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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셀렉션》토요토미 가문은 멸망하지 않았다? (上) ┗ 微妙な話たち



    이 글은 《歷史群像シリーズ 戦囯セレクション 驀進 豊臣秀吉》 p. 192 ~195에 수록된 '토요토미 가문은 멸망하지 않았다' 는 글을 번역한 것으로, 마에카와 카즈히코前川和彦 씨께서 집필하셨습니다. 전형적인 "ㅇㅇㅇ 생존설生存説" 내지 전설伝説 부류에 속하는 이야기로, 현재의 통설과는 영 거리가 먼 글이기 떄문에 흥미본위로(내지는 이런 주장도 있다, 는 정도로만) 읽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 


  히데요리도 쿠니마츠도 죽지 않았다


  "그런데 오사카 여름 전역 말이죠. 히데요리秀賴도 쿠니마츠国松도 죽은 게 아니었어요."

  "엇, 정말입니까?"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상대가 바로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나는 냉소했을지 모른다. 소년시절 읽고 버린 강담서적《사나다 유키무라》라든가,《나니와센키難波戦記》같은 책에 사나다 유키무라가 지휘하는 수백 명의 호위를 받으며 히데요리 모자母子가 탈출했다, 고 적혀있던 건 알고 있었으나, 물론 황당무계한 이야기로써 재미있어한 데 불과했다.

  그러나 온화함을 머금은 얼굴로 단호히 내게 명언하시는 그 분은, 강담사講談師 같은 자들과는 경우가 다르다. 토요토미 가문 18대 후손이라 일컬어지는 옛 히지 번日出藩의 번주이자 정 5위, 전직 자작子爵이셨던 키노시타 토시히로木下俊凞 씨였다.

  분고 지방에 있던 2만 5천 석의 히지 번은, 타이코 히데요시의 아내인 키타노만도코로 네네의 5세 연상 오빠인 스기하라 마고베에(杉原孫兵衛, 훗날 키노시타 이에사다木下家定로 이름을 고쳤고, 토요토미 성씨를 히데요시로부터 하사받았다.)의 셋째 아들, 키노시타 노부토시木下延俊를 초대 번주로 삼아, 메이지 시대가 올 때까지 존속한 다이묘 가문이었다. 이 키노시타 가문에는 대대에 걸쳐 극비로 전해내려오는 잇시소우덴(一子相伝, 역주 : 자식들 중 한 명에게만 가문의 비법을 알려주어 무언가를 계승시키는 방식)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주목해야 할 내용이었으리라

  잇시소우덴이란, 학술이나 무예 등의 오의奧義를 구전을 통해 물려주기 위한 수단인데, 물론 그런 분야에서만 그치는 건 아니다. 한 지방, 한 성의 부침과 관련된 사안을 은밀히 자손에게 전해주는 경우도 있었다. 그만한 중대사라면 문서로 기록해놓는 게 확실하지만 위험부담이 따른다. 언제 제 3자의 눈에 띌지 모르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잡히고 만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대로 전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극비사항이므로, 가공된 이야기일 리가 없다. 그러므로 잇시소우덴으로 남겨진 사안이라면 기록으로 남겨진 사료들보다도 더욱 신뢰할 만하다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히지 번 토요토미 가문, 즉 키노시타 가문이 대대로 극비로 취급하며 장남에게만 전해준 잇시소우덴에 따르면, 히데요리의 외아들인 쿠니마츠기미囯松君는 오사카大坂가 함락되었을 때, 사나다 다이스케真田大助들과 함께 시코쿠지四国路를 거쳐 사츠마薩摩 지방으로 도망쳐, 고무소(虚無僧, 역주 : 보화종 승려)들의 집단거주지였던 이쥬인伊集院에서 비호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토쿠가와 막부의 세력이 뻗쳐오게 되면서 이쥬인에서 지내는 것도 위험하다고 고려되어, 히지 성에서 떠맡기로 한 것이다.

