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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망! 세키가하라》'부코야와武功夜話' 로 보는 미츠나리 (2) ┗ 微妙な話たち



  이 글은 신인물문고新人物文庫 20《이시다 미츠나리 야망! 세키가하라石田三成 野望! 關ケ原에 수록된 글들 중 하나(p. 75 ~ 91)로 모리모토 시게루(森本繁, 1926~) 님께서 집필하신《부코야와로 보는 이시다 미츠나리》란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글이 주로 참고한《부코야와武功夜話》란 문서는, 위 책이 처음 출판된 30년 전과는 달리 지금 일본 내에서 위서인지 아닌지 여부를 놓고 연구자 간의 찬반양론이 극심히 갈리는 사료가 되어버린지라, 일단 '미묘한 이야기' 카테고리에 포함시켰습니다.


  코니시小西ㆍ카토加藤 두 무장을 지휘관으로 삼은 원정육상부대인 제 1진과 제 2진은 연전연승, 파죽지세로 조선朝鮮의 오지까지 진격해 나갔기에 히데요시도 뒤를 따라 히젠 나고야에 있던 본진을 코우라이高麗 땅으로 옮기려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ㆍ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위시한 중신들의 만류로 저지되었다. 일본 수군이 약체하여, 조선 근해의 제해권을 이순신李舜臣이 지휘하는 코우라이 수군高麗水軍에게 빼앗겨 버렸으므로 히데요시의 신변에 위험이 닥치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이 때 일본수군은 쿠키(九鬼, 역주 : 요시타카嘉隆) / 토도(藤堂, 역주 : 타카토라高虎) / 와키자카(脇坂, 역주 : 야스하루安治) / 카토 요시아키加藤嘉明 / 쿠루시마(来島, 역주 : 미치후사通総)  / 칸(菅, 역주 : 미치나가達長) / 쿠와야마(桑山, 역주 : 시게하루重晴) / 호리우치(堀内, 역주 : 우지요시氏善) 등의 제장들이 지휘하던 9,450명으로 구성된 토요토미 수군이었다.(《호안타이코키甫庵太閤記》)

  이에 히데요시는 막하의 수군부대가 조선 근해에서의 제해권을 회복할 때까지 "내년(1593) 3월을 기하도록" 하여 조선으로의 도해를 연기함과 동시에, 대리 무장으로서 3명의 행정관三奉行과 4명의 군감四軍監을 조선으로 보냈다. 3명의 행정관은 이시다 지부쇼유 미츠나리 / 마시타 우에몬노죠 나가모리増田右衛門尉長盛 / 오오타니 교부쇼유 요시츠구大谷刑部少輔吉継 3명으로 세 사람 모두가 고슈 후다이(江州譜代, 역주 : 히데요시가 나가하마長浜 성주였을 시기부터 그를 섬긴 인물들) 들이었다.《부코야와》에서는 "(히데요시의) 손발과 같은 양신良臣들" 이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4명의 군감이란 마에노 타지마노카미 나가야스前野但馬守長康 / 카토 토오토우미노카미 미츠야스加藤遠江守光泰 / 하세가와 토고로 히데카즈長谷川藤五郎秀一 / 키무라 히타치노스케 시게코레木村常陸介重茲 이상 4명으로, 이들 중 키무라 히타치노스케는 칸파쿠 (토요토미) 히데츠구秀次에게 배속된 인물로, 히데츠구를 대리하여 특별히 파견된 자였다.

  행정관ㆍ군감 일행이 히젠 나고야 성을 출발한 건 6월 삭일. 도중에 코우라이 수군의 출몰여부를 신경쓰면서 부산포釜山浦에 도착하였으나 이미 상가町屋는 잿더미로 변해 있었고, 시골의 마을들조차 소실을 피하지 못하였으며, 운좋게 재난을 면한 민가도 대단히 빈곤하였다. "산은 있으나 수목이 없고, 높은 산도 없으며 대머리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는 상황이라, 그전에 듣던 것과는 완전히 딴판.【 그다지 즐거이 묵을 만한 곳은 아니었다. 】라고《부코야와》는 기록하고 있다.

  부산포를 출발하여 경성(京城, 지금의 서울)에 입성한 건 7월 16일이었는데, 도중에 지나치던 시골 마을들은 전화焼き討ち를 견디지 못하여 황폐하기가 짝이 없었고, 논의 벼이삭이 누렇게 익어 가을걷이의 시기가 찾아왔는데도 사람 그림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혜안을 가진 미츠나리는 신속히 다음과 같은 의문을 군감 마에노 나가야스에게 털어놓았다.

  "부산포에 저장된 군량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계절은 이미 (음력) 8월에 접어들어 바다의 파도는 드높은데다 해상의 여러 포浦에서는 해적(海賊, 역주 : 조선 수군)들이 활발히 창궐하여, 공납으로 바쳐진 군량을 실은 선박들의 운항도 예단할 수 없는 상태요. 선봉들은 승세를 타고 평양에 이르렀으나 아카노쿠니(赤国, 전라도)와 시로노쿠니(白国, 경상도)는 아직도 (완전히) 평정되지 않은 상태인지라 걱정이 되는데. 군감께서는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이 질문을 받은 군감 마에노 나가야스는 "이시다 님의 생각이 지당하며, 대명(大明, 대명제국. 명나라)의 병력이 출동하였다는 급보도 들어와 있소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아직 도읍(=서울)의 상황을 모르는데다, 경기 지방은 옥야沃野라 들었소. 그러므로 경지도 개발할 수 있을 것이고. 지금은 바야흐로 햇곡식이 수확되는 계절이므로 일단 길을 서둘러 입경한 후, 군사회의에 참석하는 것을 우선해야겠지요." 라고 답하였다.

  실제로 이 시기, 일본군 중 코니시 유키나가의 부대는 평양平壤을 공격해 취하였고, 카토 키요마사의 부대는 북진하여 코우라이의 왕자 2명을 포로로 잡는 등, 각 무장들이 공명을 다투며 파죽지세로 진격하였기에 미츠나리의 의구疑懼 따위는 제장들의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미츠나리는 별 수 없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길을 서둘러 조선의 수도ㆍ경성에 도착하였으나, 정황을 파악하고는 아연해했다. 기대를 하고 있던 (경성) 병량창고의 군량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던 것이었다. 경성 주변도 역시 전화로 인해 전답이 황폐해지면서 기아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거기에댜 부산포 <-> 경성에 이르는 병참선이 너무 늘어져서, 봉기한 조선의 의군義軍들이 일본군의 양도糧道를 습격하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이 때 미츠나리의 귀에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와키자카 / 쿠키의 수군부대가 이순신이 지휘하는 코우라이 수군에 대패하여 대선大船 150여 척이 격침되었다고 했다. 한반도의 장병들을 위하여 일본 내지에서 거둬들인 군량을 실은 선박은, 코우라이 수군에 의해 해상에서 줄줄이 격침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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