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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망! 세키가하라》미츠나리를 둘러싼 7명의 남자들 (完) 역사



  이 글은 신인물문고新人物文庫 20《이시다 미츠나리 야망! 세키가하라石田三成 野望! 關ケ原》에 수록된 글들 중 하나(p. 59 ~ 74)로 하루나 아키라(春名徹, 1935~) 씨께서 집필하신《미츠나리를 둘러싼 7명의 남자들》이란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위 책은 1989년에 출판된 잡지에 실린 내용을 2009년에 문고화하여 편집한 일종의 개정판이며 원글이 집필된 지는 거의 30년이 다 되어간다는 점을 감안하시고 읽으셨으면 합니다


  ■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 서군의 중심이 되어 세키가하라 결전에서 용전감투한 히데이에

  토착 호족의 지위에서 몸을 일으킨 우키타 씨宇喜多氏는, 히데이에의 아버지 (우키타) 나오이에直家 시대에 빗츄備中 / 비젠備前 / 미마사카美作 지방을 통일(역주 : 원문의 오류. 나오이에의 영지는 비젠 지방, 그리고 미마사카 지방의 절반 정도였다)하고 쵸카마치인 오카야마岡山를 건설했다. 서쪽으로 모리毛利, 동쪽으론 오다織田 가문 사이에 끼어있던 나오이에는 오다 측에 베팅하기로 하고 모리 공격의 선봉 히데요시秀吉에게 접근, 차남 하치로八郞를 히메지 성의 히데요시에게 보내 양아들로 삼게 했다. 이 아이가 바로 히데이에이다.

  텐쇼 9년(1581)에 나오이에가 죽으면서 하치로는 8세의 나이에 고아가 되었으나, 다음 해에 우키타 가문은 노부나가信長로부터 지금까지의 영지를 보장받았고, 히데요시의 빗츄 타카마츠 성 공략備中高松城攻め에 솔선하여 파병했다. 그리고 혼노사의 변本能寺の変이 일어나 히데요시가 정권을 잡았다. 남겨진 아들의 장래를 히데요시에게 맡기도록 유언한 우키타 나오이에의 선택은 잘못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히데요시 쪽도 우키타 가문의 충성을 감지하고 하치로를 비호하여 양아들猶子로 삼아, 텐쇼 13년(1585)에 성인식을 치러주고 "히데秀" 글자를 주어 히데이에라 이름짓게 했다. 이 해 히데이에는 하시바 히데나가羽柴秀長 / 쿠로다 요시타카黒田孝高 /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과 함께 병력을 이끌고 시코쿠 정벌四国征討에 참가하였다.

  오다와라小田原ㆍ큐슈九州, 나아가서는 조선朝鮮에 이르기까지 히데이에는 히데요시를 따르며 충실하게 전쟁에 참가했다. 히데요시도 그를 신뢰하여 구석구석까지 비호를 해주었다. 히데요시가 칸바쿠에 임명되었을 때 히데이에는 사코노에콘츄쇼左近衛權中将 지위에 있었고, 훗날엔 히데요시가 수양딸로 삼은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의 딸 고우히메豪姫를 아내로 삼았다.

  히데요시의 만년에는 다섯 다이로 중 하나로 선발되면서 토요토미 정권의 중진 중 하나로 확고부동한 자리를 잡았다. 히데이에는 히데요시가 공들여 키워낸 귀공자로 문예에도 정통하였고, 상당히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인물이기도 했던 것 같으나, 무인으로서도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밀고 당기는 능력은 얕볼 수 없었다.

  히데이에가 세키가하라에서 서군의 중심이 된 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토요토미와 연관된 수많은 다이묘들이 변절하는 가운데 그가 보인 충성은 유독 빛나는 것이다. 코지마 타카노리児島高徳를 시조로 받드는 우키타 가문의 전승에 따라, "児" 자를 그린 후 그 주변을 물들인 깃발을 앞세운 우키타 군은 가장 치열하게 싸운 부대 중 하나였다.

  마찬가지로 히데요시의 양자였음에도, 서군을 배신하여 전투의 국면을 결정적으로 만들어버린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와는 완전히 대조되는 행보였다. 기실 히데이에는 히데아키의 배신에 격분하여 전장에서 죽을 각오였으나, 주위의 사람들이 뜯어말리는 바람에 전선에서 이탈하였다고 한다.

