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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망! 세키가하라》이시다 미츠나리의 친인척들 (上) 역사



  이 글은 신인물문고新人物文庫 20《이시다 미츠나리 야망! 세키가하라石田三成 野望! 關ケ原》에 수록된 글들 중 하나(p. 37 ~ 47)로 사진작가 겸 [이시다 미츠나리 동족회] 창립자이시기도 한 이시다 타카유키(石田多加幸, 1934~) 씨께서 집필하신 <이시다 미츠나리의 규벌도閨閥図>란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위 책은 1989년에 출판된 잡지에 실린 내용을 2009년에 문고화하여 편집한 일종의 개정판이며 원글이 집필된 지는 거의 30년이 다 되어간다는 점을 감안하시고 읽으셨으면 합니다.


  패배자 가문의 계보

  역사를 가지지 못한 가문은 없으나, 그들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 '가문의 계보家系' 를 가진 집안은 드물리라 생각한다. 하물며 하극상이 일상다반사였던 난세 당시, 싸움에 패배하여 대가 끊어진 가문의 기록 같은 것이야 대부분 소멸당하여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이시다 가문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시다 가문이 운이 좋았던 건, 미츠나리가 전국시대의 패자覇者가 된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상대로 세키가하라에서 싸움을 벌었다는 사실이다. 이 전투는 일본을 두 갈래로 쪼개었던 천하를 판가름하는 전투이자 생존을 건 전투였기에, 승자 측의 무장들은 물론이요, 쿠게公家 / 승려僧侶 / 신관神官 그리고 문인文人들의 일기와 집안에 내려오던 기록, 내지는 군담물軍記物 등에선 당사자가 미츠나리를 싫어한다고 해도 기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젠 오카야마 번 무사備前岡山藩士인 유아사 죠잔湯浅常山이 편집한《죠잔기단常山紀談》은 미츠나리의 최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아군의 배신으로 패배한 미츠나리는, 다시 오사카 성大坂城으로 돌아가 재기를 도모하기 위해 전장에서 이탈하였으나, 불운하게도 호우를 쫄딱 맞으면서 격렬한 복통에 시달렸다. 그는 끝내 병을 이기지 못하여, 알고 지내던 코호쿠(湖北, 비와 호)의 농민 요지로与次郎라는 자의 도움을 받아 은신하였는데, 이윽고 도망치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요지로에게) 자신이 은신해 있는 바위동굴의 위치를 토쿠가와 군에게 통보하도록 하여 붙들렸다.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와 함께 쿄토 산죠 강변三条河原에 있는 처형장으로 호송되던 도중, 입이 건 쿄토의 구경꾼들이 "미츠나리가 천하를 잡은 저 모습을 보라!" 고 시시덕거리며 조롱하자, 미츠나리는 미소를 지으면서 "이 미츠나리가 대군을 이끌고 천하를 판가름하는 전투를 벌였다는 사실은 이 세상이 계속되는 한 계속 존재할 것으로, 한 점 부끄럼은 없다. 그렇게 조롱하지 말기 바란다." 고 응수했다고 한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미츠나리에게는 '정의를 지키기 위한 의로운 싸움' 이었다는 자부심이 있었기에 나올 수 있었던 말임이 틀림없다. 그는 자신의 평가에 대해 "알 사람은 알아줄 것" 이라는 심경이었으리라.

  그러나 불행하게도 미츠나리가 예언했던 것과 같은 후세의 미츠나리 재평가가 이루어진 건, 메이지 시대로 접어든 이후였다.

  에도 시대 내내 토쿠가와 씨에게 아첨하던 어용학자들은 일부러 미츠나리를 "간사하고 사악한 자奸佞邪知" 라고 비방하며, 악인惡人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으로 토쿠가와 막부가 붕괴하자 식자들 사이에 미츠나리 재평가 움직임이 서서히 일어났고, 여기에는 문단에 속한 사람들도 가담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보다 널리 퍼질 수 있었다. 그리고 금번에《별책 역사독본別冊歷史讀本》에서《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책이 기획된 것을 계기로 삼아, 미츠나리를 둘러싼 규벌을 통해 세키가하라 전투를 고찰해보시어 하나의 흥으로 삼으셨으면 한다.


