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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 료타로] 시대적 주변인으로서의 쿠로다 칸베에 역사



  이 글은 故 시바 료타로 씨의 역사 에세이집인《역사의 세계로부터》의 33 ~ 37쪽에 수록된〈시대적 점경点景으로서의 쿠로다 칸베에黑田官兵衛〉을 번역한 포스트입니다.


  《하리마나다 이야기播磨灘物語》의 집필을 마쳤다.

  되돌아보자면 애초부터 딱히 특정한 주제를 설정하여 집필에 들어간 게 아닌, 예전부터 전국시대 말기戰國末期라는 시대적 주변인으로서 쿠로다 칸베에黑田官兵衛라는 인물을 애호하였기에, 내키는 대로 써 나가다 이제 길모퉁이에 이르러서 그 인물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구나.. 하는 걸 체감하고 있다.

  칸베에라는 사람의 됨됨이를 보면, 그를 통하여 인간이 지닌 어떤 모습을 끄집어내어 부각시킬 만한 면모는 딱히 없이, 자제심이 강한 일개 평범한 신사紳士에 불과했던 듯하다. 그러나 그는 평범하였던 만큼 전국시대 말기라는 시대의 분위기를 그대로 사상으로서 체현하였던 듯한 면이 있다.

  예를 들자면, 무로마치 시기에 비약적으로 증가한 '농업생산력과 상품경제의 발흥', 유통되고 있던 '화폐貨幣'에 대한 새로운 감각, 그리고 이러한 부분들과 떼어놓을 수 없는 구조를 이루며 이 시대를 특색지은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의 권역으로 들어왔다는 의식, 그리고 이와 꼭 일치하지만은 않는 관계를 맺으며 유입된 '크리스트 교'가 지닌 신기한 보편성에 대해 동경하기도 하고 앙양昻揚 받기도 하는 감수성 등, 칸베에는 여기에서 (필자가) 마음 가는 대로 열거한 면모들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


쿠로다 칸베에의 초상화(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부코자츠키武功雜記》에 따르면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칸베에가 원래는 반슈(播州, 역주 : 하리마 지방)의 말 상인이었다고 알고 있었다 하는데, 이 착각엔 의외의 진실성이 존재한다. 이에야스같이 전통 농민적인 감각을 통해서 사물을 보고 느끼는 남자가 보기에 무로마치 말기에 출현한 '상인商人'이라는 자들은, 등에 날개가 달린 인간같이 이상한 느낌을 주는 존재였으리라. 농민의 눈으로 보면 상인이란 이상한 자들이었다. 상인들은 기지機智와 기략機略을 특징으로 삼고 있었고, 농민과는 달리 천하를 산천초목으로 구분하지 않고 '유통流通'이라는 그들의 체험을 통해 종합적인 시야에서 감지하려 했다. 칸베에는 말 상인 출신이 아니었지만 상인같은 이미지를 풍겼다는 점에선, 이에야스가 가지고 있던 인상이 들어맞았다고 하겠다.

  이에야스와 같은 감각에서 보자면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도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도, 그 전신渾身의 기략감각은 상인 그 자체처럼 느껴졌을 것이며, 바꿔 말하자면 상인적인 기략이 없이 이 시대를 통일하는 건 불가능했다. 특히 히데요시 쪽의 통일전략은, 할거割據해 있던 여러 세력들과 개별적으로 거래를 벌여 상대로 하여금 그 자신도 깨닫지 못했던 이익을 수고스럽게 가져다주기도 하면서, 이를 히데요시가 원하는 조건과 조화시켜 상대를 납득시키며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일 없이 아군으로 편입시키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정략사상은 카마쿠라 / 무로마치 초기에 존재했던 게 아닌, 무로마치 말기의 상업 성행과 더불어 생겨난 것임이 틀림없다.

