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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망! 세키가하라》이시다 미츠나리의 친인척들 (下) 역사



  이 글은 신인물문고新人物文庫 20《이시다 미츠나리 야망! 세키가하라石田三成 野望! 關ケ原》에 수록된 글들 중 하나(p. 37 ~ 47)로 사진작가 겸 [이시다 미츠나리 동족회] 창립자이시기도 한 이시다 타카유키(石田多加幸, 1934~) 씨께서 집필하신 <이시다 미츠나리의 규벌도閨閥図>란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위 책은 1989년에 출판된 잡지에 실린 내용을 2009년에 문고화하여 편집한 일종의 개정판이며 원글이 집필된 지는 거의 30년이 다 되어간다는 점을 감안하시고 읽으셨으면 합니다.


  다음은 미츠나리의 아내인 코우게츠인의 인척들에 대해 알아보자.


코우게츠인
미츠나리의 아내

우다 요리타다宇多頼忠
미츠나리의 장인. 시모츠케노카미下野守.
사와 산성에서 자결


  그녀의 아버지인 우다 요리타다는 처음엔 비토 시모츠케노카미尾藤下野守란 이름으로 토요토미 히데나가豊臣秀長를 섬겼으나, 주군 가문의 대가 끊어진 후에는 히데요시를 섬기며 야마토大和 / 카와치河內 두 지방에 걸쳐 1만 3천 석을 영유, 우다 시모츠케노카미 요리타다라고 개명하였다. 그도 역시 미츠나리의 장인이 되었기에 세상의 주목을 받은 인물로, 아내의 출신 등에 대해선 전해지는 바가 없다.


우다 요리시게宇多頼重
미츠나리의 처남. 이시다 마사츠구의 양자인 이시다 교부쇼유.
사와 산성에서 자결.

우다 요리시게의 아내
미츠나리의 처남댁.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의 딸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
미츠나리의 사장어른.
우에다 성주上田城主. 우에다 성에 농성.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
미츠나리의 사하생. 마사유키의 차남.
유키무라幸村. 우에다 성에 농성.

치쿠린인竹林院
노부시게의 아내.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吉継의 딸.

토요토미 히데츠구豊臣秀次의 딸
노부시게의 첩.

사나다 다이스케真田大助
노부시게의 장남. 생모는 치쿠린인.

나호(온다히메)
노부시게의 딸. 생모는 토요토미 히데츠구의 딸.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吉継
노부시게의 장인. 교부쇼유.
츠루가 성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자결

오오타니 요시하루大谷吉治
요시츠구의 장남. 다이가쿠노스케.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영지를 잃음.

키노시타 요리츠구木下頼継
요시츠구의 차남. 야마시로노카미.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영지를 잃음.


  그러나 장남인 카와치노카미 요리시게(河內守頼重, 요리츠구頼次라고도)가 신슈 우에다 성주로 3만 8천 석을 영유하던 사나다 마사유키의 딸과 결혼했기에 이시다 가문石田家은 사나다 가문真田家과 연결고리가 생겼다. 말하자면 미츠나리 입장에서 사나다 가문의 적자 노부유키 / 차남 노부시게(유키무라)는 사하생査下生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노부시게 쪽은 히데요시의 중매를 통해 미츠나리의 맹우盟友이자 츠루가 5만 석의 영주인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딸을 아내로 삼았다. 이로써 미츠나리의 규벌은 신장되었다.


사나다 노부유키真田信之
미츠나리의 사하생. 마사유키의 장남.
누마타 성주沼田城主. 토쿠가와 히데타다 군에 종군.

코마츠히메小松姫
노부유키의 아내. 혼다 타다카츠本多忠勝의 딸.


  단지 사나다 노부유키의 아내는 이에야스의 고굉지신인 혼다 타다카츠의 딸로, 이에야스의 수양딸 신분으로 시집와서 이 때문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노부유키가 동군에 가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므로 미츠나리로서는 애석하다 하겠다.

