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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망! 혼노사의 변》'부코야와武功夜話' 로 보는 아케치 (1) ┗ 微妙な話たち



  이 글은 신인물문고新人物文庫 41《아케치 미츠히데 야망! 혼노사의 변》에 수록된 글들 중 하나(p. 95 ~ 112)로 모리모토 시게루(森本繁, 1926~) 씨께서 집필하신《부코야와로 보는 아케치 미츠히데》란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글이 주로 참고한《부코야와武功夜話》란 문서는, 위 책이 처음 출판된 30년 전과는 달리 지금 일본 내에서 위서인지 아닌지 여부를 놓고 연구자 간의 찬반양론이 극심히 갈리는 사료가 되어버린지라, 일단 '미묘한 이야기' 카테고리에 포함시켰습니다.
 

  미츠히데의 출신

  마에노 가문前野家의 문서인《부코야와》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고굉지신股肱の家臣이었던 마에노 쇼우에몬(前野將右衛門, 나가야스長康)과 그 일가 사람들의 무공을 글로 남긴 옛 기록이므로, 이 책의 표제인 아케치 미츠히데의 동정에 대해서는 그다지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진 않다. 최초로 미츠히데의 이름이 이 문서에 등장하는 건 겐키 2년(1571) 난료(南呂, 음력 8월) 중순, 오우미 북부의 산하가 가을 빛으로 물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이 해 9월, 미츠히데는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 /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信盛 / 이나바 요시미치稲葉良通 등의 제장들과 함께 오와리尾張 / 미노美濃 지방의 군대 2만 5천여 명을 이끌고 히에이 산比叡山을 공격하여 신사神社와 불각佛閣 일체를 불태웠다.

  아케치 미츠히데가 확실한 사료에 등장하는 것은 에이로쿠 11년(1568) 7월,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가 에치젠越前 지방 이치죠다니一乘谷를 떠나 미노 지방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를 의지하려 했을 때부터다. 이 때 미츠히데는 요시아키를 맞이하기 위해 5백여 명의 부하들을 인솔하여 호토케가하라로 향했다. 요시아키가 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藤孝 / 우에노 키요노부上野清信 두 가신을 그 해 6월 23일에 사자로 삼아 기후로 파견하여, 그들이 미츠히데의 중개를 받아 노부나가를 만나서 밥상을 차린 결과였다.(《호소카와카키細川家記》)

  호소카와 후지타카들은 노부나가의 힘을 빌려 요시아키를 15대 쇼군으로 앉히려고 획책하고 있었다. 이 때 미츠히데는 두 사람의 가교가 되는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호소카와카키》를 따라 그간의 경위를 설명해 보면, "요시아키가 쿄토 복귀를 노부나가에게 의뢰해 노부나가가 이를 승낙하고 에이로쿠 11년에 입경이 실현된 건, 후지타카가 요시아키 측에서 / 미츠히데가 노부나가 쪽에서 서로 협동하여 책동한 결과" 였다.

《호소카와카키細川家記》에 따르면 미츠히데의 출신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미츠히데는 세이와 겐지 토키 씨土岐氏의 후손으로, 그 선조는 토키 시모츠케노카미 요리카네土岐下野守賴兼였다고 한다. 그 일족은 대대로 미노 지방에서 거주하였으나 (미츠히데의) 아버지가 아케치 성明智城에서 전사하자 도망쳐, 에치젠의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義景를 섬기며 5백 관의 봉록을 받았다.

  미츠히데는 특출난 화승총(鉄砲, 조총) 솜씨를 가지고 있었고, 여러 지방의 정세에도 능통했다. 그리고 호소카와 후지타카가 여러 다이묘들을 설득하여 요시아키를 쇼군 자리에 앉히기 위해 분주하다 에치젠 지방에 체재하였을 때는 그와 깊이 교류하며, 조정禁中이나 쿄토京都의 정세도 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 무렵 아사쿠라 가문의 쿠라타니鞍谷라는 가신이 미츠히데를 참소했기에, 요시카게는 미츠히데를 해고하였다. 아사쿠라 가문의 녹祿에서 벗어난 미츠히데는 옛 연고를 의지하여 기후로 가서 오다 노부나가를 섬겼다. 에이로쿠 10년(1567) 10월 9일의 일이다. 노부나가는 이전부터 미츠히데의 이재異才를 알고 있었기에, 기뻐하며 5백 관의 영지를 하사하였다.

