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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셀렉션》아케치 미츠히데는 죽지 않았다? (1) ┣ 微妙な話たち



  이 글은 《歷史群像シリーズ 戦囯セレクション 俊英 明智光秀》 p. 166 ~171에 수록된 '역시 텐카이天海는 미츠히데인가? 숱한 증거들, 토요토미 가문에 복수하기 위해 세키가하라 전투에도 참전' 이라는 글을 번역한 것으로, 故 사소 쿠니오佐宗邦皇 님께서 집필하셨습니다. 전형적인 "ㅇㅇㅇ 생존설生存説" 내지 전설伝説 부류에 속하는 이야기로, 현재의 통설과는 영 거리가 먼 글인데다 집필자 분도 생전 이 글 이외에 여러가지 수상쩍은 역사적 주장들을 펴시던 분이기에, 흥미 본위로(내지는 이런 주장도 있다, 는 정도로만) 읽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시작하면서

  히에이 산에는 현재도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가 기증했다고 하는 석제 등롱石燈籠이 조용히 안치되어 있다. 여기에는【 케이쵸 20년(1615) 2월 17일, 봉납ㆍ기증奉寄進하다. 원주願主 미츠히데光秀 】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는 미츠히데가 케이쵸 20년(1615)까지 생존해 있었다는 명백한 물증이 된다. 오사카 여름 전쟁大坂夏の陣이 개시되기 직전, 아케치 일족明智一族의 원념怨念을 풀기 위해 토요토미 가문豊家 멸망을 기원하면서 일부러 속명인 '미츠히데' 란 이름으로 이를 기증한 것이다.

  불사전설不死伝説이라는 건 단순한 민중民衆의 바람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지금부터 서술할 '미츠히데=텐카이 설' 의 경우 앞에서 거론한 석제 등롱뿐만이 아니라, 역사적 증거라고 할 만한 사실이 다수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증거들을 샅샅이 검증해 보면, 당시 혼노사의 변의 진상을 은폐하기 위한 당시 권력자들의 미츠히데 말살, 그리고 텐카이 승정으로 변신한 행적이 부각된다. 상황증거로 보면 명백히 미츠히데는 텐카이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역사의 진상에 다가가보도록 하자.


  수수께끼의 인물ㆍ난코보 텐카이南光坊天海

  미츠히데=텐카이 설의 또 다른 주인공인 텐카이란, '난코보南光坊' '지라쿠인智樂院' 이라 불리던 천태종天台宗 승려인데 그야말로 불가사의하고 수수께끼가 많은 인물이다. 시호는 '지겐 대사慈眼大師' 로, 그는 헤이안 시대의 '치쇼 상인智証上人' 이래 700년만에 대사 칭호를 받은 자였다.

  그리고 막부권력이 만든《칸토 천태종 법도関東天台法度》를 이용하여 칸토의 천태종 사원들을 지배, 본산인 히에이 산 엔랴쿠사比叡山延曆寺를 능가하는 특권을 향유했으며 고요제이 죠우코後陽成上皇와도 친밀한 관계를 맺어, 황족의 일원으로서 대우받으면서 '히샤몬텐몬제키毘沙門天門跡' 칭호를 하사받음과 동시에, 종4위에 서임하여 호인다이오쇼(法院大和尙, 역주 : 원문의 오타. '院'가 아니라 '印'이다.)에 상당하는 지위를 얻었다.

  즉 당시 불교계에서는 상당한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밀교密敎 / 신토神道 / 도교道敎 / 음양도陰陽道 / 풍수학風水學 등에도 정통한 자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는 이와 같은 지식들을 최대한 활용하여 토요토미 가문豊家 괴멸작전의 방아쇠를 당겼고, 이에야스의 종교정책을 그 손으로 관장하면서 에도의 영적 방위망을 완성시킨 인물이었다. 그리고 이에야스가 사망했을 때는 스스로 선두에 서서 장례를 집행했고, 이후 '토쇼다이곤겐東照大権現' 으로서 제사를 받도록 했다.

  그야말로 그 권위와 권력이 쇼군을 능가했다고 할 수 있으리라. (토쿠가와德川) 히데타다秀忠 / 이에미츠家光는 물론이고 이에야스家康조차 그의 뜻을 따랐기에, '흑의의 쇼군' 이라고까지 불렸다.

