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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소동》대마도의 조일 국서위조 관례를 폭로 - 야나가와 잇켄 (2) 역사



  본 글은 2005년 3월, 일본출판사 츄오코론신샤中央公論新社에서 신서본新書本으로 간행한 후쿠다 치즈루福田千鶴 큐슈대학 교수님의 저서《집안 소동御家騒動 - 다이묘 가문을 뒤흔들었던 권력투쟁》(中公新書 1788) 제 2장 <주군을 폐립하는 종신들> 에 수록된【 야나가와 잇켄 】부분(p. 75 ~ 85)을 번역한 것입니다.


  (2) 야나가와 씨의 독립운동

  케이죠 10년(1605)에 (야나가와) 시게노부調信, 케이죠 18년(1613)에 (야나가와) 토모나가智永가 세상을 떠나면서 뒤를 이은 자가 바로 야나가와 잇켄을 일으킨 (야나가와) 시게오키調興였다. 그는 케이죠 8년(1603)에 에도江戸에서 태어나, 이후 쭉 에도에서 거주하다 가문을 이은 다음 해(1614)에는 슨푸로 가서 (토쿠가와) 이에야스家康의 시동이 되었고, 이에야스가 별세한 후에는 에도로 와서 (토쿠가와) 히데타다秀忠를 섬겼다. 쓰시마 섬對馬島을 벗어날 수 없었던 소우 씨宗氏를 대신하여 '쇼군 권력公儀' 을 상대로 절충역할을 담당하면서, 막부 내부에 독자적인 인맥을 구축하였다.

  한편으로 소우 씨도 겐나 원년(1615)에 소우 요시토시宗義智가 죽고, 당시 12세였던 소우 요시나리宗義成가 가문을 상속했다. 요시나리는 케이죠 9년(1604) 출생이므로 시게오키와는 1살 차이가 난다. 훗날 시게오키가 요시나리의 여동생(미야히메宮姬) 에게 장가들면서 두 사람은 처남ㆍ매부 관계가 되었다.

  소동 그 자체의 발단은 칸에이 3년(1626), 히젠 영지에서 가봉받은 1천 석에 대해 소우 씨와 별개의 '증명서御朱印' 를 발급해달라고 시게오키가 막부에 요청한 게 계기였다. 칸에이 2년(1625) 7월 ~ 12월에 걸쳐 오오고쇼大御所 히데타다는 후다이 다이묘譜代大名들과 하타모토旗本들을 상대로 그들에게 할당하였던 영지를 보증하는 '보증서判物''증명서' 를 발급하였는데, 여기에서 누락된 야나가와 씨가 "히젠 영지 중 1천 석은 쇼군 가문으로부터 직접 하사받은 것" 이라고 주장하며 그에 대한 승인을 요망한 것이다. 칸에이 12년(1635)에 심리가 벌어진 장소에서도 이 문제가 재연되어, 야나가와 씨는 "그 땅이 이에야스에게 하사받은 땅" 이라고 주장하고, 소우 씨 측은 "막부의 로쥬老中 혼다 마사즈미本多正純가 내린 지시를 따른 것이며, 그것도 주군 요시토시의 알선에 따른 것" 이었다고 반론하였다.

  칸에이 3년(1626) 단계에서는 '흑의의 재상黑衣の宰相' 이라 불리며 이에야스의 측근으로 일했던 콘치인 스우덴金地院崇伝과, 막부의 회계역인 마츠다이라 우에몬다유 마사츠나松平右衛門大夫正綱 / 이타미 하리마노카미 야스카츠伊丹播磨守康勝 등의 의견에 따라 군신君臣 간의 도리를 세워주기로 결정되었다. 본 영지에 있던 가신 일동은 에도에 있던 요시나리에게 시게오키 건이 "영주님의 의도대로" 처리된 '축의御祝儀' 로서 술안주를 보내었다.(《日帳》)