  이부키 산 속伊吹山中을 헤메이던 끝에 결국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를 의지하여 사츠마薩摩 지방으로 도망친 히데이에는, 죽음만은 모면하고 하치조 섬八丈島으로 유배되었다. 훗날 쇼군 (토쿠가와) 히데타다秀忠가 히데이에와 관계를 맺은 제후들에게 다시 연락을 취하는 것을 허가하자, 사람들은 앞다투어 곡물을 보내왔다.

  히데이에에게 인망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나, 토요토미의 은고를 입은 다이묘들에게 히데이에의 올곧은 행보는, 그들 마음 속의 양심의 가책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을 것이다. 그는 그 후로도 40여 년을 더 살다가 메이레키 원년(1655)에 85세의 나이로 병사病死했다. 표류하여 하치조 섬에 도착했다가 히데이에를 만났다는 승무원들의 기록이 여럿 남겨져 있다.


  ■ 사타케 요시노부佐竹義宣

  - 그 성실한 성격으로 다테 / 토쿠가와를 견제해 줄 것을 미츠나리로부터 기대받았던 요시노부는... 

  세키가하라 전투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나, 이에야스는 측근들에게 "세상에 독실한 사람은 드물지. 내가 본 사람 중에서 가장 독실한 사람을 꼽으라면, 사타케 요시노부가 아닐까." 하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에야스는 케이쵸 4년(1599)에 카토 키요마사加藤清正 등 7명의 무장이 오사카에서 미츠나리를 살해하려 한 사건 당시를 언급했다. 궁지에 몰린 미츠나리는 사타케 요시노부를 의지했다. 요시노부는 그를 후시미에 있던 이에야스에게 데려갔다. 그리고 7명의 무장들이 사와 산佐和山으로 귀환하는 미츠나리를 살해하려는 낌새가 보이자 이에야스는 (차남) 유우키 히데야스結城秀康에게 호위를 맡도록 했는데, 사타케 요시노부도 "미츠나리를 죽게 놔둔다면 본인도 살아있을 보람이 없다." 고 말하며 스스로 무구를 챙긴 후, 척후까지 보내어 언제라도 출격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놓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지조가 있는 인물은 적으로 돌리더라도 도리를 지킬 줄 안다. 그렇기에 아군이 되면 (더욱) 의지할 만하다." 고 이에야스는 이야기하였다.

  사타케 가문은 헤이안平安 시대 말기부터 히타치常陸 지방에 거주하였던 유서 깊은 호족으로, 요시노부 시대에는 미토水戸에 본거지를 두고 있었다. 그는 히데요시가 오다와라 호죠 씨小田原北条氏를 공격할 때 그 밑에 복종하였다. 미츠나리가 사타케 씨에게 주목한 게 바로 이때였다.

  히타치 지방에는 당시 33가문에 달하는 호족들이 할거하며 사타케의 권위에 따르지 않았는데, 미츠나리는 히데요시에게 진언하여 사타케 쪽에서 그들을 멸망시키는 것을 용인하도록 했다. 이에 힘을 얻은 요시노부는 연회를 열어 33개 가문을 초청한 후, 그 자리에서 일거에 그들을 살육하여 히타치 지방 전역을 손에 넣고 54만 석의 대다이묘로 거듭났다. 이후 요시노부는 미츠나리를 의지하여 그에게 충실하였다. 토요토미 정권은 사타케 가문이 동일본에서 다테伊達 / 토쿠가와를 견제하는 역할을 맡아주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미츠나리도 역시 요시노부의 성실한 성격에 나름 기대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 요시노부는 영내에 있었다. 미츠나리가 요시노부에게 카미가타(上方, 역주 : 칸사이 지역. 쿄토 / 오사카 근변 지방)의 정세를 전해준 8월 7일자 편지가 현존하므로, 이보다 전에 미츠나리의 협력요청이 있었으며, 요시노부도 답장을 했으리라 추측된다.

  요시노부는 우에스기에게 호응하여 이에야스와 싸우기 위해 4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타카 군(多珂郡, 지금의 이바라키 현 히타치 시)까지 진출했으나, 이에야스에게 마음을 두고 있던 아버지 요시시게의 만류로 병력을 물렸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인 케이쵸 6년(1601) 4월에 요시시게는 입경하여 이에야스를 만나 복종恭順할 뜻을 밝혔으나, 케이쵸 7년(1602) 7월, 데와 아키타出羽秋田 등 20만 5800여 석으로 감봉ㆍ영지 이전을 당했다.


