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신인물문고新人物文庫 20《이시다 미츠나리 야망! 세키가하라石田三成 野望! 關ケ原》에 수록된 글들 중 하나(p. 75 ~ 91)로 모리모토 시게루(森本繁, 1926~) 님께서 집필하신《부코야와로 보는 이시다 미츠나리》란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글이 주로 참고한《부코야와武功夜話》란 문서는, 위 책이 처음 출판된 30년 전과는 달리 지금 일본 내에서 위서인지 아닌지 여부를 놓고 연구자 간의 찬반양론이 극심히 갈리는 사료가 되어버린지라, 일단 '미묘한 이야기' 카테고리에 포함시켰습니다.
유능한 사무관료
《부코야와》에서 이시다 미츠나리의 이름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텐쇼 11년(1583) 9월, (토요토미豊臣) 히데요시秀吉가 오사카 성을 축조하던 당시 제반사무의 회계역할을 맡았을 때였다. 즉《부코야와》는 오사카 성에 대한 기사에서【 오사카의 새로운 성의 설계를 맡은 건 마에노 쇼우에몬노죠(前野勝右衛門尉, 역주 : 나가야스長康)ㆍ하치스카 히코우에몬노죠(蜂須賀彦右衛門尉, 역주 : 마사카츠正勝)였고, 자문역은 센 소에키(千宗易, 역주 : 리큐利休)ㆍ나가오카 효부다유(長岡兵部大夫, 역주 : 후지타카藤孝), 제반 회계업무는 이시다 지부(石田治部, 역주 : 미츠나리三成)가 맡았다. 고금동서에 둘도 없는 견고한 성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라고 기록하였다.
이시다 미츠나리의 어린 시절 이름은 사키치佐吉로, 에이로쿠 3년(1560)에 오우미 지방 사카타 군近江国坂田郡 이시다 마을(石田村, 지금의 시가 현 나가하마 시滋賀県長浜市 이시다쵸石田町)에서 태어났다. 14세 무렵부터 이웃 마을에 있는 칸논사觀音寺에서 학문을 배우다가 15세(텐쇼 2년=1574년) 때 하시바 히데요시의 눈에 들어, 근습近習으로서 나가하마 성에 출사했다.
연보年譜에 따르면 미츠나리는 텐쇼 5년(1577)의 하리마 경략播磨經略 당시 주선역(奏者, 중개역取次役)으로 히데요시를 따라 종군했고, 텐쇼 8년(1580)의 이나바因幡ㆍ호키伯耆 지방 원정과 텐쇼 9년(1581)의 아와지 섬淡路島 평정 당시에도 주선역ㆍ전령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텐쇼 10년(1582)의 빗츄 타카마츠 전투備中高松合戰에도 종군하였다고 나와있으나,《부코야와》에는 기록되지 않았다.《부코야와》는 어디까지나 마에노 일족前野一族의 무공을 이야기하는 서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츠나리와의 교류를 중시하여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전사한 오오타니 헤이마(大谷平馬, 요시츠구吉継)의 이름이 텐쇼 10년(1582) 4월의 <하시바 군 빗츄 전역 종합 편성>이라든가 텐쇼 10년(1582) 12월 3일 하시바 군이 <노슈 기후로 출격했을 당시의 진용>에 후쿠시마 이치마츠(福島一松, 마사노리正則)와 카토 토라노스케(加藤虎之助, 키요마사淸正)의 이름과 나란히 기록되어 있는 데 비하면 약간 기이한 감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는 미츠나리가 히데요시의 측근으로 있으면서 오직 주선ㆍ전령 역할에 종사하고 실제 전투의 방면에는 나서지 않았기 떄문이리라. 오오타니 헤이마 요시츠구는 분고 오오토모 가문豊後大友家을 섬기다 로닌浪人이 된 후, 텐쇼 5년(1577) 반슈播州의 진지에서 미츠나리의 추천을 받아 히데요시에게 발탁된 바 있었다.
텐쇼 11년(1583) 4월에 벌어진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미츠나리는 오우미 북부江北에 있는 쵸메이사에 편지를 보내 시바타 군柴田軍의 동향을 탐지하게 하고, 하시바 군이 미노 지방 오오가키大垣에서 회군할 떄에는 회군을 돕기 위해 미리 출발하여 연도의 마을들마다 취사炊事를 하도록 했다고 한다. 무장武將으로서 세상에 나올 때부터 미츠나리는 인사ㆍ첩보ㆍ서무庶務ㆍ재무 등 무대 뒷편의 사무를 전담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해, 미츠나리는 4월 21일에 벌어진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세운 무공에 힘입어 오우미 미나구치近江水口 4만 석 성주로 봉해졌다.
