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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투 오다 군단》오다 노부나가가 벌인 전투들 (1) ┣ 激鬪 織田軍團 (完)



  이 글은 (舊)《歷史群像シリ-ズ 20 激鬪 織田軍團》책에 양면 접이식 도록으로 수록된《오다 노부나가 전투연표織田信長合戰年表》의 내용으로, 노부나가가 벌인 전투들을 중심으로 그의 생애를 정리한 글입니다. 필자는 (1991년 기준) 역사연구가이신 와키 후미토脇史人 씨입니다.


  첫 출진(텐분 16년=1547년. 연월 불분명)

  작년(1546)에 성인식을 마치고 14세가 된 (오다) 노부나가信長는 무샤하지메武者始를 치르기 위해 출진했다. 즉 첫 출진初陳을 벌이려는 것이었다.

  이 무렵 아버지 (오다) 노부히데信秀는 미카와三河 서부까지 진출해 있었기에, 이날 나고야 성那古野城을 출발한 노부나가는 스루가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 편이었던 키라 오오하마吉良大浜 성을 공격, 그 날은 야외에 진지를 치고 (그 곳에서 묵은 후) 다음 날에는 (나고야) 성으로 돌아갔다. 히라테 마사히데平手政秀가 후견역을 맡았다.


  오와리 지방 통일전{텐분 21년(1553년) ~ 에이로쿠 2년(1559년)}

  텐분 21년 3월, 아버지 노부히데가 별세하자 오와리 지방 내의 반 노부히데파 무장들이 거병하였다. 우선 그 해 4월 17일, 이마가와 요시모토와 내통한 나루미 성주鳴海城主 야마구치 노리츠구山口教継 부자와 아카츠카赤塚에서 격돌하였고, 8월 16일에는 카야즈萱津에서 슈고다이 가문守護代의 히칸被官인 사카이 다이젠坂井大膳을 격파하였다.

  텐분 23년(1555) 정월에는 장인인 사이토 도산斎藤道三에게서 응원군을 받아 이마가와 측에 속한 치다 군知多郡의 무라키 성村木城을 함락시켰고, 5월에는 숙부 마고사부로 노부미츠孫三郞信光와 짜고 슈고다이 가문의 거성居城인 키요스 성清洲城을 탈취, 거점을 나고야에서 그리로 옮겼다.

  코우지 2년(1556) 8월 22일, 동생이자 스에모리 성주末森城主인 (오다) 노부카츠(信勝, 노부유키信行라 많이 알려진)를 옹립한 나고야 성장城將 하야시 히데사다林秀貞 /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 등을 이노우하라稲生原에서 격파하였다.

  에이로쿠 원년(1558) 7월 12일에는 이와쿠라 성주岩倉城主였던 오다 노부카타織田信賢를 우키노浮野에서 격파했고, 11월 2일에는 동생 노부카츠를 키요스 성으로 불러들여 살해誘殺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인 에이로쿠 2년(1559)에 이와쿠라 성을 함락시킴으로써 오와리 지방을 거의 통일하게 되었다.


  오케하자마 전투{에이로쿠 3년(1560) 5월 19일}

  병사 1만 여명을 이끌고 오와리 지방으로 침입한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마츠다이라 모토야스松平元康를 선진으로 삼아 오다 측에 속한 성채인 와시즈鷲津 / 마루네丸根 등을 공격해 함락시키게 했고, 본인은 오케하자마 산桶狭間山에 본진을 구축했다.

  이마가와 군의 동정을 시시각각으로 보고받고 있던 노부나가는 19일 새벽, 우선 코우와카마이幸若舞인 '아츠모리敦盛' 춤을 추고 갑주를 입은 후, 선 채로 아침식사를 하고 투구를 쓰고서 키요스 성을 출진했다. 말을 몰아 일거에 아츠다熱田까지 달려간 노부나가를 수행한 시동은 고작 5명, 거기에 잡병 200명 정도가 뒤를 따르고 있었다.

