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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염의 인장》오오타니 요시츠구와 임진왜란 (完) 역사



  이 글은 신인물문고新人物文庫 236《화염의 인장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모든 것炎の仁将 大谷吉継のすべて에 수록된 글들 중 하나(p. 105 ~ 137)로 타케타니 카즈히코武谷和彦 님께서 집필하신 <오오타니 요시츠구 격투보 (2) 분로쿠ㆍ케이쵸노에키>란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위의 글 전체를 번역하려는 건 아니며, 히젠 나고야 성과 나고야 성터 근변에 있다는 오오타니 군 진지에 대해서 분석한 글의 후반부(p. 122 ~ 137, 사실상 저자분의 전문분야이지만...) 쪽은 지식이 일천하여 번역하지 않으려 합니다.


  분로쿠 2년(1593) 1월 초순, 의병들이 가세한 명나라ㆍ조선국군은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 소우 요시토시宗義智 등이 농성한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하여 탈환하였다. 한성漢城에서 이 패전을 보고받은 총대장격인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와 행정관들은 일본군을 한성으로 집결시키기로 했다. 이 때, 한성으로의 철수에 반대하는 개성의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 등에 대해선 요시츠구가 파견되어 설득에 임했다고 전해진다.

  1월 후반, 명나라ㆍ조선국군은 평양을 탈환한 후, 한성을 향해 남진을 개시했다. 일본군은 이를 한성 북부의『벽제관碧蹄館』에서 요격하여 타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 /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등의 활약에 힘입어 격파했다. 요시츠구도 이 전투에 참가했으나, 직접적으로 어떤 전투행동을 벌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2월에 들어서 일본군은 조선국군과 의병들이 농성한 한성 북서쪽의 행주산성幸州山城을 공격했으나, 총대장 우키타 히데이에를 위시하여 이시다 미츠나리 / 마에노 나가야스 등 수많은 무장들이 부상을 입고 패퇴했다. 한성에 있던 일본군은 물자보급도 여의치 않아, 제장들은 합의하여 한성에서 철퇴하는 길을 모색했다. 히데요시는 체제 재편을 도모하기 위해 아사노 나가마사 / 쿠로다 요시타카黑田孝高를 파견했으나, 한성 유지는 곤란한 상황이었다.

  한편, 명나라 군대 내부에서도『벽제관 전투』이후 전쟁을 꺼리는 분위기가 강해져, 양군 사이에선 강화를 지향하는 교섭이 활발히 벌어졌다. 교섭은 일본 측의 코니시 유키나가, 명나라 측의 심유경沈惟敬이 중심이 되어 행해졌으나, 요시츠구를 비롯한 행정관들도 여기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그 결과, 일본군은 명나라에서 온 사절(정식 명나라 사절이 아니다)을 맞이하여 체면을 유지한 후, 4월 중순부터 한성에서 철수하기 시작하여 일본군은 한반도 남동부 해안가로 물러갔다. 그리고 이 일련의 경과 속에서 일본군 내의 여러 다이묘들 간의 대립도 현저해진 모양새이다. 그리고 분로쿠 2년(1593) 3월 시점에서 한성에 집결한 여러 다이묘들의 군대를 기록한 사료에 따르면, 오오타니 군은 1,505명이었다고 전해진다.

  5월 15일, (코니시) 유키나가 / 요시츠구 등의 행정관의 호위를 받으며 명나라 사절은 나고야에 도착, 히데요시는 23일 사신을 인견하였다. 다음 날 요시츠구 / 미츠나리 / 나가모리 등의 행정관들은 다시 조선으로 건너가, 진주성晋州城 공략을 위한 체제정비 등의 소임에 집중했던 듯하다. 히데요시는 명나라의 사절단을 나고야로 맞아들이는 한편으로, 한반도의 남쪽 절반 영토를 할양받기 위해 해안가와 경상도慶尙道 / 전라도全羅道를 연결하는 수륙교통의 요지이자 '조선국 제일의 명성名城' 이라고 불리던 진주성을 공략하도록 명령, '분로쿠ㆍ케이쵸 전역' 중에서도 단일 작전행동으로만 치면 최대의 병력을 동원, 진주성을 공격했다.

