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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투 오다 군단》오다 노부나가가 벌인 전투들 (2) ┣ 激鬪 織田軍團 (完)



  이 글은 (舊)《歷史群像シリ-ズ 20 激鬪 織田軍團》책에 양면 접이식 도록으로 수록된《오다 노부나가 전투연표織田信長合戰年表》의 내용으로, 노부나가가 벌인 전투들을 중심으로 그의 생애를 정리한 글입니다. 필자는 (1991년 기준으로) 역사연구가이신 와키 후미토脇史人 씨입니다.


  아사쿠라 씨 정벌{겐키 원년(1570) 4월}

  겐키 원년(1569) 정월, 노부나가는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의 뜻을 받들어 키나이畿內 주변의 여러 다이묘들에게 입경을 명령했으나 에치젠越前 지방의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義景는 그 명령을 거부했다. 그러자 노부나가는 그를 토벌하기로 결의하고, 4월 20일 쿄토를 출발하여 오우미近江 지방 사카모토坂本를 거쳐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였다. 25일에는 에치젠 지방 츠루가敦賀에 군대를 집결시켜 그 다음 날이 되면 일거에 쳐들어갈 태세를 갖추었다.

카네가사키 퇴각전의 구도(출처 : 마나피디아)


  그러나 여기서 예상치 못한 사태가 발발했다. 매부인 오다니 성주小谷城主 아자이 나가마사浅井長政가 배반한 것이다. 노부나가는 처음에는 이 이변에 귀를 의심하였으나 사실을 확인하고선 즉각 병력을 철수시켜, 키노시타 히데요시木下秀吉를 후미부대殿軍로 잔류시킨 후 30일 밤중에 쿄토로 퇴각할 수 있었다.

  (주요 참전무장 : 아케치 미츠히데 / 가모 우지사토蒲生氏鄕 / 키노시타 히데요시 / 시바타 카츠이에 / 니와 나가히데 / 마에다 토시이에 / 모리 요시나리)


  아네가와 강 전투{겐키 원년(1570) 6월 28일}

  기후로 돌아간 노부나가는 아자이 나가마사를 토벌하기로 결의하고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원군을 얻어 6월 19일에 기후를 출진. 오우미 지방으로 출병했다. 반면, 나가마사도 아사쿠라 씨의 원군과 합류하기 위해 오다니 성에서 출진하여, 이로서 오다ㆍ토쿠가와 연합군과 아자이ㆍ아사쿠라 연합군이 아네가와 강姉川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였다.

군담물에 의거한 아네가와 강 전투 포진도(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오전 10시 경에 시작된 전투는 수 시간에 걸친 격전 끝에 우선 아사쿠라 군이 토쿠가와 군에 격파당하여 후퇴했고, 결국에는 아자이 군도 완전히 무너져 오다니로 패주하였다.

  (주요 참전무장 : 안도 모리나리 / 이케다 츠네오키 / 이코마 이에나가生駒家長 / 이나바 잇테츠 / 이노코 타카나리猪子高就 / 우지이에 보쿠젠 / 오다 노부카네 / 카와지리 히데타카 / 키노시타 히데요시 / 사이토 신고 / 사카이 마사히사 / 사쿠마 노부모리 / 삿사 나리마사 / 시바타 카츠이에 / 스가야 나가요리 / 니와 나가히데 / 하치야 요리타카 / 후와 미츠하루不破光治 / 마에다 토시이에 / 미즈노 노부모토水野信元 / 모리 요시나리 / 모리 히데요리 / 야나다 히로마사簗田広正)


  이세 나가시마 잇코잇키 공격{겐키 2년(1571) 5월} 
 
  작년(1570) 11월, 오와리 지방의 코키에 성小木江城을 지키던 노부나가의 동생, 오다 히코시치로 노부오키織田彦七郞信興가 이세 나가시마伊勢長島 잇코잇키의 공격을 받아 성이 함락되고 노부오키도 자살하는 사건이 터진 바 있었다.

  이 무렵, 이시야마 혼간사는 아자이 / 아사쿠라 양 가문, 그리고 요시아키 정권과 반목했던 미요시 3인중三好三人衆과도 손을 잡고 각지의 잇코종一向宗 신도들에게 거병할 것을 부추기는 중이었다. 동생이 살해당한 거나 마찬가지였던 노부나가는 5월 12일, 나가시마로 출병하여 자신은 오와리尾張 지방 츠시마津島에 진을 쳤다.

