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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소동》대마도의 조일 국서위조 관례를 폭로 - 야나가와 잇켄 (完) 역사



  본 글은 2005년 3월, 일본출판사 츄오코론신샤中央公論新社에서 신서본新書本으로 간행한 후쿠다 치즈루福田千鶴 큐슈대학 교수님의 저서《집안 소동 - 다이묘 가문을 뒤흔들었던 권력투쟁》(中公新書 1788) 제 2장 <주군을 폐립하는 종신從臣들> 에 수록된【 야나가와 잇켄 】부분(p. 75 ~ 85)을 번역한 것입니다.


  (4) 능력인가, 아니면 전통적 혈맥家筋인가.

  당시 에도에 머무르고 있던 (54만 석의 히고 쿠마모토 번주肥後熊本藩主) 호소카와 타다토시細川忠利가 쿄토에서 눈병을 치료하고 있던 아버지 호소카와 산사이(細川三斎, 타다오키忠興)에게 보낸 (심리 전날인) 3월 10일자 편지는 사건의 문제점을 간결히 지적하고 있다.(《호소카와 가문 사료 12 - 796호》)

【 소우 요시나리宗義成와 야나가와 시게오키調興의 소송이 벌어지고 있습니다만, 그 내역에 따르면 코우라이(高麗, 조선朝鮮)에서 온 문서, 그리고 쇼군 님께서 코우라이로 보낸 문서까지도 대대로 쓰시마노카미가 개작하고 고코쿠인(御黒印, 역주 : 먹물을 묻혀 찍는 도장)까지 위조하여 쌍방에 전달해주었다, 고 합니다. 이대로 처벌을 받으리라 생각되는데 재미있는 건, 옛날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尊氏 시대부터 타이코 님太閤樣, 그리고 당대(토쿠가와 시대)에 이르는 동안 위와 같은 작업을 끊임없이 해왔다는 것입니다. 세부 내역을 밝히기 위해 갖가지 취조가 행해지는 중인데, 사태가 악화될 경우 두 사람에게 죄과를 매기는 것으로 끝나면 다행이지만, 이 문제로 조선과의 관계가 틀어지기라도 한다면 일본에서 또다시 조선으로 출병하게 될지도 모르기에 중대한 결단이 되리라고 (쇼군 이에미츠가) 생각하고 계시다. 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

  요약하자면, 소우 씨宗氏는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으로 인해 단절된 국교를 회복하기 위하여 조선 측이 요구하는 대로《국서囯書》를 작성해주었고, 그 답장으로 보내진 조선 측의《국서》를 이번에는 일본에 유리하게 개작하였다. 그 일련의 경위를 야나가와 씨가 폭로한 것이다.

  요시나리는 "이는 선대 (당주) 시절, 그리고 본인이 어렸을 때 벌어진 일로, 전혀 모르고 있었다." 면서 어딘가의 정치인이 할 법한 답변만을 반복했다. 그리고, "실제로 이와 같은 일이 벌어졌다면, 이는 쓰시마 섬에서 사무를 담당하던 야나가와 씨의 가신들과 그들의 일파인 외교승들이 벌인 일로, 잘못은 야나가와 씨에게 있다." 며 뻔뻔하게 받아쳤다.

  이에 맞서 시게오키는 호소카와 타다토시의 편지에도 나오는 것처럼 "중세 이래 소우 씨는 대대로 국서위조를 행해 왔고, 본인은 명령받은 대로 따랐을 뿐" 이라고 하며, 책임을 소우 씨 측에 떠넘겼다. 그리고 결국 야나가와 일파가 처벌받고, 소우 씨의 주장이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시게오키가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던 건, 자신이 수도서인受圖書人이었기에 소우 씨가 갖고 있는 외교루트가 단절된다 해도, 자기가 가진 루트를 이용하여 조선과의 외교를 지속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거기에서 조금 더 추측을 해보면, 자신이 가지고 있던 막각幕閣 내의 인맥들과 본인 스스로의 능력器量을 믿고 도박을 했던 게 아니었을까 한다.