  아내와 형제들의 규벌

  규벌이란, 아내의 인척관계를 중심으로 삼은 세력 그룹을 의미하지만, 여기에서는 넓은 의미로 해석하여 그 일가까지 포함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이시다 마사츠구石田正継
아버지. 오키노카미隠岐守. 사와 산성佐和山城에서 자결

즈이가쿠인瑞岳院
어머니

  우선 미츠나리의 부모(마사츠구 / 즈이가쿠인)인데, 미츠나리가 (토요토미豊臣) 히데요시秀吉에게 발탁된 이후에야 세상의 주목을 받았으므로 세력들과 연결될 정도의 규벌은 갖지 못했던 듯 하다. 그렇다고 해도 마사츠구가 토민土民이었던 것은 아니며, 오우미近江 지방 사카타 군坂田郡 이시다 마을의 용맹한 무사豪士로, 그 선조가 슈고다이묘守護大名 쿄고쿠 씨京極氏의 옛 신하였다는 사실은《쿄고쿠카후京極家譜》《사사키난보쿠쇼시쵸佐佐木南北朝諸士帳》등의 문헌을 통해 명백해진 바 있다.

  마사츠구는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사와 산성의 수비대장으로 미츠나리 대신 잔류하여, 노인 / 부녀자들까지 합쳐 2천 8백 명을 데리고 농성, 토쿠가와 군 1만 5천 명과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성을 베개삼아 자결하였다.


이시다 마사즈미石田正澄
형. 모쿠노카미木工頭, 사카이 행정관堺奉行. 사와 산성에서 자결

류쥬인龍珠院
형수

이시다 토모나리石田朝成
조카. 사와 산성에서 자결

이시다 몬도노쇼石田主水正
조카. 사와 산성이 함락된 후 코야 산에서 자결

    
  다음은 미츠나리의 형 마사즈미인데, 그는 늙은 아버지 마사츠구를 도와 사와 산성에 농성, 사실상의 수비대장으로서 토쿠가와 군과 싸운 끝에 이틀간 성을 지켜냈다. 그러나 성이 함락되는 건 시간문제라고 보고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이에야스 측에 화의를 제안하여, 성 안의 노인 / 부녀자들의 목숨을 보장받으려 헀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토쿠가와 군의 연락 미비 때문인지 이에야스의 심모深謀에 의한 것인지, 원인은 지금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으나 무장해제 중이었던 성을 타나카 요시마사田中吉政 군이 수로 방면水の手口을 통해 공격하였기에, 만사휴의萬事休矣가 되고 말았다. 마사즈미는 일족들을 혼마루本丸에 집결시켜 마지막으로 물을 나눠 마신 후 자결하였다.

  이를 따라 주된 일족과 노신들이 줄줄이 자결하였기에 성내는 대혼란에 빠졌다. 아녀자들은 도망칠 곳이 없어 산 속의 깎아지른 바위로 올라가 줄이어 투신, 목숨을 끊었다. 이 때문에 (아녀자들이 떨어진) 골짜기는 "여자들이 뛰어내린 골짜기女郎落ちの谷" 라고 하여 지금 시대에도 사람들이 접근하지 않는다고 한다.

  마사즈미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미츠나리가 출세하면서 세상의 주목을 받았기에, 아내의 인척관계 같은 건 알 수 없으며, 규벌에 의한 세력도 없었던 듯 하다.

      
미츠나리의 여동생
후쿠하라 나오타카의 아내

후쿠하라 나오타카福原直高
매제. 분고 니아게 성주. 오오가키 성 수비대장.
이세 아사쿠마伊勢朝熊에서 자결

후쿠하라 리베에福原利兵衛
외조카.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귀농


  그 외 미츠나리에게는 여동생이 한 명 있어서 분고 오오이타豊後大分의 니아게 성주(12만 석)인 후쿠하라 나오타카에게 시집갔다. 나오타카는 히데요시의 신임을 받아 쿄토 키타노京都北野에서 벌어진 대다회大茶會를 준비하는 행정관奉行 중 하나로 발탁되었고, 조선 전역朝鮮の役에서는 히데요시 파견군의 감독관目付이 되어 조선으로 건너가 전황보고를 맡았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죽은 후 "전황보고에 문제가 있었다." 고 이에야스로부터 추궁을 받아, 코쿠다카石高가 절반(6만 석)으로 깎여나갔다. 이는 천하를 잡기 위한 이에야스의 심모에서 비롯된 바었음이 틀림없다.

  세키가하라 당시 나오타카는 처자를 사와 산성에 맡긴 채로 출진, 오오가키 성大垣城 수비대장을 맡아 방비하고 있었으나 세키가하라 결전에서 "서군이 패배했다!" 는 소식이 들려오자, 오오가키 성을 수비하는 동지들이었던 아키즈키秋月 / 사가라相楽 등이 변절하였기에 나오타카는 혼마루에 농성하여 싸웠으나 중과부적, 아키즈키들에게 성을 넘겨주고 이세 아사쿠마로 물러나 에이쇼사永松寺에 들어가 자결하였다.

  미츠나리에게는 드문 매제 세력이었던만큼, 근처에 두고서 결전에서 활약시켰으면 어땠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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