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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망! 세키가하라》미츠나리를 둘러싼 7명의 남자들 (2) 역사



  이 글은 신인물문고新人物文庫 20《이시다 미츠나리 야망! 세키가하라》에 수록된 글들 중 하나(p. 59 ~ 74)로 하루나 아키라(春名徹, 1935~) 씨께서 집필하신《미츠나리를 둘러싼 일곱 명의 남자들》이란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위 책은 1989년에 출판된 잡지에 실린 내용을 바탕으로 2009년에 문고화한 책이라 원글이 집필된 지는 거의 30년이 다 되어간다는 점을 감안하시고 읽어주셨으면 합니다.(무장으로서 코니시 유키나가가 가진 역량을 저평가하는 것은 좀 납득이 안 가긴 하지만.)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

  - 서군의 총수로 모리 테루모토를 앉힌 것이 에케이였으나...

  이시다 미츠나리는 오오타니 요시츠구에게 계획을 털어놓은 후, 이어서 7월 12일에는 사와 산성에 요시츠구와 안코쿠지 에케이를 초청했다. 에케이를 통해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를 움직이려고 했다는 건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에케이는 지금에 와선 이요 와케 군伊予和気郡 6만 석을 영유하는 다이묘로, 토요토미 정권의 실무가라는 점에서는 미츠나리와 비슷한 입장이었다. 모리 가문의 외교승으로 활동하던 왕년의 시절과는 영향력도, 판단력도 달라진 게 아닐까.

  분명 모리 테루모토를 서군의 총대장으로 앉히는 데 성공한 건 에케이의 공적이나, 결국 킷카와 히로이에吉川広家로 대표되는 반대파들을 압도하지 못하여 모리 일족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중립적 입장을 취하는 결과가 빚어지고 말았다.

  생각해보면, 과거의 안코쿠지 에케이가 "노부나가는 이윽고 높은 곳에서 굴러 떨어지겠지요." 라고 예언하였던 텐쇼 원년(1573)에는 그는 아직 30대 중반으로, 판단력이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그러나 지금은 60세가 넘었고, 그가 처한 입장도 변화하였다. 모리 가문을 대표하여 히데요시와 화평교섭을 벌이는 사이에 그는 서서히 토요토미 정권 안으로 편입되어간 것이다.

  이는 지조의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모리 가문의 그 누구보다도 정세판단이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에케이로서는, 오히려 히데요시와 화해하여 영토보전을 꾀하는 것이 모리 가문을 위한 일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자기를 "까까머리 세이케이 애송이(正慶小僧, 세이케이는 에케이의 별명)" 라고 부르며 미워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히데요시의 우위가 현실이 되어가면서 "결코 카미가타의 역성을 들려는 게 아닙니다." 라고 그는 모리 가문의 노신들에게 당당히 말할 수 있게 되었다.{텐쇼 11년(1583),《모리 가문 문서》861호} 동시에 그는, 히데요시에게 접근해가면서 이 천재를 도와 "천하" 를 상대로 일하는 쾌감을 맛보기 시작한 듯하다.

  당시, 모리 가문이 히데요시에게 인질로 바친 킷카와 츠네코토吉川経言, 즉 훗날의 히로이에広家 같은 경우, 이러한 에케이의 변신에 내심 반발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세키가하라 전야, 미츠나리와 상담을 마친 에케이는, 우에스기 토벌을 위해 거성居城인 이즈모出雲 지방 토다富田에서 출진한 킷카와 히로이에와 7월 14일 밤, 오사카에서 대면하였다.