  텐카이가 수수께끼의 인물이라는 건, 그의 전반생이 거의 베일에 쌓여있다는 데서 기인한다. 그 정도로 위세를 휘두른 '역사적 괴물' 이면서도, 텐쇼 17년(1589)에 에도사키후도인(江戸崎不動院, 지금의 이바라키 현茨城県 에도사키쵸江戸崎町)에 입산入山하기 이전의 기록은 싸그리 지워진 것처럼 명확하지 않다.

  전설에 따르면 텐카이는 아이즈会津 지방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불문에 들어가 히에이 산에서 수행, 겐키 2년(1571)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히에이 산을 방화ㆍ토벌한 후에는 타케다 가문武田家을 섬겼다고 한다. 그리고 에이로쿠 4년(1561)에 벌어진 타케다 신겐武田信玄 VS 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의 카와나카지마 전투를 카이즈 성海津城에서 관전하였다는 일화도 존재한다.

  그가 사망했을 때의 연령은 102세, 118세, 132세, 134세, 135세 등 여러 설이 있지만, (어쨌든) 경이로울 정도로 장수하였다. 텐분 5년(1536)에 태어나 108세에 입적했다는 설이 타당하나, 그렇다고 해도 경이롭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처음으로 만난 것도 표면적으론 그가 72세였던 케이쵸 13년(1608), 슨푸駿府에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앞에서 서술한 대로 이후 눈깜짝할 사이에 토요토미 가문 멸망과 이에야스의 장례를 비롯한, 막부 정치에서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막부 중핵으로 편입된 스피드도 역시 불가사의할 정도로 빨랐던 것이다.      


  막부에 의한 역사날조

  이러한 수수께끼의 인물ㆍ텐카이가 아케치 미츠히데였다는 사실은 당시 주변인물들에겐 '아는 사람은 아는 사실' 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주군에 대한 충성을 조직원리로 삼고 있던 막부의 입장에선, 아무리 텐카이로 이름을 바꾸었다고는 하나 주군을 살해한 바 있는 미츠히데를 중핵으로 끌어들이는 건 아름다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진실은폐가 시작된 것이다.

  막부는 겐로쿠 년간(1688~1704)에 접어들어 어용학자에게《아케치군키明智軍記》{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판본은 겐로쿠 6년(1693) 판본}를 작성하도록 명령했다. 이《아케치군키》야말로 막부가 사실을 은폐한 증거였다.

  이 책은 미츠히데를 군사軍師ㆍ축성술의 명인으로 치켜올리며, 혼노사의 변에 대해서도【 노부나가의 비도非道에 의한 인과응보의 결과 】라며 미츠히데를 어느 정도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반면으로 미츠히데가 오구루스小栗栖에서 사망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미츠히데가) 이 오구루스에서 사망하였다는 것을 정설로 삼아서 미츠히데=텐카이 설을 부정하려는 게 바로 막부의 의도였다. 당대의 권력자에 의해 역사가 날조된 것이다. 그러나 자연히 여러 부자연스런 점이 남겨졌고, 그런 면을 통해 진실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막부가 행한 사실은폐의 근거가 되는 '미츠히데의 오구루스 사망설' 자체가 실로 수상쩍다. 히데요시 군에게 미츠히데의 수급을 바친 자는 이 땅의 농민百姓이었던 나카무라 쵸베에中村長兵衛였다고 하나, 농민이 미츠히데의 얼굴을 알고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이로부터 60년이 지난 칸에이 년간(1624~1643)에 행해진 조사에 따르면, 마을 사람들 중에 그 나카무라 아무개란 인물을 아는 자는 없었다고 한다.(《다이고즈이히츠醍醐隨筆》)

  그리고 이 때 미츠히데와 함께 사망했다고 하는 신지 사쿠자에몬進士作左衛門 / 히다 타테와키比田帯刀 두 사람은 기실 사망하지 않았고 (훗날) 호소카와 오키아키細川興秋를 섬겼다는 사실이 판명된 바 있다.(《호소카와카키細川家記》) 자해한 주군의 수급을 진흙논에다 묻었다는 미조오 쇼베에(溝尾庄兵衛, 역주 : 시게토모茂朝)의 이야기같은 건 아무리 생각해도 만들어낸 이야기이며,《미노시美濃志》등에서는【 오구루스에서 죽은 건 미츠히데의 카게무샤影武者이다 】고 기술하고 있기도 하다. 아무래도 막부가 선전하였던 오구루스 사망설은 부정할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한다.

