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칭관찰자

beholderer.egloos.com

포토로그



《야망! 세키가하라》미츠나리를 둘러싼 7명의 남자들 (1) 역사



  이 글은 신인물문고新人物文庫 20《이시다 미츠나리 야망! 세키가하라石田三成 野望! 關ケ原》에 수록된 글들 중 하나(p. 59 ~ 74)로 하루나 아키라(春名徹, 1935~) 씨께서 집필하신《미츠나리를 둘러싼 7명의 남자들》이란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위 책은 1989년에 출판된 잡지에 실린 내용을 2009년에 문고화하여 편집한 일종의 개정판이며 원글이 집필된 지는 거의 30년이 다 되어간다는 점을 감안하시고 읽으셨으면 합니다. 


  ■ 나오에 카네츠구直江兼続

  - 카미가타의 정세를 축차적으로 알려주는 미츠나리의 편지를 받아든 카네츠구의 흉중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와 나오에 카네츠구 사이엔, 동서東西에서 호응하여 (토쿠가와) 이에야스家康를 협공하자는 밀약이 존재했었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다. 그리고 (토요토미) 히데요시秀吉가 살아있던 시기에 가모 우지사토蒲生氏鄕를 독살하고, 그의 영지였던 아이즈 지역이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에게 주어진 때부터 음모는 시작되었다고 공을 들여 묘사한 창작물도 존재한다. (그러나) 우지사토가 독살되었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아무런 근거가 없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세키가하라 당시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므로, 밀약이 존재했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듯 하나, 현대의 역사가들은 이 편지들이 대부분 위작이라고 생각한다.《나오에 장直江状》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카네츠구가 이에야스의 브레인인 사이쇼 쇼다이西笑承兌에게 보내었다는 변명문 형식의 도전장도, 역시 위작으로 간주된다.

  2009년 4월 이후 토쿄대학 종합도서관은 인터넷을 통해 귀중도서인《나오에 장》을 전자책화하여 공개하고 있다. 자못 실존하였던 문서처럼 여겨지나, 그 책의 성격은 쇼오 3년(1654)에 쿄토에서 출판된, '오라이모노往來物' 라 불리는 서간문체 글씨교본에 불과하다. 생각을 해 봐도, 우에스기 카게카츠의 모신謀臣으로 아이즈 100만 석의 모든 책임을 도맡은 외교가이기도 한 카네츠구가 그같이 도발적인 편지를 썼으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그러나 미츠나리도 카네츠구도, 히데요시가 죽은 후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갈 것인지에 대해선 예상을 하고 행동했을 것이다. 그러한 경우 상대가 어떻게 나오느냐의 여부를 염두에 두고서 자신도 움직여 갔으리라.

  케이쵸 4년(1599)에 카게카츠와 카네츠구가 우에스기 가문의 병력을 인솔하여 아이즈로 돌아갔을 때, '천하가 소란스러워진 사이에 영지를 정비하여, 우에스기 가문 조상들의 고토父祖の地인 에치고越後 지방을 병합하겠다.' 고 카네츠구는 마음 속으로 계산하었을 것이다. 미츠나리 쪽에서도, '우에스기가 일을 벌이면 이에야스가 이를 진압하기 위해 출진하지 않을 수가 없으므로, 그 틈을 노려 서쪽에서 행동을 일으키겠다' 고 당연히 생각했으리라. 쌍방의 행동은 서로에게 이용가치가 있었다.

  미츠나리는 거병을 전후하여 카네츠구에게 카미가타의 정세를 알려주는 편지를 여러 번 보내었는데, 밀약을 맺지 않았다 하더라도 상대의 이용가치를 감안한다면 당연한 행동이었다. 아마 두 사람 모두가 상대의 행동을 오산했을 것이다. 미츠나리는 '우에스기 군이 한동안 이에야스를 견제해줄 것' 이라 생각했을 것이고, 카네츠구로선 反 이에야스 파의 행동이 그렇게 쉽게 괴멸당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음이 틀림없다.

  카네츠구는 토요토미 정권에서 보기엔 바이신(陪臣, 역주 : 휘하 다이묘大名의 가신)이었다곤 해도, 아이즈 100만 석 중에서 30만 석을 다스리는 중신重臣이었고, 미모를 자랑하는 장신의 교양인이기도 했다.


기러기가 나를 닮은 것인가, 내가 기러기를 닮은 것인가.
낙양성 뒷편의 꽃들을 등지고 돌아가네.


  라는 유명한 구절은 (카네츠구가) 쿄토를 떠날 때 남긴 시구로, 당시에 세상의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인물이《겐페이세이스이키源平盛衰記》를 애독했다고 전해지는 미츠나리와 죽이 맞았으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기실 카네츠구 쪽에서 미츠나리를 경시하고 있지 않았을까.

