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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염의 인장》오오타니 요시츠구와 임진왜란 (1) 역사



  이 글은 신인물문고新人物文庫 236《화염의 인장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모든 것炎の仁将 大谷吉継のすべて에 수록된 글들 중 하나(p. 105 ~ 137)로 타케타니 카즈히코武谷和彦 님께서 집필하신 <오오타니 요시츠구 격투보 (2) 분로쿠ㆍ케이쵸노에키>란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위의 글 전체를 번역하려는 건 아니며, 히젠 나고야 성과 나고야 성터 근변에 있다는 오오타니 군 진지터에 대해서 분석한 글의 후반부(p. 122 ~ 137, 사실상 저자분의 전문분야이지만...) 쪽은 지식이 일천하여 번역하지 않으려 합니다.


  <타케타니 카즈히코>

  사가 현 출신. 사가 현 교육청 문화재과 근무.(前 사가 현립 나고야 성 박물관 학예원) 집필ㆍ편집한 보고서로《나베시마 나오시게 진지터》(나고야 성 박물관)가 있으며, 집필ㆍ편집한 도록으로《히젠 나고야 성과 '텐카비토天下人' 히데요시의 성》(나고야 성 박물관) 등이 있다.



  카라이리唐入 - 히데요시의 대륙 침공 -

  유럽 각국을 중심으로 삼은 세력들이 세계를 석권하고 있던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 일본에서는 16세기 말 국내를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다음 창끝을 바다 저편의 대륙으로 돌리기로 결정하였다.

  히데요시가 언제, 어떠한 이유 때문에 대륙침공의 의지를 굳혔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텐쇼 13년(1585)에 가신에게 보낸 편지에【 당나라(중국)의 영토까지 하사할 생각을 갖고 있다. 】는 문구가 존재하기에, 이미 정권형성 초기단계부터 '카라이리 = 대륙침공' 을 염두에 두고 있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텐쇼 15년(1587), 사츠마 시마즈 씨薩摩島津氏의 항복을 받고 큐슈九州를 평정한 히데요시는 큐슈 경략을 "고키나이와 같게(五畿內同前, 역주 : 고키나이란 쿄토 근변의 야마시로 / 야마토 / 셋츠 / 카와치 / 이즈미 다섯 지방)" 하라고 지시하여 대륙 침공에 앞서 지반을 굳히도록 한 후, 쓰시마 섬對馬의 소우 씨宗氏에게 조선국의 복속을 요구하는 외교교섭을 벌일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텐쇼 18년(1590)에 칸토関東 지역의 호죠 씨의 항복을 받은 후 오우(奥羽, 역주 : 무츠陸奥 / 데와出羽 지방. 토호쿠東北)까지 평정하고 일본통일을 달성한 히데요시는 침공태세를 정비하여 다음 해인 텐쇼 19년(1591) 8월, 히젠 나고야肥前名護屋에 히데요시가 "기거하실 곳御座所" 인 나고야 성 축성명령을 내렸다.


  분로쿠 전역(文禄の役, 분로쿠노에키, 임진왜란壬辰倭亂)

  텐쇼 20년(1592) 초에 히데요시는 '카라이리'를 앞두고 각종 군령들을 정한 후, 3월엔 16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편성하게 했다. 4월 중순, 코니시 유키나가 등의 일본군이 부산釜山을 공격하여, 전후 약 7년에 걸친 한반도를 주전장으로 삼은 전쟁의 막이 올랐다.

  일본군은 개전한지 고작 20일 정도만에 조선국의 수도인『한성(漢城, 지금의 서울)을 공략하고, 이어서 조선 각지로 침공하였다. 그러나 명나라의 구원과 '의병義兵' 이라 불리던 조선국민들의 봉기, 조선국 수군의 반격, 그리고 겨울의 도래 등으로 인해 열세로 몰려, 1년도 버티지 못한 채 한성을 포기하고 반도 남동부 해안가로 철수한 후, 각지에『통치를 위한 성들仕置之城城』=『왜성倭城』을 축조하였다. 이런 가운데 히데요시의 조선행渡海은 재삼에 걸쳐 연기되었고, 결국 히데요시가 대륙으로 건너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편, 한성을 탈환한 명나라ㆍ조선군도 소모가 격심하였고, 특히 명군 쪽에는 전쟁을 꺼리는 분위기厭戰氣分가 만연하여, 이후 일본과 명나라 사이에 강화교섭이 본격적으로 진전되어 갔다. 5월에 나고야로 파견된 '가짜' 명나라 사절단을『사죄의 칙사』로 인식하고 있던 히데요시는, 명나라 황제의 딸을 일본국 텐노天皇의 후비로 보낼 것 / 조선국 영토 할양 등을 요구하는 내용의 화의안을 제시했다.