  어쨌든 세키가하라 당시엔 미츠나리의 장인ㆍ처남인 우다 부자는 사와 산성에서 둘 다 자결하였고, 사나다 마사유키 / 유키무라 부자는 우에다 성에 농성하여 토쿠가와 히데타다 군 3만 8천 여 명의 서상西上을 저지하는 전과를 올렸음에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이 패배하면서 코야 산에 칩거하는 신세가 되었다. 오오타니 요시츠구는 세키가하라 결전에 출진하여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 등의 배반한 군대와 싸운 끝에 전군이 궤멸당했다. 요시츠구는 전장에서 자살했고, 자식들은 도망쳐 훗날 오사카 전쟁大坂の役에서 히데요리 군에 가담하였다가 전사했다.


  자녀들의 규벌

  미츠나리에게는 7명의 자녀가 있었다는 걸《이시다케이즈石田系図》라든가 다른 옛 기록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나, 장유관계같은 것은 확실히 알 수 없다.


쿠마가이 나오모리熊谷直盛
미츠나리의 사위.
분고 아키 성주. 오오가키 성을 수비.

쿠마가이 나오모리의 아내
미츠나리의 딸


  그 중의 한 명은 분고 아키豊後安岐 성주 1만 3천 석의 쿠마가이 나오모리熊谷直盛에게 시집갔다. 나오모리는 제 2차 조선 전역(第二次朝鮮の役, 역주 : 정유재란)에서 히데요시 파견군의 감독관으로 임명되어, 후쿠하라 나오타카를 위시한 7명의 제장들과 함께 조선으로 건너가 전황을 미츠나리에게 보고했고, 미츠나리는 이를 히데요시에게 아뢰었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죽은 후인 케이쵸 4년(1599)에는 조선으로 건너간 무장들이 자부한 전과와 감독관들이 보고한 정보가 크게 차이난다는 비난을 추궁받은 끝에 이에야스로부터 칩거를 명 받았다.

  여기에서도 이에야스의 미츠나리파 봉쇄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나오모리는 세키가하라 전투 때 450명의 병력을 이끌고 후쿠하라 나오타카와 함께 오오가키 성 수비를 맡았으나, "서군이 패배했다!" 는 소식이 들려오자 불행하게도 아키즈키 / 사가라 등에 의해 성 안에서 모살당하고 말았다.


이시카와 사다키요石川貞清
오와리 이누야마 성주.
세키가하라 이후 영지를 잃음.

이시카와 사다키요의 아내
미츠나리의 딸

이시카와 사다키요石川貞清의 딸
미츠나리의 외손녀. 노부시게의 첩.


  미츠나리의 또다른 사위는 오와리 이누야마 성주尾張犬山城主로 12만 석을 영유하던 이시카와 비젠노카미 사다키요라는 자였다. 그는 건축술에 대단한 재능을 갖고 있었던 듯, 조선 전역朝鮮の役 당시 나고야 성名護屋城 니노마루 공사를 분담했으며 히데요시의 쿠사즈 온천 요양草津温泉湯治 때는 거관으로 삼을 저택을 조영하였고, 분로쿠 4년(1595)에는 미노 카네야마 성美濃金山城의 야구라櫓를 떼어다가 이를 이누야마 성 건조물 위에 증축시켜 망루식 텐슈가쿠天守閣를 완성하였다. 이것이 바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텐슈가쿠로, 축성 역사상 귀중한 유적으로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한 사다키요는 이나바 사다미치稲葉貞通 등의 지원을 받아 이누야마 성에 농성하였으나, 사다미치 등이 변심하여 철퇴해버리자 농성전을 벌이면 불리하다고 생각하여, 가신들을 이끌고 세키가하라로 가서 미츠나리 등의 주력군과 합류해 감투敢鬪한 끝에 전후 영지를 잃었다. 그러나 사다키요는 거성居城인 이누야마 성을 떠날 때 동군에 가담하였던 미노 지방의 토착무사鄕士들이 바친 인질들을 석방해주었던 데다, 그리고 다시 이에야스에게 황금 1천 매를 바침으로써 죽음을 면하고 쿄토에서 금융업을 하면서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