  일설에 따르면 미츠히데는 아시카가 요시아키로부터 보증서お墨付를 받아 이를 가지고 기후로 가서 높은 봉록으로 노부나가에게 등용되었다고도 한다. 오다 가문을 섬기게 된 미츠히데는 노부나가에게 요시아키의 의향을 전달했고, 노부나가는 시바타 / 니와丹羽 두 무장과 이를 의논하여 그들의 찬동을 얻었고, 요시아키로부터 호소카와 / 우에노 두 사람이 사신으로서 기후로 파견되게 된 것이다.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한 오다 노부나가의 입경은 에이로쿠 11년(1568) 9월 7일부터 시작되었는데, 이 때 미츠히데가 오다 군에 종군하였는지에 대한 여부는《부코야와》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같은 달 12일에 벌어진 오우미 지방 미츠쿠리 성箕作城 공략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9월 26일, 노부나가가 요시아키를 옹립하여 입경한 후 요시아키를 쇼군 지위에 앉히고(10월 18일), 10월 26일에 사쿠마 노부모리 / 무라이 사다카츠村井貞勝 /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 / 키노시타 히데요시木下秀吉를 위시한 5천여 명의 장병들을 잔류시킨 후 기후로 돌아가자, 다음 해인 에이로쿠 12년(1569) 1월 5일에 쿄토에서 내전이 터졌는데 여기서 미츠히데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는《부코야와》가 아닌《겐본신쵸키原本信長記》출처이다.《부코야와》자체가 이 내전을 기록하지 않았던 걸 감안하자면 히데요시 휘하의 군대는 이 내란 진압에 관여하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에이로쿠 12년(1569) 1월 6일에 미요시 3인중의 군대가 쿄토로 들어가 요시아키의 거처ㆍ혼코쿠사本圀寺를 포위했을 때,【 호소카와 텐큐細川典廐 / 츠다 사콘津田左近 / 아카자 시치로에몬赤座七郞右衛門 / 아카자 스케로쿠赤座助六 / 츠다 사마노죠津田左馬丞 / 와타나베 쇼자에몬渡辺勝左衛門 / 아케치 쥬베이(明智十兵衛, 미츠히데) / 모리 야고하치森弥五八 / 나이토 빗츄노카미內藤備中守 / 야마가타 겐나이山県源内 / 우노 마고시치宇野孫七 등이 분전하였고, 이타미伊丹 / 아라키荒木 / 이바라키茨城 / 호소카와 효부다유(細川兵部大輔, 후지타카) / 미요시 사쿄다유(三好左京大夫, 요시츠구義継) 등이 구원하러 달려와, 카츠라가와 강에서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 】고《겐본신쵸키》는 기록하고 있다. 즉 아케치 쥬베이 미츠히데는 이 때 쇼군 요시아키의 거처인 혼코쿠사를 경호하고 있었다, 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차치하고 겐키 2년(1571) 9월 12일, 노부나가의 명령에 따라 히에이 산 엔랴쿠사延曆寺를 공격하여 그 건물들을 남김없이 불태운 미츠히데는, 그 전공에 의해 노부나가로부터 오우미近江 지방 시가 군滋賀郡을 영지로 하사받아, 본거지居城로 삼을 사카모토 성坂本城을 축조하였다. 노부나가와 마찬가지로 합리주의자였던 미츠히데는 이 때의 히에이 산 엔랴쿠사 방화ㆍ토벌에 그다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라 추측된다. 겐키 2년 12월, 미츠히데는 쇼렌원青蓮院 / 묘호원妙法院 / 만쥬원曼殊院 이상 세 몬제키(門跡, 역주 : 텐노나 고급 귀족들의 자제가 주지로 있는 격이 높은 사원)의 영지를 "이곳은 엔랴쿠사의 영지였다" 며 가로채어, 이곳들을 포함한 (엔랴쿠사) 산문의 영지들을 소유했다.(《겐본신쵸키》,《넨다이키쇼세츠年代記抄節》,《토키츠구쿄키言継卿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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