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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염의 인장》오오타니 요시츠구와 임진왜란 (2) 역사



  이 글은 신인물문고新人物文庫 236《화염의 인장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모든 것炎の仁将 大谷吉継のすべて에 수록된 글들 중 하나(p. 105 ~ 137)로 타케타니 카즈히코武谷和彦 님께서 집필하신 <오오타니 요시츠구 격투보 (2) 분로쿠ㆍ케이쵸노에키>란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위의 글 전체를 번역하려는 건 아니며, 히젠 나고야 성과 나고야 성터 근변에 있다는 오오타니 군 진지터에 대해서 분석한 글의 후반부(p. 122 ~ 137, 사실상 저자분의 전문분야이지만...) 쪽은 지식이 일천하여 번역하지 않으려 합니다.


  <타케타니 카즈히코>

  사가 현 출신. 사가 현 교육청 문화재과 근무.(前 사가 현립 나고야 성 박물관 학예원) 집필ㆍ편집한 보고서로《나베시마 나오시게 진지터》(나고야 성 박물관)가 있으며, 집필ㆍ편집한 도록으로《히젠 나고야 성과 '텐카비토天下人' 히데요시의 성》(나고야 성 박물관) 등이 있다.


  요시츠구의 출진

  (토요토미豊臣) 히데요시秀吉의 출진에 앞서 요시츠구는 텐쇼天正 20년(1592) 2월 24일,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를 비롯한 여러 다이묘大名들과 함께 쿄토京都를 출진, (일본) 국내의 침공거점인『히젠 나고야肥前名護屋』로 향했다.

  히데요시가 발급한 3월 13일자 작전지령서陣立書 중 하나에 따르면 요시츠구는 이시다 미츠나리 / 오카모토 요시카츠岡本良勝 / 마키무라 토시사다牧村利貞와 함께 거점인 나고야의 선박 행정관舟奉行이 될 것을 명 받았었다. 항구도시인 츠루가敦賀를 본거지로 삼고 있던 요시츠구는 선박 운용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리라 추측된다. 그리고 상세한 숫자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일반적으로 요시츠구가 담당한 군역은 1,200명으로 알려져 있다.


  나고야에서의 요시츠구

  개전 당초에 요시츠구는 나고야를 근거지로 삼아, 작전지령서에 기반하여 해상수송과 관련된 선박운용 등의 임무를 맡았으리라 추측된다.

  하카타의 상인으로 다인茶人으로도 알려진 카미야 소탄神谷宗湛이 기록한《소탄닛키宗湛日記》는 5월 4일날 요시츠구의 병영에서 다회를 열었던 것을 기록하고 있으며, 5월 7일에는 마시타 나가모리의 병영에서 다회를 열어, 요시츠구와 미츠나리도 참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기록된 요시츠구 / 미츠나리 / 나가모리 세 명은 공사를 막론하고 친밀한 관계였다는 건 다른 사료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으며, 이후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전쟁수행과 경략을 담당하는 토요토미 정권의 중요인물들로써 동일행동을 취하는 사례가 많아지게 되었다.


  조선 행정관朝鮮奉行으로서 도해渡海하다

  일본군은 개전 후 약 20일만에 조선국 수도『한성漢城』을 공략하여 히데요시도 이른 시기부터 조선으로 건너가려고 했으나, 선박 확보가 곤란했던데다 조선국 수군의 반격 등에 따른 여러 사정이 작용하여, 6월 무렵이 되자 히데요시 본인의 도해를 내년(1593) 봄으로 연기하는 결단이 내려짐과 동시에 조선국 8도의 통괄적 경략을 위임한 '조선 행정관들朝鮮奉行衆' 이 파견되었다. 이 행정관에는 미츠나리 / 나가모리 / 마에노 나가야스前野長康 등과 함께 요시츠구도 선발되어(도합 7명) 조선 각지에 배치된 큐슈 / 츄고쿠中国 / 시코쿠四国 지방의 여러 다이묘들의 군대를 주체로 삼던 일본군에게 명나라로 침공할 것을 명하는 내용이 담긴 히데요시의 군령을 가지고, 6월 초순에 나고야를 떠나 조선으로 건너갔다.

  이전부터 조선에 주둔하던 제장들은 합의에 따라 在 조선 다이묘들끼리 조선을 분할하여 경략하기로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주둔 제장들의 의도와는 달리 히데요시는 8도 경략을 행정관들에게 통괄시키고, 조선국을 유린하였던 큐슈 / 츄고쿠 / 시코쿠의 여러 다이묘들을 주체로 삼은 군대에겐 6월 3일자로 부서를 정하여【 명나라를 공략하라 】는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행정관들에겐 자신이 내린 명령이 잘 행해지는지 감독하고 상세한 사항을 보고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바다를 건너간 행정관들 밑에는 '대관들御代官衆' 내지는 '시동들御小姓衆' 로 호칭되는 히데요시의 근습近習 가신들이 배치되어, 히데요시는 이 '시동들' 을 조선 각 도에 파견하여 행정관들의 통괄하에 조선 지배체제를 굳히는 노선을 지향하였다. 개전 직후부터 히데요시와 전장의 다이묘들 사이엔 전황에 대한 인식과 경략방침 등을 놓고 현저한 차이가 존재했다는 게 엿보인다.

  요시츠구 / 미츠나리 등의 행정관들은 7월 16일 한성에 입성했다. 이 시기부터 조선국 각지에서 '의병義兵' 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었고, 명나라에서 파견한 원군 등에 의해 일본군은 고전하는 중이었다. 행정관들 중에서 요시츠구 / 미츠나리 / 나가모리가 함께 서명하여 히데요시를 가까이서 섬기던 키노시타 요시타카木下吉隆 등에게 보낸 편지의 초고라 생각되는 사료에 따르면,【 소수의 일본군만으론 조선국 통치를 실행하는 게 곤란하며, 명나라 군의 내습에 의해 고전하고 있다. 】는 현 상황을 알려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시기 해전에서의 패배로 일본군의 제해권 확보도 위태로워진 상황도 한 몫하여, 히데요시는 한반도 통치를 우선하고 명나라 침공은 내년 봄에 본인이 조선으로 건너갈 때까지 보류하는 걸로 계획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덧글

  • 남중생 2017/08/04 16:00 # 답글

    부교를 행정관이라고 번역하면 되는군요! 많이 배우고 갑니다.
  • 3인칭관찰자 2017/08/04 16:31 #

    개인적으로 무로마치 시대 ~ 막부 말기까지는 '부교'란 단어를 '행정관'으로 번역해도 어느 정도는 들어맞지 않을까 생각하기에 '행정관' 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옛날엔 '장관' 이라고도 번역했지만 '장관'보다는 '행정관'이 더 옳은 번역이 아닌가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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