《부코야와》에 따르면 텐쇼 12년(1584) 1월 7일, 회계역인 이시다 지부는 하시바 히데나가羽柴秀長 / 스기하라 시치로자에몬 이에츠구杉原七郞左衛門家次 / 하시바 마고시치로 히데츠구羽柴孫七郞秀次 등의 일문을 위시하여 아사노 야헤에노죠 나가마사浅野弥兵衛尉長政 / 하치스카 히코우에몬 마사카츠 / 마에노 쇼우에몬노죠 나가야스 등의 하시바 가문 후다이譜代 가신단과 함께 히데요시의 신년 축하 다회에 출석하였다. 이 때의 다도사御茶道師는 센 소에키(리큐)였다.
《부코야와》에서는 이때의 미츠나리를 '회계역 이시다 지부'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미츠나리가 조정으로부터 종오위하 지부쇼유 지위에 서임된 건 텐쇼 13년(1585) 7월 11일의 일이라 여겨진다. 그 해(1585) 정월에 행해진 오사카 성 다회에서도 미츠나리는 하시바 가문의 중신들과 함께 치쿠젠노카미 히데요시로부터 달인 차를 하사받았으나, 이 때의 <(참석) 제장 기록諸士覚え>에 따르면 '이시다 사키치石田佐吉'라고 되어 있다.
전장에서의 활약
《부코야와》에 따르면 이시다 지부쇼유 미츠나리는 아사노 야헤에노죠 나가마사 / 오오타니 헤이마 요시츠구와 함께 텐쇼 18년(1590)의 소슈(相州, 역주 : 사가미 지방相模国) 오다와라 전역小田原の役 당시 히데요시의 명을 받아 오슈奥州로 순찰을 나갔다고 한다. 오슈의 제장들 가운데 아직도 오다와라로 인사오지 않은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외의 사적, 예를 들자면 타이코 토지조사太閤検地 당시 행정관으로서 거둔 공적이라든가 텐쇼 15년(1587)의 큐슈 정벌 당시 병참행정관 겸 하카타 부흥 행정관으로서 거둔 공적, 그리고 텐쇼 18년(1590) 오다와라 전역에서 타테바야시 성館林城을 공략하고 오시 성忍城에 수공을 시도했던 것과 같은 전공은 일절 기록되지 않았다. 마에노 씨의 무공과 관련이 없는 사항이었기 때문이다. 미츠나리는 오다와라 전역에서 거둔 무공에 힘입어 그 해(1590) 7월, 오우미 사와 산 성주佐和山城主로 임명되었다고 한다.(역주 : 실제 미츠나리가 사와 산성 성주로 봉해진 건 1595년, 토요토미 히데츠구豊臣秀次가 숙청당한 이후이다.)
텐쇼 19년(1591) 1월 22일, 조선출병에 반대하던 토요토미 히데나가가 병으로 죽고, 1개월 후인 2월 28일에는 히데나가의 유언에 따라 히데요시의 무모한 조선출병을 뜯어말리기 위해 간언하던 센 소에키가 할복하게 되면서 히데요시는 거리낌없이 여러 다이묘들에게 코우라이(高麗, 역주 : 조선) 출진을 명했다.《부코야와》에 따르면, 이 때 미츠나리는 아사노 나가마사 / 마에노 나가야스 / 이시다 마사즈미石田正澄 / 센고쿠 히데히사千石秀久 / 나츠카 마사이에長束正家 등의 제장과 함께 히젠 나고야 성肥前名護屋城 축조 행정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들 중 이시다 마사즈미는 미츠나리의 형이었고, 나츠카 마사이에는 군량兵糧을 관리하고 있었다. 큐슈九州와 그 주변 지방의 다이묘大名들에게는 이를 도우라는 지시가 내려졌으며, 축성기한은 다음 해인 텐쇼 20년(1592) 3월 1일까지였다.
히데요시는 나고야 성이 완성되자 3월 26일에 쿄토를 진발進發하여 4월 25일에 나고야에 도착했다. 그러나 조선 출병의 제 1진이었던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대는 이미 4월 12일에 부산에 상륙하여, 4월 13일과 4월 14일에 걸쳐 부산성釜山城ㆍ경상남도 동래성東萊城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카토 키요마사가 지휘하는 제 2진은 4월 17일에 부산에 상륙하였다.
이시다 미츠나리는 나고야 축성의 임무를 완수한 후엔 선박 행정관이 되어, 조선으로 건너가는 부대들을 위해 약 4만 척의 군선을 조달한 후 제장들에게 배부配船했다. 오제 호안小瀬甫庵의《타이코키太閤記》에 따르면 조선으로 건너간 군대는 20만 5,570명으로, 나고야에 주둔하고 있던 10만 2,415명과 합치면 30만 7,915명에 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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