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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와 세상》교육의 의미 (2) 인사밸



  본 글은 1975년 3월, 일본출판사 츄오코론샤中央公論社에서 신서본新書本으로 간행한 故 쿄고쿠 쥰이치 교수님과 영화평론가 사토 타다오 님{이 분의 책 중 한국어로 번역된 저서로는《소년병, 평화의 길을 열다》,《한국영화와 임권택》(절판),《일본영화 이야기》(절판)등이 있습니다.} 의 대담집인《학교와 세상 - 진학문명을 뛰어넘는 것(中公新書 388) 제 1장 <교육의 의미> 에 수록된【 시스템적 재생산과 교육 】부분 전반부(p. 7 ~ 11)를 번역한 것입니다. 일단은 몇 년 전에 미리 번역해 놓았던 (그리고 헌책이었기 때문인지 책심도 박살난....) 1장만 포스트로 올릴 예정입니다.


  쿄고쿠 쥰이치(京極純一, 1924 ~ 2016)

  1924년(타이쇼 13년) 쿄토 출생. 1947년에 토쿄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 현재(1975년) 토쿄대학 법학부 교수. 정치과정론 전공.

  사토 타다오(佐藤忠男, 1930~)

  1930년(쇼와 5년) 니가타 시 출생. 1957~1962년 사이에《영화평론》,《사상의 과학》등의 편집에 종사한 후, 프리랜서로서 영화 / 교육 / 대중문화 분야 평론을 해 왔다. 1973년부터 개인잡지인《영화사 연구》를 간행중.


  시스템적 재생산과 교육

  사토 : 쿄고쿠 씨는 대학교수이신데, 대학교수님들은 고등학교 선생님이나 중학교 선생님들 같은 교육자들과는 조금 성격이 다르게 느껴집니다. 순수학문 연구를 주로 하시고 거기에 교육이 수반된 형태이기에, 교육 쪽에 대해선 그다지 고민하지 않는다, 는 상대적으로 아마추어와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만...

  대학분쟁이 터졌을 때 '학생들 처우를 어떻게 해야 하나' 같은 예외에 속하는 문제만 고려하지 않는다면, "가르칠 것만 가르친다" 는 것이 대학교수님들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는데요. 교육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야만 한다는 견해는 어떤 점에서 비롯되는 것입니까? 전공이신 정치학적 관점에서 '바람직한 국민교육은 이래야만 한다.' 고 생각하시던데,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교육과의 격차가 크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 아니면 부실한 중고등학교 교육이 교수인 자신을 힘들게 한다. 는 구체적인 문제에서 비롯되는지, 그 점을 여쭤보고 싶습니다.

  쿄고쿠 : 공식적으론 대학은 학문연구와 교육의 장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교수평가의 주요소는 연구업적에 달려 있습니다. 인사고과는 연구업적에 의해 평가되고, 그에 걸맞은 연구논문에 담긴 성과가 채용과 승진을 결정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본래 연구자인 인간, 좋아하는 연구만 하면서 살고 싶어하는 인간이 생계를 위해 대학에 고용되면, 이젠 급료를 받기 위해 선생님의 역할을 겸업해야만 합니다. 수업의 대가로 급료가 지급된다는 것이 대학의 구조입니다. 본인은 연구자의 자세로 임하고 있다 해도 사회에서는 교사라는 측면에서 급료를 지급한다, 는 괴리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대학은 연구와 교육의 장" 이라는 말입니다.

  모든 대학교수는 연구자의 측면과 선생님의 측면, 두 가지 면모의 사이에서 애매하게, 때로는 엄숙하게 곤혹해 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급료를 위해서는 교사가 되어야 하고 수업 준비도 해야만 하지만, 너무 수업준비에 열중하고 학생들에게 밀착하다 보면 자신이 연구를 할 시간이 남아나지 않고,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도 알 수 없게 되어버리죠. 그리고 좋은 강의를 하는 좋은 교사가 된다고 해도 연구자로서의 업적평가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딜레마도 존재합니다.

  미국의 대학 같은 경우 표준화된 교과서와 교안이 있어서 누가 학생을 가르쳐도 비슷한 수업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시스템이 점점 발달해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시스템이 이루어진다면 교육의 측면에선 대학의 선생이든 소학교의 선생이든 비슷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뛰어난 연구자이든 아니든 수업에 임하는 데 지장을 받지 않는 형태가 되겠죠. 그러나 지금 우리들이 담당하는 과목에는 아직 그런 시스템이 구축되지 않았기에 연구와 교육이라는 딜레마 사이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부분만큼 교육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거지요.

  개인적으로 제가 교육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제 성격에 있습니다. 교사는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어야 할 수 있는 직업입니다. 나츠메 소세키夏目漱石가 한 명언처럼 "수박들이 늘어서 있다 생각하고 떠들면 된다. (학생들은) 수박이니까 그런 상대방에 대해선 일체 신경쓰지 않는다." 는 식의 타입도 있긴 하겠지만서도, 이야기를 듣는 상대가 인간적으로 신경쓰이는 타입도 있기 마련인데 이들은 여성적이고 모성적인 참견쟁이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라 생각합니다.

  본래 그러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교육적인 문제에 보다 깊은 흥미를 가지는 게 아닐까요.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학교에 남는 사람들은 사회로 나가서 총리대신總理大臣 / 육군대장陸軍大將이 되려는 사람들보단 얌전한 사람이 많고, 생물학적으로도 아버지라기보단 여성적이고 모성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겠습니까. 세상에 나가서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자. 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학교에 남아 연구자가 되는 사람들은 세상에 나가서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보단 교육적 내지는 교육지향적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 이유는 제 전공인 정치학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데,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사람이 모여 사는 조직 안에는 반드시 어떤 시스템이 구동됩니다. 그런 시스템은 기존 멤버들이 죽고 새로운 맴버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고 하더라도 영속적으로 유지되죠. 격변하지 않고서 안정성과 균형성을 유지하며 서서히 변화해 간다...

  그렇게 생각하니, 정치학상 기본문제의 일환으로써 그런 시스템적 재생산이 신경쓰이게 되었습니다. 정치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자동적으로 교육문제가 엮이게 되는 건, 민주주의와 평화주의가 정치체제의 원리로서 사회화 교육의 중심을 이룬다, 는 레벨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정치에 흥미를 가지고 이를 관찰해 보니, 시스템적 재생산의 일환인 프로세스의 의미에서 교육 문제로도 눈이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런 경우는 가장 광의의 의미에서의 교육이라고 하겠죠. 진학전쟁적인 의미에서의 학교 교육이라든지 지식과 기술을 전달한다는 의미가 아닌, 예의 / 예절 / 언어 / 감각 같은 문화의 재생산으로 이어지는 광의의 의미에서의 교육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시스템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시스템 재생산의 문제가 있고, 교육문제가 있습니다. 영화평론의 세계에도 분명히 그런 게 있을 겁니다. 새로운 감각, 새로운 견해가 되어 영화평론 자체가 진화해나가지 못한다면, 평론계의 문화와 양식은 결국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됩니다. "어떻게 후학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인가," 라는 문제는 늘 존재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교육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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