  이에야스를 공격할 것을 주장하는 에케이에 맞서 히로이에는 "테루모토에겐 이에야스와 싸울 이유가 없으며, 코마키 전역의 사례로 볼 때 이에야스의 실력은 충분한 것으로, 서군에 가담한다 해도 승산이 없다," 는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적어도 히로이에 쪽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이 말을 들은 에케이는 설득력 있는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히데요시의 유언을 위반하는 이에야스는 토벌해야 한다." 든가, "히로이에가 반대한다면 나는 배를 가르겠다." 는 식의 감정적인 발언을 했다. 모리 가문의 장래에 책임감을 갖고 있던 히로이에로선 이런 말을 듣고 행동에 나설 순 없었다. 히로이에는 "테루모토에게야 안코쿠지는 대신할 수 없는 존재이긴 하다" 는 냉정한 회답을 했다.

  앞선 텐쇼 11년(1583)의 편지와 비교한다면, 에케이의 입장은 완전히 역전되었다. 감정에 이끌려 정세판단을 그르치고 있는 건 이젠 에케이 쪽이다. 그도 늙어버렸다고 해야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케이는 모리 테루모토를 서군의 총수로 옹립하였으나, 모리 가문은 히로이에의 편을 드는 자와 에케이의 편을 드는 자들이 대립하면서 수습이 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히로이에는 신속히 이에야스와 연락을 취해 사전에 귀순할 것을 서약하였다. 안코쿠지도 병력을 인솔하여 모리 군과 함께 난구 산南宮山 산기슭에 포진했으나, 히로이에 부대에게 견제를 당해 진지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한 채로 세키가하라에 있던 서군이 패주하는 모습을 구경만 해야 했다. 도망쳐서 쿄토로 잠입한 에케이는 결국 붙들려 미츠나리 / 코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10월 1일에 참수당했고, 그 목은 저잣거리에 효수되었다.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 세키가하라 결전에서 최초로 무너져, 서군이 전면적으로 붕괴하는 단초가 되었던 유키나가의 진의

  크리스찬 다이묘엿던 코니시 유키나가에 대해선 불명확한 점이 많다. 사카이堺의 약종상藥種商 출신이라는 통설은 근거가 없다. 그러나 아버지 류사隆佐의 경력 등을 참조해 보면, 사카이 상인의 핏줄을 물려받았다는 건 아마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어린 시절 야쿠로란 이름으로 오카야마岡山 모 상인의 양자로 보내졌다가 오다 세력이 비젠備前 지방으로 진출하였을 때 우키타 가문宇喜多家이 히데요시에게 투항하도록 알선하였기에, 히데요시에 의해 무사로서 발탁되었다는 설도 폐기하긴 힘들어진다. 히데요시의 츄고쿠 지방 진출에 편승하여 상권 확대를 노리던 사카이 상인들의 의도가 감지되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유키나가는 히데요시 정권 속에서 카토 키요마사加藤淸正 같은 무장들과는 이질적인 기질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점이 조선 침략을 전후하여 무장파와 관료파의 대립으로 발전해가는데, 이 대립은 토요토미 정권 자체의 성장과 더불어 종래의 무장들 뿐만이 아닌, 내정 / 외교 등에 능력을 발휘하는 관료형 인재가 필요해졌던 현실을 반영한 현상이다.

  그런 의미에선 미츠나리와 유키나가는 토요토미 정권 내부에서 같은 계열에 속했다. 스스로 출진하였던 조선에서도 유키나가는 군사적인 면보다는 외교 쪽에서 실력을 발휘하였다.

  세키가하라 결전 당일, 텐만 산天満山을 배경으로 서군의 중앙에서 나카센도中山道를 틀어쥔 지점을 점하고 있던 코니시 군은 코바야카와 군이 배반한 후 가장 먼저 무너져, 서군이 전면적으로 붕괴하는 단초를 만들었다.

  반면, 그의 영지인 우토 성宇土城에서는, 잔류부대가 카토 키요마사의 병력을 잘 막아내며 완강하게 싸우다, 세키가하라에서의 패배를 알게 된 후에야 투항하였다. 전투에는 그다지 강하지 못하다는 인상이 강한 코니시로선. 그나마 마지막에 체면이 세워진 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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