  초대 번주 노부토시는 쿠니마츠를 히지 키노시타 가문의 차남으로서 입적시켜, 누이노스케縫殿助라 부르게 했다. 이윽고 노부토시는 임종을 앞두고 중대한 유언을 남겼다. 뭐냐하면 "2대 번주보다 12살 어린 누이노스케에게 히지 영내에 있는 1만 석짜리 타테이시고立石鄕를 주어 따로 분봉시켜, 하시바 성씨와 함께 그 이름도 노부요시延由로 부르게 하라." 는 것이었다. 고작 3만 석에 불과했던 히지 번에서 1만 석을 분봉하는 건 이상하긴 하다. 결국은 5천 석짜리 타테이시 번이 성립되었는데, 노부토시는 작달막하게나마 히데요시의 혈통을 은밀히 다이묘로서 존속시키고 싶었던 것이리라.

  즉 히지 번 키노시타 가문의 잇시소우덴은, 3만 석이었던 히지 번이 2만 5천 석이 된 이유를 자자손손에 걸쳐 납득시키기 위한 비사였다는 것이다.     

 
  슈산야구라朱三矢倉의 수수께끼

  히지 번의 잇시소우덴에서는 히데요리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이 없이 쿠니마츠기미에 대한 내용밖에 전하지 않으나, 이는 히지 번과 직접 관련이 없으므로 생략한 것이다. 그러나 히데요리도 탈출하였다고 보는 게 자연스러우리라.

  겐나 원년(1615) 5월 5일, (토쿠가와德川) 이에야스家康는 쿄토를 출진. 드디어 본격적인 여름 전역이 시작되려 했는데, 이 때 이에야스는 "이번의 전투는 시간을 요하지 않는다. 전군의 보급부대를 챙길 필요가 없다. 1인당 3일치의 휴대용 도시락만 준비시켜 출발하라." 고 지시하였다고《오사카고진오보에가키大坂御陣覺書》에 적혀 있는데, 결과는 그(이에야스)의 말대로였다.

  다음 날인 (5월) 6일에 도묘지道明寺 / 야오八尾 / 와카에若江 방면에서 격투가 벌어졌고, 7일에는 텐노지天王寺 / 챠우스 산茶臼山 / 센바仙波 / 아베노阿部野 / 텐마天満 / 테라마치寺町 등 오사카 성 주변에서 벌어진 사투를 끝으로 오사카 측은 패전하였다. 그 날, 사나다 유키무라真田幸村는 최후의 도박에 나서 챠우스 산에 있던 이에야스의 본진에 돌진하였다. 그리고 이 사나다 군 3천 5백 명이 옥쇄하면서 이젠 오사카 측에 주력부대라고 할 만한 전투군단이 사라졌고, 저녁 무렵이 되자 칸토 군이 성내로 침입하였다. 이 때, 토쿠가와 가문이 간첩으로 파견하였던 자들이 성내의 산노마루三の丸 부엌에 불을 질러 성은 극도의 혼란에 빠져버렸고, 침입해 온 칸토 군에 맞서 싸울 만한 계제도 상실하였다. 이 때가 오후 5시 무렵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 내부는 불바다가 되었고, 히데요리가 있던 센죠시키 방에까지 불길이 번졌다. 그러자 하야미 카이노카미速水甲斐守가 '만일의 일이 있을 경우' 에 대비하여 미리 (피난하기로) 상의를 마쳐놓은 야마자토쿠루와山里曲輪의 슈산야구라로 히데요리 일행을 선도하였다. 히데요리 / 요도도노淀殿 / 센히메千姫. 그리고 오오노 하루나가大野治長 등을 위시한 측근 등을 합쳐 그 수는 총 30명 정도였다. 

  야마자토쿠루와는, 혼마루에서 떨어져 있는 숲 속에 만들어진 시설로, 산 속 마을과 같은 우아한 취향이 감도는 곳이다. 성 안에서 꽃놀이 연회나 다회를 열 때 이곳을 이용하려던 것이 본래 목적이었던 듯하다.

