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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소동》대마도의 조일 국서위조 관례를 폭로 - 야나가와 잇켄 (1) 역사



  본 글은 2005년 3월, 일본출판사 츄오코론신샤中央公論新社에서 신서본新書本으로 간행한 후쿠다 치즈루福田千鶴 큐슈대학 교수님의 저서《집안 소동御家騒動 - 다이묘 가문을 뒤흔들었던 권력투쟁》(中公新書 1788) 제 2장 <주군을 폐립하는 종신들> 에 수록된【 야나가와 잇켄 】부분(p. 75 ~ 85)을 번역한 것입니다.


  칸에이 12년(1635)에 막부의 심리를 받아 결착이 난 야나가와 잇켄은, 쓰시마(대마도) 소우 가문對馬宗家의 중신인 야나가와 시게오키興가 對 조선외교에서 국서위조가 행해져 온 사실을 막부에 호소함으로써 주군인 소우 요시나리宗義成를 몰락시키고, 본인은 막부의 하타모토旗本가 되기 위해 청원한 사건이다. 요즘 말로 하자면 '내부고발' 로, 이는 막부에게도 그야말로 천지를 진동시킬 만한 일대 국제사건이었다. 그 경위는 타시로 카즈이田代和生 씨가 집필하신《고쳐 쓰여진 국서》(츄코신쇼中公新書) 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후의 기술도 위 책에 기반한 내용이 많다는 것을 미리 알려드리고 싶다.  


  (1) 야나가와 씨의 득세

  쓰시마 섬은 한반도朝鮮半島와 큐슈九州의 중간에 위치한 외로운 섬인데, 엄밀히 말하자면 한반도 쪽과 더 가깝다. 필자가 조사차 쓰시마 섬에 찾아갔을 때, 그 지방 분께서 "옛날에는 해안가 저편으로 한반도가 아름답게 보이기도 했습니다만, 최근에는 공기가 탁해진 탓인지 그닥 보이지 않게 되었지요." 라고 말씀하신 걸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다. 이 섬의 대부분은 깎아지른 산지로 이루어져 있기에 경작하기에는 정말로 부적합한 땅이라, 섬 주민들은 옛날부터 조선과의 교역을 통해 생계를 꾸려 나갔다.

  14세기로 접어들자 왜구倭寇가 활발히 동아시아 세계를 위협하였다. 한반도의 이씨 조선李朝 정부는 왜구 단속을 쓰시마 소우 씨에게 의뢰하였고, 그 반대급부로 무역상의 특권을 소우 씨에게 인정해주면서 아시카가 쇼군足利將軍 / 센고쿠다이묘戰國大名들과는 다른 독자적인 교류를 조선과의 사이에 벌일 수 있었다.

  그러나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분로쿠 원년(1592)에 조선으로 출병하면서, 조일관계日朝關係는 단절되었다. 이는 쓰시마 도민들에게는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대마도주 소우 요시토시宗義智는 하루라도 빨리 강화를 성립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히데요시는 분로쿠 4년(1595), 사츠마薩摩 지방 이즈미 군出水郡에서 1만 석을 주어 통교가 단절된 데 따른 보상을 하였다. 그리고 히데요시가 죽은 후인 케이죠 4년(1599)에는 보다 쓰시마에 가까운 히젠肥前 기이基肄 / 야부 군養父郡 내 1만 석으로 영지가 교체되었다. 그 가운데 1천 석은 (토쿠가와德川) 이에야스家康의 지시에 따라 중신인 야나가와 시게노부(柳川調信, 역주 : 임진왜란 관련 조선 문헌에 평조신平調信이라 불리며 자주 등장함)에게 주어졌고, 시게노부가 이 지방의 대관을 겸하게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소우 씨는 서군에 가담했으면서도 야나가와 시게노부의 활약에 힘입어 본 영지와 히젠의 영지를 모두 보장받았다. 케이죠 10년(1605)에는 조선과의 국교회복에 성공한 공적으로 히젠 영지에다 2천 8백 석을 (이에야스에게) 가봉받았고, 그 가운데 1천 석이 시게노부에게 주어졌다. 케이죠 14년(1609)에는 조선과 기유약조己酉約條를 체결하여, 전쟁 전보다 상당히 제약을 받은 내용이기는 해도 소우 씨는 조선과의 무역권을 회복할 수 있었다.

  앞에서 언급한 일련의 경위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게 야나가와 시게노부 / 토모나가智永 부자였다.《소우시카후랴쿠宗氏家譜略》에 실린 <야나가와 씨 가계도> 에 따르면, 야나가와 출신인 시키부式部 / 진자부로甚三郞 형제가 쓰시마 섬으로 건너와 둘이 함께 쓰시마 14대 당주 소우 마사모리宗將盛의 동생인 츠나 시게치카津奈調親를 섬겼고, 이윽고 형인 시키부(시게나가調長)가 츠나의 양자가 되면서, 아버지와 조상들의 출신지인 야나가와 (묘지苗字) 를 자처하게 되었다. 진자부로는 시게치카의 딸과 결혼하여 형과 마찬가지로 야나가와 씨라 불리면서 텐쇼 5년(1577)에는 쓰시마 이나 군의 주인인 소우 시게쿠니宗調国의 영지를 물려받은 후, 당주 지위에 오른 소우 요시시게宗義調로부터 일자배령을 받아 야나가와 시게노부라 불렸다. 텐쇼 15년(1587)에 히데요시가 큐슈를 평정하였을 때 카미가타上方의 사정에 정통했던 시게노부가 소우 씨의 사신으로 발탁받아 파견되면서, 가로家老 대우를 받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소우 씨 (휘하)의 중세 이래의 전통적 무사단 속에서 야나가와 씨는 명백한 신참으로, 조선출병을 전후한 동란 중에 요시시게가 발탁한, 측근出頭人적 성격을 짙게 띠던 인물이었다. 특히 텐쇼 16년(1588)에 요시시게가 (병으로) 죽은 후에는, 뒤를 이은 젊은 주군 요시토시(당시 21세)를 떠받치며 다이묘로서의 소우 가문을 유지하고 존속시켰다. 시게노부 자신은 소우 씨의 먼 친척에 지나지 않았으나, 실력으로 보면 류조지 씨龍造寺氏를 떠받치던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에 견줄 만한 인물이었다 하겠다.

