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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망! 혼노사의 변》'부코야와武功夜話' 로 보는 아케치 (2) ┗ 微妙な話たち



  이 글은 신인물문고新人物文庫 41《아케치 미츠히데 야망! 혼노사의 변》에 수록된 글들 중 하나(p. 95 ~ 112)로 모리모토 시게루(森本繁, 1926~) 씨께서 집필하신《부코야와로 보는 아케치 미츠히데》란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글이 주로 참고한《부코야와武功夜話》란 문서는, 위 책이 처음 출판된 30년 전과는 달리 지금 일본 내에서 위서인지 아닌지 여부를 놓고 연구자 간의 찬반양론이 극심히 갈리는 사료가 되어버린지라, 일단 '미묘한 이야기' 카테고리에 포함시켰습니다.


  미츠히데의 탄바 경략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가 코레토 휴우가노카미惟任日向守에 서임된 건 텐쇼 3년(1575) 7월 3일의 일이다. 같은 해 시모츠키(霜月, 11월) 3일에 미츠히데는 츠다 시치베에津田七兵衛 / 나가오카 효부다유(長岡兵部大輔, 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藤孝) / 야마오카 미마사쿠山岡美作 등과 함께 노부나가의 후진부대가 되어 입경을 수행했는데, 그 모습을 기록한《부코야와》에 따르면 미츠히데는 '아케치 쥬베이明智十兵衛' 가 아니라 '코레토 휴우가노카미' 로 기재되어 있다. 참고로 이《부코야와》에서는 키노시타 토키치로 히데요시木下藤吉郞秀吉가 종오위하 치쿠젠노카미筑前守로 서임된 때가 바로 텐쇼 3년 시모츠키 3일이라고 적고 있다.

  겐키 2년(1571) 12월에 사카모토 성주로 임명된 미츠히데는 그 지리적 관계에 따라 탄바丹波 지방 경략에 종사하였고, 훗날에는 선임자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信盛를 대신하여 키나이畿內 지역의 군사령관이 되었다. 텐쇼 2년(1574) 8월에 미츠히데는 노부나가로부터【 사쿠마 노부모리와 함께 카와치 지방으로 가서 미요시 씨三好氏와 잇코잇키一向一揆를 공략하라 】는 명령을 받았는데, 그런 한편으로 다음 해인 텐쇼 3년(1575) 6월에,【 호소카와 효부다유 후지타카와 함께 탄바 야가미 성주八上城主 하타노 사에몬다유 히데하루波多野左衛門太夫秀治를 퇴치하라, 】는 명령을 받았다.

  오다 노부나가는 텐쇼 3년(1575) 5월 20일에 벌어진 나가시노 전투에서 타케다 카츠요리武田勝頼를 격파한 후 25일날 기후로 개선하였는데, 이 때 미츠히데는 카미가타(上方, 역주 : 쿄토 / 오사카 지역)를 진무하고 있었기에 전투에 종군하지 않았다. 노부나가는 이 전투가 벌어진 후인 7월 3일에 조정으로부터 관위를 승진시켜 주겠다는 제의를 받았는데, 그는 이를 사퇴하고 타케이 세키안武井夕庵 / 마츠이 유칸松井友閑을 위시하여 아케치 / 니와 등의 제장들에게까지 관위 서임이 이루어지도록 주선하였다. 그리고 나가시노 전투 승전과 에치젠 잇코잇키越前一向一揆를 진압한 여세를 몰아 아케치 / 호소카와 두 무장에게 탄바를 경략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이 때 아케치 군의 지배하에서 그 선봉을 맡은 자는, 모리 씨에 의해 멸망으로 내몰렸던 아마고 씨의 잔당인 아마고 스케시로 카츠히사尼子助四郞勝久 / 야마나카 시카노스케 유키모리山中鹿之助幸盛 일당이었다. 이즈모出雲 지방 토다 갓산 성주富田月山城主였던 아마고 씨는 에이로쿠 9년(1566) 11월에 모리 씨에게 멸망당했는데, 그 유족이었던 아마고 스케시로 카츠히사와 중신 야마나카 시카노스케 유키모리를 비롯한 주종主從이 주군 가문의 재건을 꿈꾸며 오다 노부나가를 의지, 노부나가로부터 탄바 공략군의 선봉을 명 받은 것이다.