  칸베에의 가계家系는 이미《하리마나다 이야기播磨灘物語》에서 다루었듯이, 상인적 사고법에 근본을 두고 있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오우미近江 지방에서 유랑을 떠나, 당시 산요도山陽道 제일의 상업도시였던 비젠 후쿠오카備前福岡에 머무르면서 그 감각을 체현했던 것이리라. 이윽고 여전히 빈궁한 상태로 반슈로 가서, 넓은 지역에 걸쳐 안약目藥을 판매하는 방식을 고안하여 성공, 호족豪族으로 거듭난 것이다. 이 무렵에 들어 이전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유통되기 시작한 화폐의 힘으로 부하들을 거느리고, 그들의 심복心服을 얻어 호족이 되어버린 기묘한 발흥은, 이전 시대에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칸베에는 젊은 시절부터 교토京都나 사카이堺를 좋아했다. 이 시대에 해외무역海外貿易을 벌이는 상인들은 주로 이 두 도시에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들이 지닌 국제성世界性이라고 할 법한 기운은 이 시대의 다도茶道에까지 농후한 영향을 주면서 특이한 미의식을 만들어냈는데, 젊은 시절의 칸베에는 다도를 싫어했다. 그러나 다도에까지 영향을 뻗힌 상업도시의 국제성 쪽은 애호하여,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이 시대의 많은 호족집안 자제가 그러했듯 그도 크리스챤이 되었다.

  다음으로는 합리주의合理主義를 편애한 칸베에의 기호에 대해 언급하겠다.

  합리주의는 카마쿠라鎌倉ㆍ무로마치室町 체제와 같은 봉건적 체제 속에서는 결코 자라날 수가 없다. 일본의 합리주의는 이후에 쇠약해지기는 하지만, 무로마치 말기의 상업사회 속에서 차츰차츰 성립되어 나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합리주의의 총아가 오다 노부나가였고, 또 히데요시였다.

  칸베에가 아마 젊은 시절에 교토에서 접하였을 오다 가문이 풍기는 향취는 다른 무로마치적 향취를 간직한 봉건적 다이묘大名나 소묘小名와는 대단히 판이한 것으로, 인재人材들까지 상품화해버리려 할 정도의 합리주의적 인상을 풍겼음이 틀림없으며, 그러한 인상은 칸베에로 하여금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그가 반슈 지방에 오다 세력을 끌어들이려 한 동기는 (역주 : 주군 가문인) 코데라 씨小寺氏의 존망存亡이라는 소호족의 생존을 위한 타산도 작용했을 것이나,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오다 씨織田氏와 감각적으로 통하는 데가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적어도 서쪽의 모리毛利 세력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였던 건, 계산이라기보단 감각의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칸베에의 생애는, 오다 씨와 토요토미 씨라는 거대한 풍경 속의 점경点景에 지나지 않았다. 그 토요토미 정권이 히데요시가 죽은 후 분열하여 세키가하라 전투関が原の戦い로 파급되었을 때, 칸베에는 지금의 오오이타 현 나카츠大分県中津에 있었다.

  당시 큐슈九州에 있던 다이묘들 중 태반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 편에 붙어, 그 당주와 장병들 다수가 카미가타(上方, 역주 : 쿄토 / 오사카 근변지역)에 있었기에 그야말로 빈 집이나 마찬가지가 된 성루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가 표면적으론 이에야스를 위한답시고 하면서 그야말로 마술적이라 할 정도의 신속함으로 북 큐슈를 석권한 건, 당시 큐슈가 군사적 공백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점도 한몫한다. 그러나 칸베에가 처음에 갖고 있던 병력은 고작 수백 명에 불과했다.

  그 마술을 가능하게 했던 건, 중세 이래의 경제적 기초였던 쌀(코쿠다카石高)이 아닌, 칸베에가 애호하던 돈錢의 경제였다. 일평생 절약가로 살아왔던 그는 텐슈가쿠天守閣 마루가 휘어질 정도로 축재하고 있던 금은을 응접실에 산더미처럼 쌓아놓고는, 그 재물로 낭인浪人들과 농민百姓들 가운데서 전사들을 신속히 모병했다. 곧장 3천 명이 모였고, 이들을 이끌고 타 지방을 공략하거나 거래를 해 나가면서 종국에는 9천 명으로 병력이 불어났다. 이 기발함은 그가 얼마나 화폐경제의 전위적 신도였는가를 증명해준다.

