 센고쿠 히데히사仙石秀久)의 아들로 교토에서 테라코야를 차리고 있었던 부젠노카미 무네나리豊前守宗也도 입성하였고, 이어서 부젠 고쿠라豊前小倉의 옛 영주였던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의 아들 부젠노카미 카츠나가豊前守勝永도 토사土佐 지방의 유배지를 비밀리에 탈출하여 오사카로 왔다.

쵸소카베 모리치카의 초상(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그 외에도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서군의 맹장이었던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吉継의 아들 다이가쿠大学, 야마토 코오리야마大和郡山 20만 석의 옛 영주였던 마시타 나가모리増田長盛의 아들 모리츠구盛次 등, 옛 다이묘들의 아들이 10명 안팏으로 존재하였다.

  키슈 쿠도야마紀州九度山에 유배되어 있던 사나다 유키무라真田幸村, 치쿠젠 쿠로다 가문筑前黒田家을 떠난 후 한때 교토에서 거지로 전락한 적도 있는 고토 마타베에後藤又兵衛, 카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밑을 떠나 낭인이 된 후 먹고 살 길이 없어 행각승雲水이 되어 있던 반 단에몬 나오유키塙団右衛門直之 등, 후세에 다채로운 로망을 제공한 낭인들이 속속들이 입성했다.

  이렇게 하여 오사카의 병력은《오사카고진야마구치큐안바나시大阪御陣山口休庵咄》에 따르면 기마무사(장교) 1만 2 ~ 3천 명 / 도보무사(하사관) 6 ~ 7만 명 / 잡병 5 ~ 6만 명. 거기에 여자 1만 명을 합쳐 12 ~ 13만 명이라는 막대한 숫자로 불어났다.

 

덧글

  • Sizz 2017/11/04 19:48 # 삭제 답글

    늘 올려주신글 잘보고 있습니다 천하의 권력과 금을 어린 아이가 물려받아 목숨을 위협받는건지, 아니면 덕분에 20살까지라도 버텼는지 모르겠네요. 시바선생은 이에야스의 농민스러운 인색함을 싫어하시는것 같지만 그 견실함이 자손에게 200년간 천하를 물려주는 힘이 되지 않았을까요. 저번에 간베에글도 보고 느낀건데 히데요시 정권은 인수합병으로 초고속성장했다 결국 지나친 외형확장을 소화하지 못하고 망해버린 기업 생각이 납니다
  • 3인칭관찰자 2017/11/04 21:44 #

    히데요리가 온실 속에서 떠받들려 살면서 평생(이라고 해도 20년이지만)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호사를 누릴 수 있었던 건 아버지의 유산 덕이지만, 그 권력과 재력을 물려받지 않았다면 21세 나이에 자살로 내몰리는 일은 없었을 테니...

    이에야스에겐 화려하고 개성적인 면모는 부족한데다 의뭉한 인물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서인지 대중적인 인기는 좀 약한 면이 있지만 그가 화려하고 개성적이기보단 말씀대로 '견실한' 인물이었기에 자기 후손들이 오래도록 정권을 유지하는 기틀을 제공할 수 있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 남중생 2018/01/05 20:11 # 답글

    여자 1만명! 여성 전투병력도 필사적인 농성전 처람 궁할 때는 아끼지 않았군요
  • 3인칭관찰자 2018/01/05 20:56 #

    성내에 부녀자들 1만 여 명이 있었던 건 사실같지만 원문의 묘사처럼 그녀들 다수가 병력으로 간주된 건 아니었지 않을까 싶습니다. ^^; 갑주를 찬 요도도노가 무장한 시녀들을 거느리고 성내를 여러 번 순시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는 걸 보면 일부 여성들은 무장했을 것 같은데 그 외엔 여성들이 오사카 농성전에 주체적으로 참전해서 활약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를 못해서리..

  • 남중생 2018/01/06 00:31 #

    온나부시의 환상을 이토록 처참하게...ㅠㅠ 그래도 역사는 바로세워져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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