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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테 마사무네》마사무네의 가신들 (2) 역사



  이 글은 1990년에 출간된《(旧) 歷史群像シリーズ 19 伊達政宗 ~獨眼龍の野望と咆哮~》P. 80 ~ 84에 수록된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의 주요 신하들을 망라한 간략한 인물열전들의 모음집인【 다테 가신단 열전伊達家臣団列傳 】을 번역한 글입니다. 필자는 역사작가이셨던(2008년 별세) 故 시토 마사타카紫桃正隆 님입니다.


  스즈키 모토노부(鈴木元信, 1555~1620)

  행정관奉行. 센다이 번仙台藩의 재무대신大蔵大臣 / 경제기획청 장관経済企画庁長官에 해당하는 인물. 원래 이름은 히데노부秀信. 통칭으로는 타카노부高信 / 시게노부重信 / 시치에몬七右衛門 등이 있으며, 훗날에는 이즈미和泉라 불렸다.

  이와데야마 이치마사岩出山市正의 아들(일설에 따르면 아이즈 쿠로카와会津黒川 사람인 호즈미 씨穂積氏의 아들이라고도)로, 이전에 쿄토에서 다도茶儀를 배운 점을 평가받아 마사무네에게 등용되어 녹을 받았다. 훗날 국로国老에 임명되어 후루카와 성(古川城, 현 후루카와 시古川市)에 거주하며 1,500석을 영유했다.

  모토노부는 무용에 치우치지 않고 행정 / 경영업무에 능한 인물이었다. 그는 임종을 앞두고 "무릇 전국시대에 무사를 섬기려는 자는 그 주인을 잘 선택해야 하는 법이다. 나는 과거에 마사무네 공을 배알하였을 때, (그 분의) 재능과 역량이 그야말로 천하에 횡행할 만 하며, 구구히 일개 제후로 끝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기회와 운이 따라주지 않아 천하에 호령하지 못하셨으니 유감스런 일이다. (중략, 궤짝 하나를 꺼내며) 여기에는 천하를 다스릴 때 내세울 율령전모律令典謨를 담아두었다. 이제는 쓸모없게 되었구나." 라고 하면서, 그 궤짝을 불태우게 했다고 한다.

  "텐카비토天下人 마사무네" 의 출현을 예상하고, 다테 막부伊達幕府의 '법규式目''헌법憲法' 초안을 준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꿈이 스러진 지금, 쓸모없는 물건을 신변 근처에 두어서는 막부의 의혹을 살 뿐이라고 생각하여 임종시에 이를 소각시켰다.

  겐나 6년(1620) 6월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66세. 후루카와 즈이센사瑞川寺에 매장되었다. 모토노부의 적자인 덴조伝蔵는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기에, 차남인 시치에몬七右衛門이 스즈키 가문을 계승했다.


  다테 시게자네(伊達成実, 1568~1646)

  센다이 번 일문. 어린 시절의 이름은 토키무네마루時宗丸. 통칭으로는 토고로藤五郎 / 효부兵部 / 아와노카미安房守 등이 있으며 훗날에는 아와安房라 불렸다.

  디테 타네무네(伊達稙宗, 다테 가문 14대 당주. 역주 : 마사무네의 증조할아버지)의 3남인 사네모토実元를 아버지로, (다테) 하루무네(晴宗, 다테 가문 15대 당주, 역주 : 마사무네의 할아버지)의 딸을 어머니로 둔 순혈 다테 친족 / 일문이었다. 시게자네의 인물됨은 영의대략英毅大略하며 그 무용은 견줄 자 없다고 일컬어졌다.

  텐쇼 13년(1585)에 벌어진 히토토리 다리 전투人取橋の役에서 시게자네의 부대는 적진 사이에 포진하여 공을 세워, 텐쇼 14년(1586)에는 니혼마츠 성二本松城을 하사받아 아다치 군安達郡 33개 마을 3만 8천 석을 영유했다. 텐쇼 16년(1588)의 코오리야마 전투郡山の役 / 텐쇼 17년(1589)의 스리아게하라 전투摺上原の役, 스카가와 전투須賀川の役에서 다테 군단의 중심세력을 이루며 전과를 올렸다.