  16일, 노부나가 군은 세 방면에서 잇키의 거점인 간쇼사를 공격했으나 전황은 진전되지 않았기에 근변을 방화한 후 철병하려 하다가, 활과 조총을 발사하며 추격해 온 잇키 세력에 의해 시바타 카츠이에가 부상을 입고, 우지이에 보쿠젠을 위시한 수많은 전사자를 내면서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주요 참전무장 : 아사이 신파치浅井新八 / 안도 모리나리 / 이치바시 나가토시市橋長利 / 이나바 잇테츠 / 우지이에 보쿠젠(역주 : 잇키 세력의 추격을 받아 전사戰死) / 사쿠마 노부모리 / 시바타 카츠이에 / 츠카모토 코다이젠塚本小大膳 / 나카가와 시게마사 / 니와 나가히데 / 후와 미츠하루 / 마루모 나가테루丸毛長照}


  히에이 산 방화ㆍ토벌{겐키 2년(1571) 9월 12일}

  이 해 설날, 기후 성에서 제장들의 축하를 받은 노부나가는 연초의 포부로 히에이 산 엔랴쿠사比叡山延曆寺를 공략하는 것이 제 1의 목표라는 결의를 표명하였었다.

  이는 작년 9월, 미요시 3인중에 호응하여 오우미 남부로 침입해 온 아자이 / 아사쿠라 양 군이, 셋츠 지방의 노다ㆍ후쿠시마 성野田福島城을 공격하다 급히 회군해 온 노부나가 군과 맞닥뜨리자 히에이 산으로 도망쳐 들어갔고, 엔랴쿠사 측도 그들을 비호하며 노부나가의 복속요구를 거부한 데 대해 보복을 하려는 것이었다.

《에혼타이코키》에 수록된 히에이 산 토벌 삽화(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당일날 노부나가는 사쿠마 노부모리와 타케이 세키안武井夕庵의 간언을 물리치고, 사카모토에서 병사들을 올려보내 근본중당根本中堂을 위시하여 산노山王 21개사 등을 남김없이 태워버리고, 승려와 속인을 합하여 3 ~ 4천 명을 죽였다. 이 소탕전의 성공에 기분이 좋아진 노부나가는 연래의 울분을 풀었다, 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 사건이 가져온 충격은 커다란 것으로, 불교도들은 노부나가를 "부처님의 적仏敵" 이라 부르며 증오하게 되었다. 참고로 근년의 발굴조사에 의해 산 위의 건조물들은 겐키 2년(1571)보다 이전 시기에 이미 황폐해져 있었다는 게 밝혀졌으며 노부나가가 방화한 것이 아니었다. 는 견해가 등장했는데, 그렇다면 어째서 방화ㆍ토벌의 사실이 당시의 확실한 사료에 등장했는지가 심대한 의문으로 남는다.

  (주요 참전무장 : 아케치 미츠히데 / 이케다 츠네오키 / 사쿠마 노부모리 / 시바타 카츠이에 / 나카가와 시게마사 / 니와 나가히데)


  미카타가하라 전투{겐키 3년(1572) 12월 12일}

  카이의 타케다 신겐武田信玄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ㆍ혼간사ㆍ아자이ㆍ아사쿠라 등과 결탁하여, 서상작전西上作戰을 착착 진척시키고 있었다. 10월에 고후를 출발한 신겐은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영지인 토오토우미遠江 지방으로 노도같이 난입, 하마마츠 성浜松城에 급속히 육박할 기세를 보였다.

미카타가하라 전투 양군 포진도(출처 : 코토뱅크)

  노부나가는 이에야스의 구원요청을 받아들여 사쿠마 노부모리ㆍ히라테 히로히데(平手汎秀, 마사히데政秀의 손자) 등이 지휘하는 3천 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이렇게 해서 오다ㆍ토쿠가와 연합군이 미카타가하라三方ヶ原에서 신겐과 결전을 벌였으나, 참패를 당하고 이에야스는 간신히 목숨만 건져 하마마츠로 패주하였으며, 히라테 히로히데는 전사하고 말았다.

  {주요 참전무장 : 사쿠마 노부모리 / 타키가와 카즈마스 / 히라테 히로히데(平手汎秀, 역주 : 패주 도중 타케다 군에게 따라잡혀 전사戰死)}


  아시카가 요시아키 추방전{텐쇼 원년(1573) 3월 ~ 7월}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신겐이 대승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타도 노부나가의 기치를 선명히 했다. 우선 2월에는 요시아키의 명령을 받은 오우미 지방의 야마오카 카게토모山岡景友가 잇코종 신도들과 손을 잡고 이마카타다 성채今堅田砦를 구축, 反 노부나가 군을 일으켰다. 이 성채는 시바타 카츠이에들의 공격을 받아 순식간에 함락되어, 첫번째 불길은 별 어려움 없이 진화되었다.

