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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망! 세키가하라》'부코야와武功夜話' 로 보는 미츠나리 (3) ┗ 微妙な話たち



  이 글은 신인물문고新人物文庫 20《이시다 미츠나리 야망! 세키가하라石田三成 野望! 關ケ原에 수록된 글들 중 하나(p. 75 ~ 91)로 모리모토 시게루(森本繁, 1926~) 님께서 집필하신 <부코야와로 보는 이시다 미츠나리> 란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글이 주로 참고한《부코야와武功夜話》란 문서는, 위 책이 처음 출판된 30년 전과는 달리 지금 일본 내에서 위서인지 아닌지 여부를 놓고 연구자 간의 찬반양론이 극심히 갈리는 사료가 되어버린지라, 일단 '미묘한 이야기' 카테고리에 포함시켰습니다.


  미츠나리의 술회

  미츠나리는 평소부터 군감軍監인 마에노 타지마노카미 나가야스前野但馬守長康와 친한 사이였다. 그랬기에 두 사람은 함께 조선으로 건너갔고, 부산포釜山浦에 도착한 후 경성京城으로 가는 여정도 함께 하였다. 이 때 미츠나리는 마에노 나가야스에게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본인은 이번의 도해渡海에 대해 털끝만한 이의도 갖고 있지 않으며, 타이코 전하(太閤殿下, 역주 :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이라면 당나라(唐, 역주 : 중국)ㆍ천축(天竺, 역주 : 인도) 끝까지 출향하는 것도 서슴지 않으려 하오. 그러나 이번의 출진에서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점이 있소. 카슈 공(加州公, 역주 :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과 에도 공(江戸公, 역주 :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이 한 명의 병사도 파병하지 않고 있다는 거요. 노공(御老公, 역주 : 마에노)께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오?

  본인은 이번 출진에 앞서 군량조달을 명 받아 묵은 쌀 수십 만 석을 징발하여 전쟁용으로 준비하였는데, 지금은 온 나라의 농민들이 새로 거둔 곡식을 또다시 헌납하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한 톨의 미곡도 다른 데서 나올 수 없는 상태요. 특히 큐슈九州 / 츄고쿠中国 / 시코쿠四国 제장들의 군역은 정말로 이만저만한 정도가 아니오. 그럼에도 카슈 공 / 에도 공은 영지가 2백만 석인데도 아직 공출명령조차 떨어지지 않은 걸 보면 어째서인지 정말로 납득이 가지 않소. 노공께서는 이를 부조리하다 생각하지 않으시오?"

  미츠나리는 원래 산수算數에 능한 인물이었으므로 부산포와 경성의 여러 곳을 시찰하였고, 자연히 군량兵糧에 대해 걱정하게 되었다. 경성에 도착한 미츠나리는 신속히 제장들을 소집시켜 히데요시의 도해가 내년 봄으로 연기되었다는 취의를 전한 후, 회의로 돌입했다.

  "남방의 코모카이(こもかい, 역주 : 웅천熊川) 방면과 카라이토(からい島, 역주 : 한산도) 곳곳에서 적 해적(역주 : 조선 수군)이 맹위를 떨쳐, 아군 수군이 출동해 격퇴하긴 했으나 카라이토에서의 충돌에서 아군 군선 수백 척을 상실했소. 그렇기에 나고야 쪽과의 연락이 생각만큼 되지 않고 있으며, 앞으로의 군량보급도 충분치 못할 것 같아 걱정이오. 경기 지방에서 곡물을 새로이 수확할 수 있다면 가능한 한 긁어모아서 병량창고에 저축해놓고, 가능한 한 오래 먹으라고 장병들에게 전달해 주었으면 하오. 그리고 선봉들은 조금 신중을 기하여 지금까지 점령한 성들을 견고히 지키고, 경솔히 그보다 더 진출하는 일이 없도록 해 주시오."

  회의에서 미츠나리는 세 행정관의 필두 입장으로 이런 의견을 냈다. 이 때 명나라의 10만 대군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내습해오고 있다는 급보가 들어와 경성의 제장들이 부들부들 떨었고, 비젠 사이쇼備前宰相 우키타 히데이에 쪽에서 출진하라고 재촉하는 막간극이 존재했으나 오보로 판명났고, 결국 미츠나리의 제안에 따라 지금까지 정복한 성들을 견고히 지키게 되었다.

  시모츠키(霜月, 음력 11월)가 되어 미츠나리는 마에노 타지마노카미 나가야스와 함께 평양平壤의 코니시小西 진채를 찾아갔는데, 미츠나리는 여기서도 아군의 군량이 궁핍한 것을 걱정하여 "선봉부대는 기세가 등등하다곤 해도 장기체진은 아군의 불리로 이어지는 법이므로, 명나라 군과 전투를 벌이는 건 가능한 한 회피해주시오." 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리고 이때 미츠나리는 코니시 유키나가와 상담하여 명나라와의 화해를 논의했고, 유키나가에게 "화의약정은 코니시 님의 생각대로만 논의되어서는 안 되오. 반드시 경성의 본진에까지 보고를 하여 행정관들과 상담한 후에 결정하도록 하시오." 라고 지시하였다. 코우라이高麗의 장병들이 명나라 군대와 결탁하여 수도를 탈환하기 위해 활발히 잇키一揆를 일으켰기에 부산포에서 시작되는 병참선도 단절되었고, 진주성晋州城이 탈환당한 것(역주 : 원문의 오류. 1592년 당시 진주성은 일본군에게 점령당한 적이 없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카노쿠니(赤国, 역주 : 전라도)와 시로노쿠니(白国, 역주 : 경상도)에서 힘을 비축한 코우라이 군高麗軍이 명나라 군대에 호응하여 도성에 있는 일본군을 포위하면, 일본군은 앞뒤로 적을 맞아 농성하는 것조차 불안해지고 조선에 있던 10만 일본군이 진퇴양난의 위기에 직면할 것이 명백하였다.

  미츠나리는 평양을 떠나 귀로에 오르던 도중에, 경성에서 북쪽으로 160km 떨어진 개성開城을 수비하고 있던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의 진채에도 들러 이러한 뜻을 전하였다. 이때 미츠나리는 "아무리 타이코 전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 될지라도, 한기寒氣가 도래하여 병사들의 움직임이 둔해지고 손이 시려 6천 정의 화승총도 자유로이 조작하기 힘든 데다, 군량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으니만큼 명나라 군대가 출격해오더라도 농성하여 화전양면의 태세를 갖춰주기를 바라오. 결코 귀하의 생각을 앞세워 분별을 그르치지 않도록 해 주시오." 라고 오금을 박아두었다.

  그러나 조선에 있던 제장들 중에선 이러한 미츠나리의 지시에 반대하는 자가 많았다. 타이코 전하의 의향이 "명나라와의 국경까지 치고 올라가라." 는 데 있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강경하게 반대의견을 내놓은 자가 군감 중 하나인 카토 미츠야스加藤光泰로, 개성을 수비하고 있던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도 그러한 반대론자들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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