  그 후, 8월에 히데요시의 측실側室ㆍ요도도노가 훗날의 (토요토미) 히데요리秀頼가 되는 남자아이를 출산하면서, 이를 보고받은 히데요시는 나고야를 떠나 오사카로 돌아가, 이후론 두 번 다시 나고야로 오지 않았다.


  강화교섭의 전개와 파탄

  명나라와의 강화교섭은 초기단계에선 코니시 유키나가, 그리고 히데요시가 조선에 행정관으로 파견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 / 마시타 나가모리增田長盛 /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吉継가 주체가 되어 벌여나갔으나, 히데요시가 명나라 사절에게 화의조건을 제시하고 나고야 성을 떠난 후에는 코니시 유키나가가 교섭을 주도했다.

  명나라의 심유경沈惟敬과 코니시 유키나가는, 유키나가의 가신인 나이토 죠안(內藤如安, 역주 : 조선과 명나라에선 소서비小西飛라 불렸다)을 히데요시의 강화사절로 위장시켜, 분로쿠 3년(1594)에 죠안은 명나라 황제를 알현하여 책봉사 파견을 실현시켰다. 분로쿠 5년(1596) 9월, 히데요시는 오사카 성에서 명나라 사절을 알현했으나 조선국 영토 할양이 다루어지지 않은 데다 조선국 왕자의 입조 등이 없었다고 하며 격노하였기에, 강화교섭은 결렬되었다고 전해진다.


  케이쵸 전역(慶長の役, 케이쵸노에키, 정유재란丁酉再亂)

  케이쵸 2년(1597) 2월, 재침공 의지를 굳힌 히데요시는 총 병력 약 14만 명을 편성하였으나 '분로쿠 전역' 때와는 달리 '카라이리' 는 적극적으론 추진하지 않은 채 화의조건 = 할양을 원하던 영토와 깊은 관련이 있던 한반도 남반부를 침공하게 했다.

  일본군은 한반도의 남반부인 경상도慶尙道 / 전라도全羅道 / 충청도忠淸道를 석권하였으나, 이번에도 의병과 조선국 수군의 강력한 저항을 받았던 데다, 겨울철을 앞두고 병력을 전개하기가 불리함을 깨닫자 병력을 한반도 남동부 해안가로 철수시켜, 성곽 축조와 강화에 착수하였다. 11월에는 명나라의 원군이 한성에 도착하여, 명나라 군대ㆍ조선국 군대는 대규모 반격을 개시했다. 일본군은 고전하면서도 이들을 일시적으로 격퇴했고, 전선은 교착상태에 들어갔다.

  이런 가운데 케이쵸 3년(1598) 8월에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토요토미 정권의 앞날을 위임받은 '다섯 다이로五大老''다섯 부교五奉行' 는 반도에서 일본군을 철수시키기로 결단하였다. 양군 모두가 커다란 희생을 치른 끝에 11월 후반에 이르러 일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함으로써 한반도에서의 전투는 종식되었으나, 일본국과 조선국이 국교를 다시 회복하는 데는 10년이라는 세월을 필요로 했다.

  이 전쟁의 무대가 되어버린 조선국이 입은 손해는 엄청난 것으로, 국력을 회복하는 데는 오랜 세월이 걸렸으며, 그 상흔은 지금까지도 치유되지 못한 채 이어내려져 오고 있다. 그리고 명나라도 이 파병에 의해 크게 국력을 소모하여 나라가 망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으며, 일본 쪽도 토요토미 -> 토쿠가와로 정권이 교체되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기에, 이 전쟁은 동아시아를 뒤흔든 커다란 역사사상歷史事象으로서 기억되었다.  



덧글

  • 진냥 2017/08/01 21:36 # 답글

    오오... 모 게임덕분에 흥미를 가지게 된 인물인데 임진왜란과의 관계라니 더욱 흥미롭군요. 기대하겠습니다!
  • 3인칭관찰자 2017/08/02 09:18 #

    세키가하라 때처럼 중요한 역할을 맡아서 유명한 에피소드(조선 사람 입장에선 악명...)를 남긴 건 아니지만, 토요토미가 파견한 행정관(봉행) 중 하나로 활동한 모습을 기록한 이 글도 그의 다른 일면을 보여주고 있더군요. 오늘 밤중으로 후속글이 올라가지 않을까 싶은데, 흥미롭게 읽어주시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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