  칸베에는 동군과 서군의 싸움이 1년 정도는 갈 것이라 내다보고 있었다. 칸베에가 계산한 것처럼 전쟁이 1년쯤 계속되었다면, 어쩌면 천하를 거머쥐는 자는 이에야스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키가하라 전투는 고작 반나절만에 끝나고 말았다.

  칸베에 자신은 농촌 촌주를 거대화시킨 듯한 감각을 지닌 이에야스라는 남자를 성격적으로는 좋아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러나 세키가하라의 승리가 이에야스에게 돌아간 것을 알자, 돈을 뿌려 징모한 병사들을 해산시키고 이전의 은거자隱居者로 돌아갔다. 이와 같은 깔끔한 진퇴는 칸베에의 성품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나, 그 이상으로 이 시대에 싹트고 있던, 그리고 이윽고 토쿠가와 봉건체제가 시작되면서 쇠약해졌을 상업적 합리주의 논리 자체의 체현이기도 했다. 골계감마저 느껴지는 칸베에의 깔끔한 논리적 은퇴는, 동시에 한 시대가 끝났음을 알리는 상징성마저 느끼게 한다. 칸베에는 그야말로 평생동안 시대의 주변인으로 머물렀다. 그러나 그런 의미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기묘함을 느끼게 하는, 길모퉁이에서 헤어진 후에도 여운을 남기는 존재인 셈이다. 


덧글

  • 키키 2017/10/27 19:27 # 답글

    구로다 죠스이 이야기이군요. 저는 죠스이를 '서쪽의 마사무네'라고 생각합니다 ㅎㅎ
    료타로 선생은 죠스이를 마치 오다가의 정신을 잇는 후계자라고 본 모양이군요.
    생각해보니 그런 것도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오다-도요토미-구로다로 이어져 내려오는 락시락좌의 전통일까요.

    구로다를 띄우다 보니, 이에야스를 '농촌 촌주를 거대화한 다이묘'라고 묘사한 부분이 있습니다만 오히려 다소 보수적인 관점이 있었기에 이에야스가 전국을 안정화 시킨 건 아닌지 생각이듭니다. 오다가의 정신이라는 것도 당대에는 너무 급진적이었죠. 이해를 못해서 마왕이라고 부를 정도니

    아무튼 이번 편도 잘 봤습니다.

    ps. 다음달 30일날 발매되는 신장의야망 대지에는 경제-상업망 구축 시스템이 있던데, 료타로 선생이 말한 오사카-사카이를 중심으로 하는 대규모 상업선도 구현될 지 궁금하네요. 한창 기대 중입니다.
  • 3인칭관찰자 2017/10/28 00:50 #

    음, 유능하고 야망이 큰 사람이라 히데요시나 이에야스 같은 텐카비토들에게 경계심을 샀다는 점에서 마사무네와 닮은 것 같습니다. 죠스이가 의외로 인격적으론 상식이 통하는 개념인이었던 데 비해 마사무네는 적 뿐 아니라 같은 아군 입장에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면이 있었던 것 같지만요.

    오다-토요토미 정권의 근저에 존재했고 두 정권이 추구하기도 했던 상인적 면모, 중상주의적 단면이 이에야스와는 달리 죠스이에게는 있었다고 시바 씨는 생각하시던 것 같습니다.

    시바 씨는 "토쿠가와 막부는 피치자인 일본인들의 진취성을 떨어뜨리고 에너지를 억누름으로써 정권의 영속을 도모했다" 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이 글의 이에야스에 대한 평가와 맥락이 연결되어 있는 듯 합니다. 물론 이에야스와 그 이후의 토쿠가와 쇼군들이 사람들의 용맹성을 그런 식으로라도 억제하지 않았더라면 일본에 오랜 평화가 찾아왔을지는 의심스럽습니다만. ㅎㅎ

    노부나가의 야망 대지가 다음 달에 발매되는군요. 제 컴퓨터 성능으론 플레이하기 힘들 것 같으니 추후에 PS4 버전을 노릴까 싶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 작품 자체가 잘 뽑혀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경제에 관련한 새로운 요소를 구현한다고 하니 기대가 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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