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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의 큰 오해》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 역사



  본 글은 2007년, 일본출판사 PHP연구소에서 신서본新書本으로 간행된 스즈키 마사야鈴木眞哉 씨의 저서《전국시대에 대한 큰 오해戦国時代の大誤解제 2장 <왜곡된 히어로들> 중 6편인【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 】부분(p. 66 ~ 70)을 번역한 것입니다. 위 책은 현재 종이책으론 절판된 상태이나, 아마존 킨들 등을 통해 일본에서 판매되고 있는 책입니다. 가능한 한 필요한 부분만 번역하겠으며, 절대로 배포나 불법공유 목적으로 올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여기서 명확히 하겠습니다.


  마에다 토시이에를 번의 시조로 삼는 카가 번加賀藩은 흔히 "100만 석" 이라고 일컬어지나, 영지가 가장 컸을 때는 120만 석 정도를 영유하였던 시기도 있다. 그렇다곤 해도 이는 토시이에가 죽은 후의 이야기로, 토시이에 시대에는 일가의 영지들까지 합하여도 80만 석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출발점을 감안한다면 엄청난 출세이긴 했다.


마에다 토시이에의 초상화(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토시이에가 배출된 가문은 현재의 나고야 시名古屋市 시내 주변의 소영주 집안이었다. 동향 사람인 히데요시 같은 자에 비하면 상당히 양호하지만, 카가 번 관계자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5천 석 / 다른 계산에 따르면 2천 석 정도의 신분이었다. 대하드라마《토시이에와 마츠利家とまつ》에서도 이에 관해서 그럭저럭 정직하게 반영한 듯 하다.

  토시이에는 (오다織田) 노부나가信長가 10대였던 시절부터 그를 섬긴 가신으로,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노부나가 생전 노토能登 지방(역주 : 지금의 이시카와 현 북부)을 하사받았다. 물론 이 무렵에는 후발주자였던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쪽이 그보다 훨씬 앞서 달리고 있었다. 토시이에는 그 둘만큼 지휘능력이라든가 행정능력을 평가받지 못했던 것이리라.

  이 토시이에의 운이 일거에 트인 것은 히데요시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가 대립하였기 때문이다. 토시이에는 노부나가 시대부터 카츠이에가 지휘하는 홋고쿠슈北国衆, 즉 호쿠리쿠北陸 방면 군단의 일원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젊은 시절부터 여러모로 카츠이에의 신세를 진 바 있어, "아버님親父" 이라고 부를 정도의 관계이기도 했다. 카츠이에 진영에 가담하는 게 당연하다고 할 수 있으나, 그는 히데요시와도 친하여 딸들 중 하나를 수양딸로 줄 정도로 관계가 좋았다.


오치아이 요시이쿠가 그린 시바타 카츠이에(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텐쇼 11년(1583)에 벌어진 히데요시와 카츠이에의 대결은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전투는 오우미(近江, 지금의 시가 현) 북부의 산간지대에서 쌍방이 수많은 영채를 구축하고 대치하는 모양새를 이루며 시작되었으나, 히데요시가 기후의 오다 노부타카織田信孝를 공격하러 간 사이에 카츠이에의 조카 사쿠마 모리마사佐久間盛政가 별동대를 이끌고 기습을 감행, 히데요시 측의 오오이와 산 영채大岩山砦 / 이와사키 산岩崎山砦 영채를 탈취하고, 시즈가타케 영채賤ヶ岳砦를 위협하였다.


시즈가타케 전투 직전 양군의 포진(출처 : 城と古戦場)


  카츠이에는 모리마사에게 돌아오라고 했으나, 모리마사는 카츠이에가 이 기회에 진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쉽사리 철수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히데요시가 본대를 이끌고 돌아와 사쿠마 군을 격파, 이것이 파급되어 전군이 완전히 붕괴하였고, 카츠이에도 에치젠越前 지방의 본거지로 퇴각한 후 할복하였다.

  는 것이 통설에 따른 설명이나, 사실은 그 정도로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모리마사의 별동대는 히데요시 군의 반격을 받고 일거에 허물어진 것이 아니라, 질서정연하게 퇴각하고 있었다. 이대로 간다면 다시 카츠이에의 본대와 합류. 재차 양군이 대치하는 진지전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것이다.