  그리고 외교면에서도 독자적인 루트를 소유하여, 시게노부는 텐쇼 7년(1579)에 수직인(受職人, 조선의 관직을 하사받아 해로로 사신을 파견하면서 교역하는 걸 허가받은 사람)이 되었고, 그 아들인 토모나가도 기유약조 체결 당시 수직인 지위를 얻었다. 2년 후엔 야나가와 씨가 에도에 머무르는 일이 잦다는 이유로 조선 측으로부터 도서(圖書, 통행증에 찍는 동판)를 부여받아 수도서인(受圖書人, 수직인보다 격이 높으며, 대리인 파견을 할 수 있다)으로 격상된 걸 본다면, 조선 측에서도 막부와 가까웠던 야나가와 씨를 중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야나가와 씨는 섬 내부의 지배권에만 머무르지 않고, 조선과의 교섭에서도 주군인 소우 씨로부터 독립된 사절을 파견하고 무역을 행할 수 있는 실력자로서 세력을 뻗어가는 중이었다.



덧글

  • Hyth 2017/06/15 16:52 # 답글

    전 이게 일종의 쿠데타였는데 결국 실패했던걸로 기억하는 수준이고 상세한 과정은 잘 몰라서(...) 이번글도 잘 읽겠습니다 ㅎㅎ
  • 3인칭관찰자 2017/06/15 19:59 #

    막부에게 접근해서 주군 가문을 카이에키시키고 대 조선외교에서 자기 지분을 챙기려 했으니, 무력을 동원한 정변은 아니라 해도 주군 가문에 대한 반역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 라라 2017/06/17 00:22 # 답글

    고려말 왜구들 침략 기록이 일본 측에도 남아있는지요? 어디 영주가 군사 몇천 동원 고려 어디 공격했다같은
  • 3인칭관찰자 2017/06/17 14:42 #

    그 정도 구체적으로 기록한 문헌은 드물고, 윗대가리가총대멘 게 기록된 경우는 더욱 드물지만 대마도, 이키 섬, 히젠 지방의 마츠라 일당 등은 왜구활동을 한 게 확실합니다.

    그 외에는 일본 남북조시대 당시 열세에 놓여 있던 큐슈의 남조측 세력이 조직적으로 왜구활동을 했다. 그들은 단순한 도적이 아니라 도적으로 가장한 정규군이었다... 는 설은 들은 적 있습니다.
  • 라라 2017/06/17 20:15 #

    설만 있고 기록은 없는게 신기하네요.

    기록광이라면서 저런 건 기록을 안 하다니.
  • 3인칭관찰자 2017/06/17 20:54 #

    기존 질서가 흔들려서 부하들이나 아랫사람들 제어가 힘들던 동란기에 왜구들이 가장 활개를 쳤던 것도 한몫하고, 정규군을 동원한 당당한 싸움이 아니라 애초부터 해적활동과 노략질이 주를 이룬 비정규전이었기 때문에 일본 입장에서도 자랑스럽게 기록으로 남길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겠죠.

    (같은 댓글이 2개 달려있어서 1개는 삭제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 라라 2017/06/17 21:10 #

    1.호...의외로 일본인들도 체면에 신경 쓴 모양이군요.
    역사 기록은 없더라도 지역사나 설화에도 없나요?

    2. 고려에 대규모 왜구 침략 기록에 대해 일본 측 입장은 몬가요? 설마 조작이라 하고 부인하고 있나요?
  • 3인칭관찰자 2017/06/17 21:32 #

    1. 거기까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2. 왜구활동을 인정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단지 한국인 입장에서 거슬릴 만한 "원나라와 고려가 일본을 침략했기에 침략당한 사람들이 복수하기 위해 왜구가 되었다" 고 하는 주장이 옛날부터 있었지요.

    그리고 "왜구들 중에는 일본인만 있었던 게 아니라 조선 천민들이나 중국 밀무역자들이 섞여 있었으며, 특히 16세기의 후기왜구는 중국인들이 주도했다" 는 주장은 일본의 주류 학설이지요.
  • 라라 2017/06/17 23:03 #

    2번처럼 복수전이라 생각한다면 떳떳하게 기록을 남길만도 한데...고려사에 있는 개경 점령을 염두에 둔 대규모 공격도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니 유감이네요. 교차검증하면 좋을텐데. 왜구 장수들이 전술 보면 보통 수준이 아닌 듯 하던데. 개인 기록도 안 남기다니 글을 모른 것도 아닐듯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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