  텐쇼 18년(1590) 카사이ㆍ오사키 잇키葛西大崎一揆 토벌 때 시게자네는 가모 우지사토蒲生氏鄕의 인질이 되어 묘우 성名生城에 입성하여, 우지사토가 주군 마사무네에게 갖고 있던 의혹을 풀게 했다. 이후 쿄토로 향하려는 우지사토와 함께 출발하여 니혼마츠 성으로 돌아왔다. 텐쇼 19년(1591) 번의 수도가 이와데야마岩出山로 옮겨지면서, 새로이 이구 군伊具郡 16개 마을과 시바타 군柴田郡 1개 마을을 하사받아 카쿠다 성角田城으로 이봉하였다.

  그러나 분로쿠 2년(1593) 조선 전역에 종군하였다 돌아와 후시미伏見에 머무르던 시게자네는, 분로쿠 4년(1595)에 은밀히 코야 산(高野山, 일설에 따르면 소슈 카스야相州糟屋)으로 탈출하고 만다. 그 이유는 시게자네의 공적이 제장들 가운데 으뜸임에도 불구하고 지위와 녹봉이 그들만 못한 것을 불평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루스 마사카게留守政景가 사람을 보내어 설득하였으나 불발로 끝났고, 결국엔 주군의 명령을 받은 야시로 카게요리屋代景頼가 카쿠다 성 토벌에 나서, 그 결과 시게자네의 가신인 하네다 사네카게羽田実景 이하 30여 명이 전사하고 말았다.

  케이쵸 5년(1600)에는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가 5만 석을 주어 등용하려고 했으나 거부하였다고 한다. 같은 해 가을, 이시카와 아키미츠石川昭光 / 루스 마사카게 / 카타쿠라 카게츠나片倉景綱들이 주군의 명령을 받들어 마음을 돌리도록 설득하였기에 드디어 다테 가문으로 복귀, 시로이시 전투白石の役을 거쳐 케이쵸 8년(1603)에는 와타리 성주亘理城主로서 부활하였고, 일문一門으로 받아들여졌다. 겐나(1615) 년의 오사카 전쟁大坂の役에도 출진하였다.

  칸에이 15년(1638)에는 에도에서 쇼군을 배알하여 가마를 타고 에도 성문을 출입할 수 있는 권리를 하사받는 한편, 식사 대접을 받았다. 이 때 시게자네가 오슈 지방의 군담軍談을 이야기하자 쇼군 (토쿠가와) 이에미츠家光는 그 용략을 찬탄하며 계절복 20벌과 도포 10벌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시게자네는 쇼호 3년(1646) 6월 4일,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법명은 큐잔텐쇼유잔지덴久山天昌雄山寺殿. 와타리 군 코즈츠미 마을(亘理郡小堤村, 지금의 와타리쵸)의 다이유우사大雄寺가 보리사菩提寺이다.

  시게자네는 불 같은 주전론자라는 일면을 갖춘 동시에, 냉정하고 치밀한 두뇌의 소유자였다. 그가 저술한《시게자네키成実記》는 훗날 센다이 번 관련문헌들 가운데서 기본적인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츠다 카게야스(津田景康, 1564~1638)

  센다이 번의 충신忠臣. 어린 시절 이름은 토모키리키智喜力 / 마타지로又次郎이며 이후에는 겐마玄馬 / 부젠豊前 / 민부民部 등으로 불렸다. 일설에 따르면 오우미 노부야스近江信康라고도 한다. 원래는 유노메 씨湯目氏로 불렸다.

  텐쇼 13년(1585) 히토토리 다리 / 텐쇼 17년(1589) 스리아게하라 두 전투에서 공적을 세웠고, 텐쇼 19년(1591) 사누마 전투佐沼の役에서도 무공을 세워 사누마 성佐沼城을 하사받았다. 분로쿠 전역文禄の役에도 참전하였다.

  칸바쿠 (토요토미) 히데츠구의 사변秀次の変 당시 후시미 아부라카케 마을油掛邑 근처인 츠다노하라津田の原에서 히데요시를 배알, 마사무네의 무죄를 호소愁訴하여 히데요시의 의심을 푸는 데 성공했다. 마사무네는 이 충성됨에 대한 상으로 영지를 가봉시켜 2,500석으로 만들어줌과 동시에, (히데요시에게) 호소한 지명을 따서 유노메 성을 츠다津田로 고치게 했다.