  참고로《부코야와》에서는【 노부나가가 호소카와 후지타카 / 아케치 휴우가노카미를 탄바로 파견하여 야가미 성주 하타노 사에몬다유를 토벌하도록 했을 때, 아마고 스케시로와 야마나카 시카노스케를 비롯한 뛰어난 로닌들 6백여 명을 규합시켜 선봉을 맡게 한 후 탄바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그들은 여세를 몰아 인슈(因州, 이나바因幡 지방)로 밀고 들어가 텐쇼 3년(1575) 9월에는 톳토리 성鳥取城을 포위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아마고 씨 잔당은, 이후 킷카와 모토하루吉川元春 /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 두 무장이 인솔하는 1만여 명의 군대가 출진해오자 곧장 격파당하고 이나바 지방에서 좇겨나, 타지마 지방으로 도망쳤다. 대부분은 사방으로 흩어지거나 전사했고, 살아남은 자들은 하시바 치쿠젠노카미 히데요시羽柴筑前守秀吉의 군에 들어갔다고《부코야와》는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 아마고 일당 문제가 모리 씨와 오다 씨의 틈을 만드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고《부코야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이를 계기로 게이슈(芸州, 역주 : 아키安芸 지방. 모리 가문의 본거지) 모리는 오다 노부나가 공의 흉중을 시의猜疑하면서 서서히 이시야마 혼간사石山本願寺의 켄뇨 상인과 의논하여 적대하는 기색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

  이후 운슈(雲州, 이즈모 지방) 로닌들로 구성된 아마고 씨 일당은 하시바 치쿠젠노카미 히데요시의 막하에서 하리마播磨 / 타지마但馬 지방의 전장을 누비며 모리 군과 대결하게 된다.

  텐쇼 5년(1577) 10월, 하시바 히데요시는 이 아마고 부대 5백여 명을 선봉으로 삼아 반슈로 출진, 사요 군佐用郡 코우즈키 성上月城을 공략했다. 코우즈키 성 공략에 참가한 히데요시 군은 총 4,200명이었다.

  그러나 모리 씨는 이를 알고 세 가문(모리 / 킷카와 / 코바야카와)의 3만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빗츄備中 지방 마츠야마松山에 집결하여 비젠 우키타 가문備前宇喜多家의 군세를 합쳐 하리마로 진격, 아마고 병력 6백여 명이 농성한 코우즈키 성을 포위했다.
 
【 사이고쿠(西国, 서일본)의 모리 / 킷카와 / 코바야카와 / 우키타 등의 3만 여 군대가 빗츄 / 미마사카 지방에서 난입, 코우즈키 성을 포위하는 변사가 생겼기에 치쿠젠 님(히데요시)은 타카쿠라 산으로 진을 옮기셨다. 대번에 반슈는 소란스러워져, 치쿠젠 님의 뒷공작은 실패하였기에 나이후 공(內府公, 노부나가)의 질책은 피할 수 없었다. 이에 이르자 나이후 공은 급변하는 정세에 대응하여 적자이신 츄쇼 노부타다中將信忠 공을 대장으로 삼은 3만여 명의 카미가타 군을 파견하여 구원하도록 하셨다. 】(《부코야와》)

  이 때 코우즈키 성을 구원하러 온 오다 군 제장들 중에는 니와 고로자에몬 나가히데丹羽五郎左衛門長秀 / 타키가와 카즈마스滝川一益 / 츠츠이 이가노카미 쥰케이筒井伊賀守順慶, 그리고 아케치 휴우가노카미 미츠히데와 아라키 셋츠노카미 무라시게荒木摂津守村重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지휘하는 군대는 완전 남의 일처럼 방관하며, 아마고 군을 구원하기 위해 모리 군과 싸우려고 하지를 않았다. "그야말로 추량하기 어려운 것이 사람의 마음. 한심한 것이다." 라고《부코야와》의 편집자(요시다 카츠카네)도 개탄을 하는데, 3개월의 체진기간 동안 구원군은 완전히 방관하는 자세로 일관했다.

  츠츠이 / 니와 / 타키가와 / 아라키 등의 제장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때는 자신의 밑에서 탄바 경략에 종군하였던 아마고 군이 쿠마미 강熊見川 저편에 있는 코우즈키 성에서 봉화를 올리며 필사적으로 구원을 요청하는 걸 태연히 묵살한 미츠히데의 내심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다른 제장들을 설득하여 어떤 대책을 취해야만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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