  이 때 카츠이에는 본진을 키츠네즈카狐塚로 전진시켰고, 토시이에는 시게야마 산茂山에 진을 치고 시즈가타케 방면에서 퇴각해 온 별동대를 원호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별동대가 후퇴해오기 이전 토시이에의 부대는 진을 걷어치우고 전장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 때문에 후방의 카츠이에 본대가 보기엔 별동대가 궤멸당한 것처럼 인식되었고, 전방의 별동대가 보기엔 후방부대가 무너진 것처럼 인식되고 말았다. 아니, 실제로 무너진 것이다.


시즈카타케 전투의 클라이막스(출처 : 城と古戦場)


  어째서 토시이에는 이런 행동을 했던 것인가? 에도 시대 초기에 지어진《카와스미타이코키川角太閤記》에 따르면【 히데요시의 내밀한 요청에 따라 전투 중에 국외중립局外中立 태도를 취하기로 했다 】고 한다. 그러나 전투 중에 중립을 지킨다는 건 소극적인 배반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기에《소후모노가타리祖父物語》는【 배반ウラギリ 】이라 기록하고 있고, 역사학자 타카야나기 미츠토시高柳光寿 씨께서도 "이것은 배반이다." 라고 설명하신 바 있다.

  이 대목은 대하드라마로서도 피해갈 수 없는 이야기였기에 대단히 고심하여 연출을 하였다. 그리고 드라마화 기념으로 개최된 전람회에선 "토시이에는 직접 히데요시 측과 전화戰火를 주고받는 일 없이, 카츠이에 측이 패배한 걸 계기로 에치젠 후츄府中로 철수하여 히데요시에게 귀복했다" 고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는 다소의 소규모 충돌이 존재했기에, 토시이에의 부하들 가운데에서도 전사자가 나왔다. 그렇기에 전화를 주고받지 않았던 것도 아니며, 딱히 시바타 측이 패배했기 때문에 토시이에가 철수한 게 아니라는 점이 그 이상으로 수상쩍은 면이다. 토시이에가 망설임없이 철수해버렸기에 시바타 측이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본말전도라는 말이 그대로 들어맞는다고 하겠다.

  패배한 카츠이에는 패주하던 중에 토시이에가 있는 에치젠 후츄 성에 들렀으나, 그를 책망하는 이야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이제부터는 히데요시를 의지하여 집안을 보전하게." 라고 거듭 이야기해준 후에 성을 떠났다. 그리고 본거지居城로 돌아가서는 토시이에가 바쳤던 인질들도 되돌려 보냈다. 카츠이에는 옛날부터 대중적 인기가 박한 인물이었지만, 인질로 잡은 옛 주군(역주 : 오다 노부나가)의 측실側室조차 책형에 처해버렸던 히데요시 따위와 비교한다면 압도적으로 고결한 행동을 했다. 그리고, 토시이에란 인물은 왠지 남들이 미워할 수가 없는 매력을 갖추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초상화(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전후戰後, 토시이에는 노토 지방의 지배권을 보장받았을 뿐 아니라 새로이 카가 지방 내 2군을 가봉받았다. 타카야나기 씨는 "패배한 측에 가담하여 이렇게 후대받은 사례는 달리 없다." 고 말씀하셨는데, 지당하신 말씀이다. 그만큼 토시이에의 '배신' 가치가 높았다는 것으로, 히데요시가 천하를 잡게 된 공적의 몇 할 정도는 토시이에가 기여했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러한 전력도 있었고, 젊은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기도 했던 토시이에라는 인물은, 피붙이가 얼마 없는 히데요시에겐 기댈 만한 가치가 있는 인간이었다. 그렇기에 (히데요시가) 죽을 때, 그에게 탁고를 했던 것이다. 토시이에로서도 그러할 의향이 있었으나, 히데요시가 죽은 후 반 년 정도가 지나 본인도 세상을 떠났다. 그가 조금 더 살았더라면 히데요시의 아들인 (토요토미豊臣) 히데요리秀賴를 칸바쿠関白로 삼아 그를 추대한 후 '마에다 막부' 같은 것을 세웠을 수도 있다고 본다. 그렇게 됐다면야, 에도 시대江戸時代 같은 건 일본 역사에서 사라졌으리라.   