  카게야스는 케이쵸 5년(1600)에 벌어진 시로이시 전투에서도 공적을 세웠고, 모가미 전역最上の役에서도 부장 신분으로 적 수급 백여 개를 거두었다. 두 번에 걸친 오사카 전쟁에서도 활약하여 녹봉을 가봉받아 3,800석이 되었다. 그의 아들 부젠 요리야스豊前賴康는 칸에이 13년(1636)에 아버지를 대신하여 행정관奉行 지위를 물려받았다.

  칸에이 15년(1638) 2월 17일에 75세의 나이로 죽은 후, 사누마 니시다테西館에 매장되었다.


  하세쿠라 츠네나가(支倉常長, 1571~1622)

  센다이 번 무사. 견유사절遣歐使節. 통칭으로는 요이치與市 / 고로우에몬五郞右衛門 / 로쿠에몬六右衛門이 있다. 하세쿠라 씨는 타이라 카바네平姓로, 히타치노스케 츠네타카常陸介常隆의 차남인 이토 츠네히사伊藤常久를 시조로 두었다.

  분지 년간(1185~1189)에 다테 가문 초대 당주 다테 토모무네에게 복속하여, 무로마치 막부 말기에는 14대 타네무네 -> 15대 하루무네를 섬기며 시바타 군 내 2천 석을 영유, 시바타 군 하세쿠라 마을(支倉村, 지금의 카와사키쵸川崎町)에 거주하며 하세쿠라 성을 사용하게 되었다. 츠네나가는 하세쿠라 씨의 별계別系인 야마구치 츠네나리山口常成의 아들이었지만, 양자로 맞아들여져 하세쿠라 씨를 승계했다.

  이른 시기부터 마사무네의 신임을 얻어, 600석의 녹봉임에도 케이쵸 18년(1613), 주군의 명을 받들어 프란시스코회 수도사 소델로와 함께 9월 15일에 오시카 군牡鹿郡 츠키노우라(月ノ浦, 지금의 이시노마키 시石巻市)를 출항하여 유럽으로 도항했다. 멕시코를 도중에 거쳐 스페인 / 이탈리아에 보내는 사절로서 겐나 원년(1615) 1월에 마드리드에 도착, 국왕 돈 펠리페 3세를 알현하고 세례를 받아 '돈 필리포 프란시스코' 라 불리게 되었다.

  그 해 9월 로마에서 교황 파울루스 5세를 알현하였고 로마 시로부터 시민권을 수여받았으나, 본래의 목적이었던 '오슈 사교구 창설''일본-스페인 통상조약 체결' 에는 성공하지 못한 채 겐나 4년(1618)에 귀로에 올랐다.

  마닐라에 도착했음에도 일본의 크리스트교 금지령과 소델로의 악평 때문에 입국하지 못하다가 결국 겐나 6년(1620) 8월 26일에 단신으로 귀국하였다. 여정에는 거의 8년의 세월이 소비되었다. 이 세기적 쾌거는 세계사에 오래도록 빛을 뿌리게 되리라.

  난반(南蛮, 역주 : 서구 유럽) 사절 파견의 진의와 목적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종래에는 난반의 국가들을 정찰 / 무역 / 산업기술 도입 / 신항로 개척 / 난반 국가와의 군사동맹을 통한 막부 타도 등등 다양한 설이 제기되어 왔으나, 아직도 이는 수수께끼로 여겨지고 있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교황에게 보낸 친서에 "상선이 내왕하여 이윤을 챙기는 건 별 문제가 되지 않으나, 크리스트 교 포교는 단념하기 바랍니다." 라고 적은 반면, 마사무네의 친서에는 "오슈 지방을 크리스트 교 포교의 기지로 삼는 것을 허락할 테니 가능한 한 많은 프란시스코 파 신부들을 보내주시오." 고 적혀 있어, 마사무네의 독자적인 대망이 존재했음을 짐작케 한다. 센고쿠다이묘의 꿈이란 건 언제나 천하통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최근의 연구에서 츠네나가는 죄를 지은 이의 자식이라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초인적 사업을 이뤄낸 후,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마사무네의 특명을 받든 츠네나가가 울트라맨 같은 밀사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는 면이 서서히 확인되어가는 중이다.