  오구루스를 간신히 탈출한 미츠히데는 인근의 히에이 산으로 도망쳐 들어갔을 것이다. 이를 맞아들인 엔랴쿠사는 노부나가를 죽인 미츠히데를 후대했음이 틀림없다. 미츠히데는 그대로 요카와 이이마루다니 쵸쥬인橫河飯室谷長壽院에 들어가 득도하여 '제슌是春' 이라는 이름을 받고, 그대로 머리를 깎은 후 불교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요카와도우샤나라비카쿠보우세후橫河堂舍並各坊世譜》<쵸쥬인> 항목에 따르면 '본래 이름은 미츠히데' 라고 속명이 기록되어 있다.

【 쵸쥬인의 제 2대 호인이었던 곤다이소우즈権代僧都 제슌의 속명은 미츠히데光秀였다. 그리고 쵸쥬인 1대인 코우게이光芸에게 삭발을 받고, 그 후 이곳에서 기거하며 케이소쿠인鷄足院을 감독했다. 겐나 8년(1622) 9월 25일에 세상을 떠나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

  필자는 이 히에이 산에서 미츠히데와 텐카이의 경력교체가 이루어졌다고 추측하고 있다. 미츠히데는 여기서 아이즈 출생자로 히에이 산에서 수행한 즈이후(隨風, 텐가이가 처음에 쓰던 이름)라는 이름의 승려를 알았다. 그러나 미츠히데와 동년배로 보이는 이 즈이후란 자는 이미 사망하고 없는 자로, 제슌=미츠히데는 그 즈이후란 자의 신분으로 위장하여 아이즈 출신자라는 경력을 손에 넣은 것이 아닐까.

  그리고 미츠히데가 사망한 후로부터 6년이 지난 텐쇼 16년(1588), 즈이후의 신분을 손에 넣은 미츠히데는 동쪽으로 내려가東下 다음 해인 텐쇼 17년(1589)에는 에도사키후도인에 입산하였다. 히에이 산의 부흥이 시작되어 산에 출입하는 자가 늘어난 반면, 즈이후의 고향인 아이즈 아시나 가문会津芦名家의 멸망이 눈앞에 다가왔기에 칸토에서는 그 얼굴을 아는 자와 마주칠 위험이 낮으리라고 생각한 것이 그가 동쪽으로 내려간 이유였을 것이다.

  동쪽으로 내려가던 중에 즈이후는 슨푸에서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재회했을 것이다. 이에야스는 그에게 지난 일을 사죄하고, 미츠히데와 다시 동맹을 맺고 싶다고 했다. 무슨 말이냐면,【 천주교 사제들을 추방하라 】는 조칙을 내린 오오기마치 텐노正親町天皇의 의향을 받들어 미츠히데와 이에야스가 공모하여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 바로 혼노사의 변이었기 떄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야스는 이를 실행에 옮긴 미츠히데를 버리고 자기만 빠져나갔다. 이 이에야스의 전과, 그리고 후술할 토쿠가와 막부 확립 시기에 텐카이가 세운 공헌에 의해 이후 막각에서 텐카이가 중용되었고, 쇼군들과의 역학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덧글

  • 키키 2017/08/09 23:51 # 답글

    미츠히데가 죽지 않았다는 것보다도, 자연스럽게 미츠히데, 이에야스를 혼노지 변 기획자로 소개하는게 더 충격이네요 ㅎㅎ
  • 3인칭관찰자 2017/08/10 07:26 #

    한때 일본에서 혼노사의 변 흑막설이 유행할 때 위와 비슷한 이에야스 흑막설이 거론되기도 했지만, 물론 이에야스가 정말로 혼노사의 변에 연관되었다면 자기 영지로 돌아가는데 도망치듯이, 그것도 이가 지방의 험로를 넘는 것까지 감수할 필요가 없었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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