  그 해 1월 13일에는 화해가 이루어졌다고 하여 요시나리가 야나가와의 저택에 "행차" 하게 되었다. 이 때 동행한 멤버가 콘치인 스우덴 / 이타미 야스카츠 / 마츠다이라 마사츠나 / 호리 시키부 나오유키(堀式部直之, 츠카이반使番 신분) / 하나부사 우마노스케 마사요시(花房右馬助正榮, 츠카이반 신분)들로, 그들 전원이 막부의 측근들이었다. 그리고 같은 달 25일에 요시나리는 시게오키에게 조선인삼 두 근과 금란초 세 묶음을 보내었다. 이는 에도로 참근할 때 쓰시마 쪽에서 지참하여 언제나 보내주던 선물들이었으나, 영지문제가 난항을 겪고 시게오키와의 관계가 악화되었기에 증정되지 못하고 있던 것들이었다. 이러한 소우 씨 측의 회유책에 화답하여 시게오키도 4월, 요시나리가 저택 공사를 한다는 것을 듣고서 사신을 보내 금전 5백 냥을 헌상했다. 요시나리는 이 중에 백 냥만을 받고 4백 냥을 돌려보냈으나, 다음 날에는 시게오키가 직접 찾아가 남은 4백 냥을 진상하려 했기에 요시나리도 이번에는 모두 받아 챙겼다.(《日帳》)

  이렇게 관계가 복원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시게오키는 이 무렵부터 이름을 '시키잔式山' 으로 개명했다. 요시나리의 할아버지인 (소우) 사누키노카미 요시시게讃岐守義調 시대에 시게오키의 할아버지인 (야나가와) 시모츠케 시게노부下野調信가 '시게調' 자 사용을 허용받아 이름을 고친 이후 야나가와 씨는 대대로 '調' 자가 들어간 이름을 칭했는데, 이를 주군의 허락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사용 중단해버린 것이다. 여기에는 소우 씨도 신경이 날카로워진 듯, 칸에이 12년(1635)에 심리가 벌어진 장소에서 이름을 시키잔으로 고친 데 대해 "정말로 제멋대로이다." 며 규탄하였다. 동시에 선박에 그리는 문양船印에 대해서도, "야나가와 씨가 소우 씨의 문양을 사용하지 않고 '후타츠아타마二つ頭에 미기토모에右巴' 라는 독자적인 문양을 사용했다." 고 규탄하고 있다.(《야나가와 시게오키 송사 기록 下》) 이 두 사건은 야나가와 씨가 소우 씨로부터 독립된 존재라는 것을 가시적으로 세상에 드러내보이기 위한 행위라고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칸에이 8년(1631) 2월 10일, 시게오키는 사자를 보내 소우 씨로부터 지급받고 있던 '영지知行''조선으로 건너가는 선박들의 송사를 담당하는' 지위를 반납하겠다고 청하였다. 이는 지금까지의 연구가 지적하던 대로 "야나가와 씨가 소우 씨와의 주종관계를 완전히 해소시킨 후, 막부에 직속한다" 는 걸 의도한 것으로, 말하자면 이중적 주종관계를 청산하려 한 것이다.

  이에 맞서 요시나리는 다음날 시게오키에게 사자를 파견, 할아버지와 아버지 대 이래 총애를 베풀어 쓰시마 내외에서 대리인으로 임명되어 왔으며, 지난 번의 '증명서 시비' 때도 높으신 분들이 조정하시어 "이전과 같이 군신 간의 도리를 세워라." 는 명령이 내려졌으니만큼, 마음을 돌려 계속 봉공을 하라고 설득하였다.(《야나가와 시게오키 송사 기록 中》)

  이 시기에 야나가와 씨가 독립운동을 다시 도모한 요인은 칸에이 6년(1629), 소우 씨의 외교를 담당하던 선승 키하쿠 겐보規伯玄方가 막부의 정식명령을 받아 (막부의) 사절이 조선의 수도 한성(漢城, 서울)으로 상경할 수 있도록 성사시킨 게 컸다.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한 이후 일본인이 한반도 내륙으로 들어가는 걸 계속 거부당해왔었던 만큼, 이번 상경사절의 성공은 막부ㆍ조선 쌍방에 있어서 소우 씨가 갖고 있던 중요한 포지션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타시로 카즈이 씨는 "이 사건이 소우 씨의 위엄을 높이고, 반대로 야나가와 씨에겐 초조감을 일으켰다." 고 지적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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