  겐나 8년(1622) 7월 1일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52세. 센다이 키타야마 산北山의 코묘사光明寺에 매장되었다. 츠네나가의 아들인 하세쿠라 츠네요리支倉常頼 / 곤시로 츠네미치権四郎常道 형제는 칸에이 17년(1640) 3월, 크리스트 교를 신앙하고 있다는 죄목으로 심부름꾼인 요에몬 / 타로에몬들과 함께 처형당했다.


  하라다 무네토키(原田宗時, 1565~1593)

  센다이 번 숙로宿老. (통칭) 토라고마虎駒 / 사마노스케左馬之助. 하라다 씨는 후지와라 카바네藤原姓이다. 이 가문은 다테 토모무네(다테 가문 초대 당주)를 섬긴 이후 누대에 걸쳐 숙로를 맡아온 집안이다. 하라다 오오쿠라 무네마사原田大蔵宗政가 소마 전역에서 전사하면서 그의 동생 야마미네 겐이치로山嶺源市郎의 아들인 토라고마, 즉 무네토키가 양아들로 맞아들여져 하라다 가문을 계승하였다.

  무네토키는 강직한 성격으로 무용武勇에 뛰어난 무사였다. 남에게 고개 숙이길 싫어하고, 18세의 나이에 군사업무에 나서 여러 번 전공을 세웠다. 한때 무네토키는 노장 고토 노부야스後藤信康에게 원한을 품고서 그를 죽이고 자신도 죽으려 했으나, 노부야스의 의로운 용맹함義勇에 크게 외복畏服하여 이후 두 사람은 깊은 친교를 맺게 되었다.

  분로쿠 2년(1593), 조선에서의 전쟁을 위해 바다를 건넜는데, 이 때 열 자가 넘는 큰 칼을 등에 짊어지고 황금 쇠사슬이 달린 말안장을 갖춘 준마에 올라탄 그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모두 그 위세를 칭찬했다. 그러나 조선 땅인 부산釜山에서 병을 얻어, 쓰시마 섬對馬으로 귀항하였다가 그 곳에서 객사했다. 분로쿠 2년(1593) 7월의 일이다. 향년 29세. 마사무네는 와카国風 6수를 지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무네토키의 손자인 (하라다) 카이 무네스케甲斐宗輔는 국로国老가 되어 1천 석을 영유했으나, '칸분 사건' 에 연좌되어 하라다 가문의 대는 끊기고 말았다.
   
 

덧글

  • 8비트소년 2017/07/14 10:58 # 삭제 답글

    다테 시게자네의 부모가 뭔 족보인지 모르겠네요. 삼촌하고 조카가 결혼해서 낳았다는 건가요?
  • 3인칭관찰자 2017/07/14 13:47 #

    네. 삼촌과 조카가 결혼해서 다테 시게자네가 태어났습니다. 전국시대, 특히 다테 가문의 경우는 자식을 많이 낳아서 그 아들딸들을 시집보내거나 다른 가문에 양자로 주어서 영향력을 넓히는 정책을 특히 많이 벌였는데 여러 대에 걸쳐 그런 외교를 펴다 보니 실제 핏줄로 보면 3~4촌 관계인 남녀간 근친혼이 적지 않게 행해졌다 하더군요. 물론 시게자네의 부모 쪽은 양자로 간 것도 아니고 다른 가문으로 시집간 것도 아니니 대놓고 근친혼이지만요(....)
  • 3인칭관찰자 2017/07/15 12:16 #

    다테 가문 관련 계보를 보니 3, 4촌 간의 결합이 없는 건 아닌데, (시게자네 부모 제외하고) 특정 가문에 혼인과 양자를 중첩되게 보내어 근친결혼을 만든 경우는 생각보단 많지가 않다, 고 정정하겠습니다.

    타네무네와 하루무네는 양자/혼인정책을 앞세워 세력확장을 도모했지만 테루무네 쪽은 자식이 얼마 없기도 해서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모방하기도 뭐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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