  4월에 들어서 노부나가는 카미쿄上京를 방화하고 요시아키의 거처인 니죠 성二条城을 포위ㆍ고립시켰으나, 조정의 화평권고를 받아들여 서약서를 교환한 후 철병하였다.

  그러나 7월 3일, 요시아키는 측근인 미츠부치 후지히데三淵藤英에게 니죠 성을 지키게 한 후 자신은 우지 마키시마 성宇治槇島城에 농성하여 다시 거병하였다. 이에 이르러 노부나가는 9일에 입경하여 니죠 성을 우려빼고 즉각 성을 짓부순 후, 18일에는 드디어 마키시마 성을 함락시키고 요시아키를 추방함과 동시에 고작 2세였던 요시아키의 아들을 인질로 잡았다.

  이로써 무로마치 막부는 멸망당했다. 그리고 추방당하는 신세가 된 요시아키는 조정의 관직제도상으론 여전히 세이이타이쇼군 지위를 유지하면서, 타도 노부나가 / 막부 재건의 꿈을 쫓아 유랑생활을 보내게 된다.

  (주요 참전무장 : 아케치 미츠히데 / 아라키 무라시게荒木村重 / 안도 모리나리 / 이나바 잇테츠 / 우지이에 나오미치氏家直通 / 가모 카타히데 / 가모 우지사토 / 시바타 카츠이에 / 신도 카타모리進藤賢盛 / 니와 나가히데 / 사이토 신고 / 하시바 히데요시 / 하치야 요리타카 / 후와 미츠하루 / 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藤孝 / 마루모 나가테루 / 야마오카 쿄쿠린사이山岡玉林齋 / 야마자키 히데이에山崎秀家)


  아자이ㆍ아사쿠라 공략전{텐쇼 원년(1573) 8월}

  타케다 신겐의 죽음과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퇴거에 의해 노부나가의 당면한 적은 아자이ㆍ아사쿠라 두 가문이 되었다. 아시카가 막부를 멸망시키고 기후로 개선한 노부나가는 병마에게 휴식을 주지 않고 즉각 아자이 나가마사 정벌에 나섰다. 나가마사의 가신인 아츠지 아와지노카미阿閉淡路守가 노부나가 쪽으로 배반하면서, 고립된 오다니 성 공략이 용이해졌기 때문이었다.

  8월 8일 밤에 기후를 출진한 노부나가는 우선, 츠키노세 성月ケ瀬城을 함락시켰다. 이어서 아자이 씨 구원을 위해 오우미 지방으로 출병한 아사쿠라 군과 격전을 벌여, 13일에는 아사쿠라 군을 격퇴하고 패주하는 (아사쿠라) 요시카게義景를 추격하여 아사쿠라 가문의 무장들, 그리고 아사쿠라 밑에서 식객으로 있던 과거의 미노美濃 지방 다이묘 사이토 타츠오키斎藤龍興를 비롯한 3천 여 명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17일에는 키노메 고개木芽峠를 넘어 에치젠 지방으로 난입, 오다 군은 18일에는 파죽지세로 후츄府中까지 진출하였다. 이렇게 되자 요시카게는 거성인 이치죠다니를 버리고 오오노 군大野郡 야마다쇼山田庄의 켄쇼사賢松寺로 도망쳤으나, 결국 20일에 자살하였다.

오다니 성의 구역 분포도(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한편, 오다니 성은 오다 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어, 나가마사는 출격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27일, 에치젠 지방에서 회군한 노부나가는 즉각 오다니 성 공격에 착수하여, 전광석화같은 작전으로 다음 날에 성을 우려뺐다. 이로써 1개월도 안 되는 사이에 오우미 지방 북부와 에치젠 지방이 노부나가의 판도에 편입되게 된 것이다.

  (주요 참전무장 : 아케치 미츠히데 / 안도 모리나리 / 이나바 잇테츠 / 우지이에 나오미치 / 가모 우지사토 / 사쿠마 노부모리 / 시바타 카츠이에 / 신도 카타모리 / 다가 츠네노리多賀常則 / 타키가와 카즈마스 / 나가타 마사사다永田正貞 / 나가하라 시게야스永原重康 / 니와 나가히데 / 하시바 히데요시 / 하치야 요리타카 / 후와 미츠하루 / 마루모 나가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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