  드디어 나카지마 성채中島砦에 입성하여 약 2천 명이 되는 전군의 태세를 가다듬었다. 성채를 출발한 노부나가는 오후 2시 무렵, 호우豪雨가 그치는 것을 확인한 후 오케하자마 산에 있는 이마가와 군에 공격을 시도했다. 이마가와 군은 일거에 무너졌고, 핫토리 코헤이타服部小平太에게 무릎을 베여 쓰러진 요시모토의 목을 모리 신스케 요시카츠毛利新助良勝가 잘랐다. 노부나가는 선두에 선 자에게 요시모토의 수급을 들게 하고 키요스 성으로 개선했다. 이 때 벤 적의 수급은 약 3천 개에 달했다.

  {주요 참전무장 : 이케다 츠네오키池田恒興 / 이와무로 나가토노카미岩室長門守 / 오다 히데토시(織田秀敏, 역주 : 와시즈 성채에서 전사戰死) / 카나모리 나가치카金森長近 / 카와지리 히데타카河尻秀隆 / 키노시타 우타노스케木下雅楽助 / 사쿠마 다이가쿠(佐久間大学, 역주 : 마루네 성채에서 전사戰死) / 삿사 나리마사佐佐成政 / 삿사 하야토노쇼(佐佐隼人正, 역주 : 이마가와 군에 돌격하여 전사戰死) / 사와키 토하치佐脇藤八 / 하세가와 쿄스케長谷川橋介 / 하야시 히데사다林秀貞 /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 / 모리 히데요리毛利秀賴 / 모리 요시나리森可成}


  미노 지방 공략전{에이로쿠 4년(1561) ~ 에이로쿠 10년(1567)}

  코우지 2년(1556) 4월, 사이토 도산이 그 아들인 요시타츠義龍에게 멸망당한 결과 오다ㆍ사이토의 동맹은 파기되었고, 요시타츠는 도산의 노선에서 전환하여 오와리 영내의 반 노부나가 분자들과 결탁, 대결할 의사를 선명히 했다.

  에이로쿠 4년(1561), (노부나가는) 마츠다이라 모토야스와 화친和睦ㆍ동맹을 체결하여 동쪽으로부터의 위협을 제거한 후, 그 해 5월 13일에 미노 지방으로 출진하여 다음 날에는 모리베森部 전투에서 사이토 군을 격파하고 적 측의 성채였던 스노마타墨俣를 탈취하여 그곳에 머물렀다.

  이후 6년에 걸친 미노 지방 공략전이 개시되어, 나중에는 본거지를 키요스에서 코마키 산小牧山으로 옮겨 미노 공략의 거점으로 삼은 후, 미노 서부 쪽에서 침입하던 데서 미노 동부 공략작전을 벌이는 쪽으로 전환하였다.

  에이로쿠 7년(1564) 8월, 우누마鵜沼 / 사루하미猿啄 두 성을 함락시켰고, 다음 해(1565) 7월에는 카지타加治田의 사토 키이노카미佐藤紀伊守를 내통시켜 8월에는 노부나가 스스로가 미노로 들어가 나가이 미치토시長井道利의 공격을 격퇴하고 도호라 성堂洞城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에이로쿠 9년(1566) 8월, (군대를 이끌고) 키소 강木曽川을 건넌 노부나가는, 사이토 타츠오키斎藤龍興에게 격퇴당하여 퇴각하다가 수많은 익사자를 내는 대패를 당했다. 그러나 사이토 씨를 버린 소위 '미노 3인중美濃三人衆' 의 내통에 힘입어 노부나가는 에이로쿠 10년(1567) 9월, 이나바 산성稲葉山城을 급습하여 이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미노 평정의 숙원을 달성, 거점을 이나바 산으로 옮겨 기후岐阜라 개칭했다.