  이 야마자토쿠루와에 있는 스미야구라는 '호시이쿠라(糒庫, 쌀 창고)' 라 불리기도 했고, '아라메쿠라(荒布倉, 황포창고)' 였다고도 하는데, 여러 설이 교차하기에 확실하지는 않다. 슈산야구라라는 것도 그런 호칭들 가운데 하나였다고도 하며, 붉게 칠한 창고가 나란히 늘어서 있기에 그들 중 3번째 건물을 '슈산朱三' 이라 불렀던 게 아닌가, 하는 말도 있다.

  이 야구라의 넓이는 가로 2간 / 세로 5간으로 총 3개 방으로 나뉘어 있었던 듯하다. 여기에 30명 전후의 남녀가 들어가 있었다고 하므로, 식량이나 무기 등을 보관하는 창고로 쓰이지 않았던 빈 건물이었다는 말이 된다. 만일의 일이 생기면 슈산야구라로 피난하도록 되어 있었다고 하므로, 이곳에 무언가 특별한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야마자토쿠루와의 슈산야구라로 히데요리 일행이 피난한 밤, 센히메가 오사카 성을 탈출하여 (토쿠가와) 히데타다秀忠의 본진에 도착했다.

  오오노 하루나가가 히데요리 / 요도도노의 구명救命을 애원하기 위해 센히메를 돌려보냈다는 것이 통설이나, 그랬을 리는 없다. 이에야스가 그 정도로 무른 인물이 아니라는 정도는 하루나가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센히메를 구명의 도구로 이용하려 했다면 끝까지 인질로 붙들어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센히메를 포함한 사람들의 목숨을 살리려는 교섭을 하는 것이 지당했으리라.

  그만큼 중요한 인질을 오오노 하루나가가 보내준 건, 이미 인질이 필요없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즉, 슈산야구라에 있던 탈출로를 통해 히데요리를 은밀히 도망치게 한 후, 하루나가는 센히메를 토쿠가와 진영으로 보내 히데요리 모자의 구명을 탄원함으로써 토쿠가와 가문의 시선을 호도하려고 했던 것이 틀림없다.



덧글

  • B군 2017/04/14 16:44 # 답글

    오오! 다음 편이 기대됩니다!
  • 3인칭관찰자 2017/04/14 18:27 #

    다음 편은 내일 밤 안으로 올리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 瑞菜 2017/04/14 20:19 # 답글

    히데요리가 오사카에서 탈출해 사쓰마로 달아났다는 민담이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이런 뒷 이야기가 있을 줄은 몰랐네요.
  • 3인칭관찰자 2017/04/14 20:47 #

    위에 언급되는 다이묘 집안의 당주&전전 자작이었던 키노시타 토시히로 씨가 이 설을 강력히 주장하며 전파하신 영향으로 그 전까지 빛을 못 보던 생존설이 일약 주목을 받은 면도 있는 듯 합니다.
  • windxellos 2017/04/14 22:57 # 답글

    쿠니마츠 생존설은 좀 비틀어서 생각하면 당대 번주가 총애하던 아이한테 따로 영지를 떼어주고 싶어서 가문 내의 (어찌보면 당연한) 반발을 막고 납득시키기 위해 비밀이랍시고 이야기를 만들어다 붙인 게 저리 된 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설핏 드는군요.

    A : 달랑 삼만석짜리 번에서 뭐하러 쟤한테 저만큼이나 떼줘야 되는데요?!

    B : 그게... 이건 정말 비밀인데... 사실 그분은 타이코 전하의 아드님이니라! 너만 알고 있어야 한다!
    (뻥이지만)

    ...뭐 이런 느낌으로 말입니다.
  • 3인칭관찰자 2017/04/15 08:58 #

    하긴 그런 이유라도 붙이지 않는 이상 고작 3만 석 영지를 분봉하는 건 힘들 터이니....

    말씀을 듣고 조금 생각해보니 당주가 다른 데서 얻은 숨겨진 아들(한국사로 보면 공민왕과 우왕 창왕의 관계와 비슷한)에게 영지를 주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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