  참고로 사다키요의 딸(=미츠나리의 외손녀)이 사나다 유키무라의 첩이 되었다는 설이 사다키요의 보리소菩提所인 다이쥬원(大珠院, 쿄토에 있음)에 남겨져 있는데, 이 아가씨가 오사카 전쟁 이후 유키무라 / 정실부인 치쿠린인의 묘를 경내에 건립했다고 전해지며, 석탑도 현존해 있다. 금융업자의 딸이라면야 무덤을 건립하는 정도는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츠가루 타메노부津軽為信
미츠나리 딸의 양아버지.
호리고에 성주. 오오가키 성 견제

츠가루 타메노부의 수양딸
미츠나리의 딸. 히데요시의 양녀로 츠가루 가문의 양녀가?
타메노부의 3남 노부히라信枚의 첩이 되었다는 설이 존재.

미노우라 헤이자에몬

미노우라 헤이자에몬의 아내
미츠나리의 딸

사토 미마스佐藤三益
키이 지방紀州의 의사. 미츠나리의 사위

사토 미마스의 아내
미츠나리의 딸


  마지막으로 미츠나리의 몇 번째 딸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히데요시의 수양딸 신분으로 아오모리 츠가루 가문青森津軽家의 양녀가 된 여식이 있다고 전해지며, 일설에 따르면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그녀는 츠가루 타메노부의 3남인 노부히라의 첩이 되었다고도 전해진다. 어찌됐든 이시다 가문과 츠가루 가문 사이엔 어떠한 인연이 존재했다는 건 사실인듯 하나,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츠가루 가문이 오오가키 성을 견제하는 군대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 외에 아와阿波 지방의 미노우라 헤이자에몬箕浦平左衛門 / 키슈의 의사 사토 미마스佐藤三益에게 미츠나리의 딸들이 시집갔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으나, 이들은 아마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죽음을 모면한 딸들이 시집간 게 아닐까.


이시다 시게이에石田重家
장남. 하야토노쇼. 토요토미 히데요리를 섬김.
패전 후 승려가 됨.

이시다 하치로石田八郞
차남. 귀농하였다.

이가쿠인宜学院
하치로의 아내.

하치로에몬八郎右衛門
하치로의 장남.
귀농하였다.

토라조虎藏
하치로의 차남.
모리 가문毛利家을 섬김.


  미츠나리의 아들 계열은, 장남인 시게이에(重家, 하야토노쇼隼人正. 당시 13세)와 어린 차남 하치로八郞가 널리 알려져 있다.(《레이하이닛칸霊牌日鑑》《빗츄이시다케이즈備中石田系図》)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시게이에는 측근들과 함께 오사카 성으로 들어가 히데요리를 섬기고 있었다. 이는 이시다 가문이 토요토미 가문에 충성을 바치고 있다는 증표이기도 했을 것이다. 차남인 하치로는 어머니인 코우게츠인과 함께 사와 산성으로 피난해 있었으나, 성이 함락될 때 빗츄 지방으로 도망쳐 이시이 씨의 협력을 받아 귀농을 했고, 훗날 마을의 촌주庄屋로 취임해 그 후손들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맞이하였다.

  지금까지 미츠나리의 규벌을 세카가하라 전투에 맞추어 살펴봤는데, 인척 그룹이 그다지 발달하지 못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는 미츠나리 시대에 이시다 가문이 중흥하였기에 선조 이래의 문벌이 없었던 데서 비롯된 점이기도 한데, 이보다도 미츠나리가 불운했던 건, 41세라는 젊은 나이에 건곤일척의 세키가하라 전투를 벌여야만 했던 점이다. 거기에 그의 비극성이 존재했다는 건 부정하기 힘들다. 참고로 숙적 이에야스는 그 당시 61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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