  시마 사콘島左近

  - 주군 미츠나리를 보좌하여 군사지휘를 맡은 사콘의 최후

  시마 사콘은 처음엔 츠츠이 쥰케이를 섬겼다. 마츠쿠라 우콘(松倉右近, 역주 : 시게노부重臣. 폭정을 저질러 시마바라의 난島原の乱을 초래, 참수당한 마츠쿠라 카츠이에松倉勝家의 할아버지)과 쌍벽을 이루며 사콘 / 우콘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시다 미츠나리가 처음에 히데요시로부터 오우미 미나구치近江水口 4만 석을 하사받았을 때, 2만 석을 주어 시마 사콘을 등용, 히데요시가 "주군과 신하가 같은 녹을 가지는 건 유례가 없다." 고 하며 감명을 받았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실제로 사콘은 츠츠이 가문을 섬긴 후 하시바 히데나가의 가신이 되어, 분로쿠 3년(1594)에 히데나가의 아들인 히데야스秀保가 급사한 후에야 미츠나리를 섬겼으므로, 등용된 시기는 미츠나리가 오우미 사와 산 19만 4천 석의 성주가 되기 직전이다. '군주와 신하가 같은 녹' 어쩌고 하는 건, 어디까지나 미츠나리가 사콘을 중용하였다는 하나의 표현으로서 읽어야 한다.

  그러나 사콘은 토요토미 가문의 입장에서 보면 어디까지나 바이신陪臣이므로, 미츠나리와 같은 두뇌명석한 인물을 섬기면서 표면적으로는 그다지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적이 없다.

  그러나 몇몇 일화들을 보면, 그는 군사적 밀고 당기기의 측면에서 연하의 주군 미츠나리의 행동이 지나치게 신중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케이쵸 4년(1599) 3월, 미츠나리는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의 병문안을 위해 오사카로 찾아온 이에야스를 습격할 계획을 세웠으나, 결국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사콘은 과단성이 없다고 주군을 비판했다 한다.

  미츠나리가 이에야스에게 은퇴를 강요당했을 때도 사콘은 사와 산에서 거병하여 일전을 벌이면 후시미의 이에야스를 죽일 수 있을 것이라며 미츠나리를 움직이려 했으나, 결국 받아들여이지 않았다.

  시마 사콘이 군사적 지휘에서 본실력을 보인 건, 세키가하라 전투 전날에 벌어진 케이쵸 5년(1600) 9월 14일의 쿠이세 강 전투杭瀬川の戦い 때였다.

  예상보다 빨리 미노 아카사카美濃赤坂 부근에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착한 것을 알고서 동요하는 서군의 모습을 본 사콘은, 어찌됐든 일전을 벌여 승리를 거두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쿠이세 강은 평야부를 따라 남북으로 흐르면서 아카사카 부근의 이에야스 본진과 오오가키 성大垣城의 서군들을 갈라놓고 있었다,

  사콘은 동료인 가모 사토나리蒲生鄕舍와 함께 부근에 있는 집락集落에 복병을 숨겨둔 후, 적은 병력을 이끌고 쿠이세 강을 건너 동군 측의 나카무라 카즈히데中村一栄를 도발했다. 상대가 출격하자 일부러 패주하는 척 한 사콘은, 나카무라 군이 강을 건너오자 복병들로 하여금 측면을 공격케 하여, 혼란에 빠진 적군을 들이쳐 박살내었다.

  이에야스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거둔 눈부신 승리이긴 했으나, 결국은 천하를 판가름하는 전투 전날에 벌어진, 대세를 움직이는 데 이르지 못한 작은 전투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사콘이 가진 지위의 애석함이라고 해야 할까.

  다음 날에 벌어진 세키가하라 본 전투에선, 세 겹으로 울타리를 구축한 이시다 군의 선두에 서서 쿠로다 장병들과 충돌했는데, 측면에서 화승총 저격을 받아 전사해버리면서 활약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생존한 쿠로다 가문의 고참무사들이 옛날 이야기를 할 기회가 생겼을 때, 그들은 그날 이시다 진지의 목책 밖으로 나와 100명 정도의 정예를 이끌고 엄숙하게 치고 나오던 시마 사콘의 귀신같은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사콘이 입고 있던 갑주와 그가 달고 있던 사시모노에 대한 기억은 제각기 달라, 의견이 합쳐지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엔 이시다 가문에 봉직하던 무사를 3명 불러서 확인하게 햇는데, 알고보니 쿠로다 가신들 가운데 정답을 맞춘 자는 아무도 없었다. 노련한 쿠로다 무사들도 그날, "아니, 그 때는 정말 사콘의 용맹함이 두려워서, 복장까지 기억하였을 만한 시국이 아니었던 것이지." 라고 변명을 했다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시마 사콘의 영광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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