  (주요 참전무장 : 이케다 츠네오키 / 카와지리 히데타카 / 키노시타 히데요시木下秀吉 / 삿사 나리마사 /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 / 시마다 히데미츠島田秀滿 / 타키가와 카즈마스滝川一益 /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 / 마에다 토시이에 / 무라이 사다카츠村井貞勝)


  입경 작전{에이로쿠 11년(1568) 9월 ~ 10월}

  작년에 미노 지방을 병합한 노부나가는 생산력이 높은 노우비 평야濃尾平野의 풍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드디어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를 옹립하여 입경하게 된다. 우선 그 배후를 튼튼히 하기 위해 에이로쿠 11년(1568) 2월에 이세 북부를 공략하여 지배하에 두었다.

  그리고 7월 25일에는 에치젠 이치죠다니越前一乗谷에 있던 요시아키를 미노 릿세이사美濃立政寺에 맞아들여, 9월 7일에는 약 6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출진하였다. 당초 노부나가는 평화리에 입경을 감행할 생각이었으나 오우미近江 지방의 롯카쿠 죠테이六角承禎가 입경로를 차단하였기에, 실력에 의한 입경작전을 벌이게 되었다.

  침입한 오다 군은 순식간에 롯카쿠 씨에 속한 성들을 함락시켜 롯카쿠 죠테이 부자는 이가伊賀 지방으로 패주했고, 오우미 지방은 싱겁게 노부나가의 지배하에 들어왔다. 그리고 9월 26일에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입경시키는 데 성공한 이후 즉각 야마시로山城 / 셋츠摂津 / 카와치河內 지방에 군대를 파견, 쿄토 주변에 있는 여러 지방을 지배하에 편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10월 18일, 요시아키가 조정으로부터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으로 임명되자, 쿄토에 사쿠마 노부모리 / 니와 나가히데 / 키노시타 히데요시 등을 잔류시키고 기후로 귀성하였다.

  (주요 참전무장 :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 / 안도 모리나리安藤守就 / 이나바 잇테츠稲葉一鉄 / 우지이에 보쿠젠氏家卜全 / 키노시타 히데요시 / 사카이 마사히사坂井政尙 /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信盛 / 시바타 카츠이에 / 시마다 히데미츠 / 나카가와 시게마사中川重政 / 니와 나가히데 / 하치야 요리타카蜂屋賴隆 / 하라다 나오마사原田直政 / 무라이 사다카츠 / 모리 요시나리)  


  이세 지방 평정전{에이로쿠 12년(1569) 8월 ~ 10월}

  에이로쿠 12년(1569) 5월, 이세 지방의 코즈쿠리 토모마사木造具政가 코쿠시 키타바타케 씨에게 반기를 들고 노부나가에게 내통한 것을 기화로 8월 20일, (노부나가는) 약 10만 병력을 이끌고 기후를 출진, 28일에는 키타바타케 씨의 거성居城인 오오코치 성大河內城을 포위했다. 그 사이에, 선진을 맡은 키노시타 히데요시는 아사카 성阿坂城을 함락시켰다. 

  8월 28일, 비가 쏟아지면서 아군의 조총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한 바람에 강건한 무사들이 많이 전사하는 패배를 겪기도 했으나, 10월 3일에 이르러 키타바타케 토모노리北畠具教 / 토모후사具房 부자가 성문을 열고 화친을 요청하였기에, 이를 허락하고 노부나가의 차남 챠센마루茶筅丸를 그 양아들로 삼게 했다. 이로써 이세 지방은 (노부나가의) 지배하에 편입되었다.

  (주요 참전무장 : 안도 모리나리 / 이나바 잇테츠 / 우지이에 보쿠젠 / 오다 노부카네織田信包 / 카와지리 히데타카 / 가모 카타히데蒲生賢秀 / 키노시타 히데요시 / 사이토 신고斎藤新五 / 사카이 마사히사 / 사쿠마 노부모리 / 삿사 나리마사 / 시바타 카츠이에 / 스가야 나가요리菅屋長頼 / 타키가와 카즈마스 / 니와 나가히데 / 하치야 요리타카 / 마에다 토시이에 / 모리 요시나리 / 모리 히데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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