  요시츠구도 이 전투에 참전했으며, 작전지령서에 따르면 미츠나리와 함께 후위부대로서 배비되어 1,535명의 병력을 이끌고 있었다 한다. 진주성은 명나라의 사절이 나고야를 떠난 다음 날인 6월 29일에 함락되었다. 이 전투 도중에 강화교섭을 승인하는 조정의 칙허를 얻은 히데요시는, 6월 28일자로 행정관인 요시츠구 / 미츠나리 / 나가모리와 유키나가에게 '대명-일본 화평조건' 을 제시하여, 요시츠구 등 4명이 교섭의 주체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요시츠구의 귀환과 그 후

  진주성 공략 후, 한반도 남동부 해안지역에 있던 일본군에 대해 히데요시는 연안부를 중심으로『통치를 위한 성들仕置之城城』=『왜성倭城』을 구축할 것을 명하여 지배거점 형성을 서두르게 함과 동시에, 총 5만여 명의 조선 주둔군 가운데 동일본의 다이묘들 / 요시츠구를 비롯한 행정관들 / 시동들은 일본으로 귀환할 것을 지시했다. 행정관들 중 하나인 요시츠구도 그들 중에 포함되어, 귀환한 다이묘들과 그 병력, 순번을 기록한 사료에선 마지막 순번이었던 '4번 대' 에 속하였고, 그 병력은 1,640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자이후 텐만궁에는 '기원자 오오타니 교부쇼유 요시츠구. 분로쿠 2년 9월 길일' 이라고 새겨진 '행복을 비는 글이 새겨진 거울鶴亀文懸鏡' 이 봉납되어 있기에 요시츠구도 이 무렵에는 귀환해 있었을 것이라 추측되며, 늦어도 윤 9월 초순까지는 일본으로 귀환한 듯하다.

  귀환한 요시츠구는 다음 해인 분로쿠 3년(1594) 초에는 후시미 축성伏見築城 임무에 나서 영지인 츠루가敦賀의 상인들을 부리며 주로 재목 조달과 수송에 나서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나, 병이 악화된 것인지 이후 강화교섭과 결렬, 그리고 '케이쵸 전역(慶長の役, 역주 : 정유재란丁酉再亂)' 에서는 눈에 띠는 행동을 찾아볼 수가 없다.

  분로쿠 5년(1596)에 명나라 책봉사冊封使가 일본으로 건너왔고, 히데요시는 9월에 오사카 성에서 사절을 인견했다. 책봉사는 히데요시를 '일본국왕日本國王' 으로 봉하고, 관복과 황금도장金印 등을 수여하는 내용의 칙유 / 조칙 등을 내렸다. 이와 관련하여 히데요시 배하의 여러 다이묘들에게도 명나라 병부의 차부(箚符, 사령辞令)과 관복 등이 내려져,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우도독右都督' / 마에다 토시이에ㆍ우키타 히데이에 등 7명이 '도독동지都督同知' / 요시츠구ㆍ미츠나리 등 8명에게는 '도독첨지都督僉知' 등의 지위가 하사되었다. 카토 키요마사加藤淸正나 쿠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등의 다이묘들이 포함되지 않은 이 인선을 통해 명일 양국의 강화교섭을 주도한 자들의 자의적인 부분을 읽어내는 것도 가능하나, 요시츠구가 강화교섭에 얼마나 간여했는지, 그리고 토요토미 정권에서 요시츠구가 갖고 있던 입장이 어떤 것인지를 충분히 엿볼 수 있다.

  강화교섭이 결렬된 후, 요시츠구가 '케이쵸 전역'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흔적은 보이지 않으며, 일본군이 한반도 남반부를 석권한 케이쵸 2년(1597) 9월 당시 요시츠구는 후시미의 저택에서 지내면서, (자신의 저택에) '행차御成' 하신 히데요시를 성대하게 접대했다. 일설에 따르면 히데요시의 행차는 요시츠구를 병문안하려는 의미가 강했다고도 전해진다.
 


덧글

  • 진냥 2017/08/04 00:44 # 답글

    주 중요한 데서 짤린 듯한 기분이 ㅎㅎㅎㅎㅎ
  • 3인칭관찰자 2017/08/04 06:28 #

    좀 그렇죠? ^^;; 이 다음엔 곧바로 지금까지의 이야기랑 큰 관련은 없는 성곽이랑 진지 이야기로 넘어가고, 그 내용이 끝난 후에야 다른 분이 집필한 세키가하라 이야기로 이어지는데, 필자분이 다른 만큼 글들의 연결성은 부족해서 약간 찜찜하긴 합니다.
  • 남중생 2017/08/04 16:07 # 답글

    '행복을 비는 글이 새겨진 거울鶴亀文懸鏡'은 어떻게 번역하신건지요? 鶴亀文='행복을 비는 글'로 이해하면 될까요?
  • 3인칭관찰자 2017/08/04 16:23 #

    네. 말씀대로 鶴亀文을 '행복을 비는 글' 로 해석했습니다.('기복 거울' 로 할까 생각도 해 봤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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