        

덧글

  • 2017/05/13 20:3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7/05/13 21:05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공손연 2017/05/13 20:52 # 삭제 답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 생전에도 제거할려면 정권이 뒤집히는 것을 각오하고 사생결단을 해야할만한 세력을 가졌는데 마에다 도시이에 정도의 능력으로 아무리 히데요리를 옹립하더라도 무리가 아닌듯 싶군요.
  • 3인칭관찰자 2017/05/13 21:07 #

    저도 아무리 토시이에가 오래 살았다고 하더라도 '마에다 막부' 가 세워졌을거란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그래도 토시이에가 있었다면 히데요리가 그렇게 죽지는 않았을수도.. 라고 생각하는 정도지요.
  • 차가운 도시남자 2017/05/13 22:29 # 답글

    마에다 막부는 확실히 오버스런 표현이군요. 고향이 그쪽인가 왜 마에다를 저리 띄워줘....

    토시이에가 있었어도 단지 목숨줄이 조금 늘어나는데 그칠 뿐이었을거라 생각합니다.

    요도기미의 어리석음과 오만함은 죽을때까지 정신 못 차릴 병이어서 많은 병사들이 죽어나간 다음에야 끝나게 되었죠. 그것도 2번이나.

    저는 요도기미가 당연한 인과응보를 받았고, 히데요리도 아주 잘 뒤졌다고 봅니다. 없어져야 할 것들이지요. 뒤지는 참에 불만세력이 될 낭인들을 끌고 뒤졌으니 역사에서 제 역할을 한 셈이지요.
  • 3인칭관찰자 2017/05/14 00:48 #

    스즈키 마사야 씨 집안은 키이 지방에서 발흥했고 그 본인은 요코하마 출신이라 하니 그닥 마에다의 영지와 인연은 없는 걸로 압니다. 단지 이분의 경우 토쿠가와 이에야스를 정말정말 혹평하시기 때문에 히데요시 죽은 후 이에야스와 대립각을 세우던 토시이에를 상대적으로 고평가하시지 않았나하는 추측은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 라라 2017/05/14 01:05 # 답글

    시바타기 이겼어도 임진왜란이 났을가요?
  • 3인칭관찰자 2017/05/14 09:14 #

    확실한 답을 드리긴 힘들지만... 시즈가타케 전투 당시 카츠이에는 모리 가문과 물밑에서 교섭을 할 때 '추방당한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불러들여 무로마치 막부를 재건시키겠다' 는 제안을 했다고 합니다. 단순히 모리 가문을 아군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립서비스인지 진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걸 보면 장래에 대한 구상도 히데요시와는 많이 다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 Hyth 2017/05/14 01:42 # 답글

    '마에다 막부'는 아무래도 무리였을거 같고(...) 하지만 히데요리가 기반을 확실히 다질때까지 마에다가 살아있었으면 전개가 조금은 달라졌을순 있겠군요;;
  • 3인칭관찰자 2017/05/14 09:18 #

    네. 적어도 토요토미 가문이 멸망당하는 시점이 제법 늦춰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듭니다.
  • 재팔 2017/05/14 16:04 # 답글

    아마 도시이에가 살아서 이에야스랑 대결을 했다면 마에다가 멸망과 함께 도요토미 집안까지 이에야스가 날려버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ㅋ
  • 3인칭관찰자 2017/05/14 20:36 #

    그래도 토시이에가 어디까지나 히데요시 유훈을 지키며 구 토요토미 세력들을 규합할 수 있었다면야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었을지도요. 물론 이에야스가 비집고 들어갈만한 내부의 사단이 나서 정면대결 들어간다면 말씀하신 대로 될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ㅋㅋ
  • rumic71 2017/05/14 16:13 # 답글

    너구리와는 달리 '으리' 하나는 끝내준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리 되면 애매하군요...
  • 3인칭관찰자 2017/05/14 20:42 #

    배반으로 중대한 결전의 승패를 결정해버렸다는 점으로 보면 세키가하라 전투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와 비슷한 점도 있지요.(물론 인물 자체의 됨됨이로 보면 토시이에와 히데아키 두 사람을 동렬에 놓는 건 토시이에에게 많이 미안하긴 하지만요)
  • 스폰지 2017/05/16 06:07 # 답글

    마에다 막부 운운은 마에다를 띄워주는 게 아니라 '걔가 으리의 아이콘 취급받는데 알고보면 너구리하고 똑같은 놈이라능...' 뭐 이런 맥락 아닐까요?
  • 3인칭관찰자 2017/05/16 10:44 #

    일리있는 말씀인 것 같아 원문을 다시 한 번 읽어봤는데 스폰지님께서 생각하신 의미와는 차이가 나는 것 같았습니다. "토시이에가 살아있었다면 이에야스의 천하는 없었다" 는 식의 뉘앙스가 강하게 느껴졌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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