  세키가하라의 결과를 알게 된 카네츠구는 즉각 철군하여, 이후에는 감봉당한 우에스기 가문을 재편성하고 親 토쿠가와 정책을 펼치는 데 남은 후반생을 바쳤다.


  ■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吉継

  - 가장 먼저 거사를 통고받은 요시츠구는, 이를 만류하려 했으나...

  미츠나리가 가장 먼저 거사大事을 털어놓은 상대가 오오타니 요시츠구였다. 두 사람은 근습近習으로서 함께 히데요시를 섬겼기에 젊은 시절부터 속속들이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미츠나리가 그를 신뢰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요시츠구는 당초엔 이에야스의 우에스기 토벌군에 참가할 요량으로 에치젠 츠루가敦賀를 출진했다. 이에야스는 미츠나리에게도 "아들인 하야토노쇼隼人正를 대리名代로 보내라." 고 지령을 내렸으나, 요시츠구는 이번에 미츠나리도 같이 데리고 내려가 삐걱대는 사이였던 이에야스와 미츠나리의 관계를 회복시키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요시츠구와 이에야스의 관계는 결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미츠나리는 무리하여 요시츠구를 사와 산성佐和山城으로 초대, 거사할 것임을 털어놓았다. 요시츠구는 극력 이를 만류하려 했으나, 결국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고 여기에 가담했다. 명민한 요시츠구는 이에야스의 위세에 거역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미츠나리가 감연히 일을 벌이려 한다면, 토요토미 가문에 한 목숨 바치는 것도 어쩔 수 없겠지.' 라며 체념했던 게 아니었을까.

  이 때, 요시츠구는 미츠나리에게 주의사항 두 가지를 이야기하였다.

  첫 번째, "자네는 오만하다는 이유로 여러 다이묘들뿐만 아니라 그 수하들에게까지 미움을 사고 있네. 그러니 이번의 거사에서는 그러한 상황을 분별하여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 /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두 사람을 윗전에 앉히고, 자네는 그 밑에 있으면서 일을 꾸며야 할 것이네."

  그리고 또 하나, "무사에게는 지혜와 용기知勇가 중요하다는 거야 말할 필요도 없겠지. 자네의 지혜와 재치에 견줄 자가 없다는 건 의심하지 않으나, 용기 쪽은 약간 못미덥다네. 애초에 그와 같은 대망을 품고 있었다면 오우미 미나구치水口의 나츠카 마사이에長束正家 같은 자들을 끌어들여서, 이에야스가 칸토로 무사히 내려가기 전에 이시베 역참石部の宿 같은 곳에서 죽여버렸어야 했어."

  미츠나리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요시츠구의 비판에 감사하였다고 한다.(《오치보슈落穂集》) 실제 있었던 일이라곤 생각되지 않으나, 그렇게 거침없이 충고할 수 있을 정도로 요시츠구와 미츠나리가 가까운 사이였기에 생겨난 일화일 것이다.

  요시츠구는 1천 2백 명의 병력을 인솔하여 세키가하라에 포진, 홋고쿠 방면北国口을 향해 진지를 치고 용맹과감하게 싸웠다. 그는 한센병을 앓고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갑옷도 걸치지 않고 가마에 실린 채로 출진하여 히라츠카 타메히로平塚為広가 그를 대신하여 지휘를 맡았다.

  그는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의 배신을 예상하고 있었기에, 가까이에 온존시켜 두었던 7백 명 가량의 예비대로 하여금 마츠오 산松尾山을 내려오던 코바야카와 군의 선봉부대를 견제하며 한동안 선전했으나, 결국 자신의 지휘하에 있던 와키자카脇坂 / 쿠츠키朽木 / 오가와小川 / 아카자赤座 등의 소다이묘小大名들이 배신하여 코바야카와 군과 함께 오오타니 군을 공격하면서, 이제는 버틸 수가 없게 되었다.

  요시츠구는 '거사는 끝이 났다.' 고 체념한 후 가마에서 목을 내밀어, 이전부터 신신당부를 해 두었던 측근무사 유아사 고스케湯浅五助의 칼에 그 목이 잘려 떨어졌다. 무인다운 최후였다.

 

덧글

  • 키키 2017/07/14 17:49 # 답글

    잘봤습니다. 개인적으로 이시다 지부의 의지에 동감하는데 다음엔 누가 나올지 궁금하네요 ㅎㅎ
  • 3인칭관찰자 2017/07/14 21:46 #

    미츠나리에게 우호적인 사람들 위주로 나옵니다. 자연히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한 사람들이 많더군요. ㅎㅎ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