  칸에이 시대에 타쿠앙(沢庵, 역주 : 에도 시대의 승려. 요즘엔 '단무지' 를 발명한 인물로서 더 유명하다)이 시게오키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 있는데, 배梨를 담은 광주리와 차를 선물로 받은 데 대해 감사를 표하며, "귀하께서 한가한 때라도 암자로 찾아오셔서, 하루 내내 대화를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하며 시게오키의 내방을 고대하는 내용이다. 계층을 초월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열렬한 귀의를 받았던 타쿠앙과 시게오키는 평소부터 친교를 맺고 있었고, 타쿠앙이 "하루 내내 마음껏 대화를 나누었으면 좋겠다" 고 편지에 쓸 정도로 마음을 허락받은 존재였다는 것을 알 수 있어, 그가 가진 문화인으로서의 역량을 확인할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이다.

  한편 겐나 3년(1617)에 조선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온 이경직李景稷은 통신사 일행을 영접하였던 요시나리(당시 14세)와 시게오키(당시 15세)를 관찰하면서, "시게오키는 대단히 영리하고 민첩한 데 비해 요시나리는 우둔하고 매사에 기력이 없다." (《부상록扶桑錄》) 고 평가하였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칸에이 원년(1624)에 일본으로 찾아온 강홍중姜弘重도 "(이경직의) 그 평가가 정말로 적확하였다." 고 두 사람을 논한 바 있다.(《고쳐 쓰여진 국서》) 그 정도로 두 사람의 능력차이란 건, 누가 봐도 역력했던 것이다.

  국가를 상대로 국서위조라는 중죄를 저지른 것이 발각되었던 만큼, 막부는 쌍방을 같이 처벌하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부는 전통적인 혈맥을 존중하는 자세를 보이며, 소우 가문을 다이묘大名로서 존속시켰다. 그 배후에는 '조선과의 외교를 계속하기 위해선 둘 중에 하나의 루트는 남겨놓아야' 했던 특수한 요인이 존재했던 것도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면 이에미츠의 시대가 된 이후의 태평함을 축하받기 위한, 조선통신사 내방이 다음 해인 칸에이 13년(1636)에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소우 요시나리에게는 이 일이 시련의 무대였다. 그러나 무사히 조선통신사 접대역을 완수한 요시나리는, 조선과의 외교를 소우 집안의 "가문의 소임家役" 으로 정착시킴으로써 중세로부터 이어진 대마도 당주로서 전통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야나가와 잇켄은 막부가 전통화를 지향하며, 질서를 중시하는 쪽으로 전환하는 모습으로 돌아서는 맹아萌芽가 이 무렵부터 존재했다는 것을 엿보게 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덧글

  • 라라 2017/06/18 13:24 # 답글

    외교문서 위조로 막부의 조선 침략이라...조선도 저런 걸 알고 있었겠지요?
  • 3인칭관찰자 2017/06/18 16:08 #

    1609년 기유약조 체결되던 시점에 이미 조선은 막부가 보내왔다고 하는 국서가 위조된 문서인 걸 알고 있었습니다.(대마도에서 국서를 날조한 것까지 알았는지는 의문스럽지만요. )

    임란 이후 피폐해진 조선으로선 긁어부스럼 만들기 싫었기에 알면서 국서위조를 눈감아준거죠.
  • Hyth 2017/06/18 16:02 # 답글

    야나가와쪽에서 히데타다가 오고쇼로 있을때 일처리를 끝낼수 있도록 여러 경로로 '노력'을 했으면 결과가 달랐을거 같기도 합니다. 그 사이 시간이 지나면서 막부가 세워진지 한 세대(30년)가 지났으니 안정화와 보수성향 추구는 당연한 수순이라 시간을 끈게 대마도주(소우씨)측에게 유리하게 흘러간거 같기도...
  • 3인칭관찰자 2017/06/18 19:30 #

    말씀대로 야나가와 시게오키 쪽에선 가능한 한 승부를 서둘렀어야 승산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이에야스에서 히데타다, 히데타다에서 이에미츠로 가면서 성리학이념보급과 함께 갈수록 주군이란 존재가 범접하기 힘든위치가 되어갔죠.

    그리고 이에미츠가 야나가와 사건 전후에 내린 집안소동(쿠로다, 가모) 판결도 번주 쪽을 편들고 번주 등의 상급자와 대립한 가신을 처벌한 것이었거든요.(쿠키 쪽은 후계자 상속다툼이네요. 착각을....)
  • 남중생 2017/06/18 20:58 # 답글

    어딘가의 정치인이 할 법한 답변ㅋㅋㅋㅋㅋㅋㅋㅋ
  • 3인칭관찰자 2017/06/18 21:44 #

    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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