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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망! 세키가하라》'부코야와武功夜話' 로 보는 미츠나리 (4) ┗ 微妙な話たち



  이 글은 신인물문고新人物文庫 20《이시다 미츠나리 야망! 세키가하라石田三成 野望! 關ケ原에 수록된 글들 중 하나(p. 75 ~ 91)로 모리모토 시게루(森本繁, 1926~) 님께서 집필하신 <부코야와로 보는 이시다 미츠나리>란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글이 주로 참고한《부코야와武功夜話》란 문서는, 위 책이 처음 출판된 30년 전과는 달리 지금 일본 내에서 위서인지 아닌지 여부를 놓고 연구자 간의 찬반양론이 극심히 갈리는 사료가 되어버린지라, 일단 '미묘한 이야기' 카테고리에 포함시켰습니다.


  미츠나리는 처음에 명나라와의 강화회담을 평양平壤에서 해야 할지, 군대를 경성(京城, 역주 : 서울)으로 퇴각시켜 그곳에서 화의에 응해야 할지 고민하였으나, 결국 평양에서 강화회담을 진척시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평양에는 적군으로부터 노획한 수만 석의 군량이 있었고, 성의 방어를 굳혀 농성하다 보면 개성開城에 포진하고 잇던 일본군 3만 명의 지원을 받아가며 장기 농성전을 도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미츠나리의 계획은 이여송李如松이 지휘하는 10만 여 기(역주 : 실제론 4만 3천여 명)가 평양성平壤城으로 내습하면서 허망하게 무너졌다.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수많은 부하들을 잃고 겨우 목숨을 건져 경성으로 도망쳐 돌아왔다.

  이렇게 되자 조선에 있던 제장들과 미츠나리의 의견은 다시 한 번 대립하였다.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는 개성과 그 속성付城을 지키며 적군을 요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데 비해, 미츠나리는 임진강臨津江 후방까지 물러나 험준한 지역들을 굳게 지켜 적의 진군을 막은 후, 다시 강화회담을 열어야 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리고 군감인 카토 미츠야스加藤光泰는 타카카게의 의견에 찬성하여, "지부쇼유 님의 의견도 지당하긴 하나, 대군에 겁을 먹어 성을 버리고 도망쳐 물러난 후에 화의를 맺으면, 아군에게 불리해질 수밖에 없는 게 전투란 거외다. 본인이 선봉을 맡아 적군을 격파할 테니 그 후에 강화회담을 벌이도록 하시오." 라는 강경의견을 내세웠다.

  결국 미츠나리의 의견에 군감 마에노 나가야스前野長康가 찬동하고,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吉継 / 마시타 나가모리增田長盛도 동의했기에, 위의 주장대로 개성에서 철수한 후 임진강 방위라인인 벽제리碧蹄里 전투에서 결실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 의견대립은 제장들 간의 대립을 불러왔고, 벽제리 전투(벽제관碧蹄館 전투라고도 함)에서 일본군이 대승을 거두었음에도 타카카게는 "작전지도를 그르쳤다" 며 타이코 히데요시太閤秀吉에게 미츠나리를 참소하였다.

  물론 벽제관 전투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지휘하에 있던 츄고쿠(中国, 역주 : 혼슈 서부 지방) / 큐슈 군九州軍의 분전에 힘입은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 음지에선 후방을 지키며 경성으로 침입하려고 했던 코우라이 군을 격퇴한 이시다 / 오오타니大谷 / 마시타增田 / 마에노前野 등 후방부대의 공적도 있었다.(역주 : 이렇게만 적혀 있고 행주산성 전투는 언급하지 않음) 그럼에도 타카카게는【 경성의 행정관들이 소극적이고, 특히 이시다 미츠나리가 중도에 군을 철수시켜 도읍(=서울) 방비를 굳히게 한 건 비겁한 소치입니다. 】고 타이코 히데요시에게 호소하였다. 그리고 타카카게는 개전 이전의 군사회의 석상에서 "근래 행정관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소. 대명大明의 군대가 많은 걸 보고 겁이라도 먹은 것이오!" 라고 호통치며 미츠나리를 매도하였다. 

  그런데《부코야와》에서는 이에 대해, 개전 전의 군사회의 석상에선【 이시다 지부쇼유는 도량이 큰 자이다. 코바야카와 지주(小早川侍從, 역주 : 지주侍從는 코바야카와의 관직명)에게 매도를 당했음에도 맞붙어 싸우지 않고... 】라는 식으로 냉정하게 대처하여 작전지도를 그르치지 않은 점을 칭찬하면서, 타카카게가 세 행정관을 타이코 히데요시에게 나쁘게 이야기한 것에 대해서도

【 이번의 출진 당시, 도성에 있던 코바야카와 지주를 위시한 모리 세 가문의 병력은 츄고쿠 부대 3만여 명에다, 거기에 배속된 자들까지 합치면 4만여 명이 되었고, 이쪽은 우리들의 대장인 비젠 사이쇼(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와 행정관 / 군감들이 보유한 병력을 모두 합쳐도 2만 명 정도였기에 그쪽이 행정관들을 깔보며 자의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도를 넘었고, 이번(벽제관 전투)의 선봉도 코바야카와 지주가 청하는 대로 맡게 한 것이다. 그럼에도 악행 운운하며 (히데요시에게) 호소하자 지부쇼유도 화가 나 분하게 생각하며 "(타이코) 전하께서 이곳에 계신다면, 과연 이렇게 도자마들外様衆이 횡포를 부리게 놓아 두셨을까." 라면서 원망이 골수에 들어찬 상태였었다. 】

  분로쿠 전역(文禄の役, 역주 : 임진왜란壬辰倭亂)은 이후 명나라와 화의교섭이 행해지면서 일본군은 부산포까지 후퇴하여 휴전하였으나, 이 화의를 성립시킨 건【 이시다 지부쇼유(石田治部少輔, 미츠나리)와 코니시 셋츠노카미(小西摂津守, 유키나가)의 주선에 따른 것 】이라고《부코야와》는 기록하고 있다. 분로쿠 2년(1593) 5월, 미츠나리는 코니시 유키나가ㆍ비젠 사이쇼備前宰相 우키타 히데이에 등과 함께 명나라의 사자 서일관徐一貫 / 사용재謝用梓 일행 17명을 부산포를 거쳐 히젠 나고야로 보낸 후, 다시 8월 25일에 부산포로 돌아와 군량보급과 귀국선 조달 등 만만찮은 휴전처리에 몰두하였다. 이와 같은 업무들은 대부분 미츠나리가 아니고서는 이뤄내기 쉽지 않은 일들로, 분로쿠 전역에서 지부쇼유 미츠나리가 이뤄낸 역할이 얼마만한 것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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