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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마와 카이엔타이》타케치 한페이타와 토사 근왕당 (完) 역사



  이 글은《新 歷史群像シリ-ズ 20 坂本龍馬と海援隊》p.64 ~ 68. 아이카와 츠카사相川司 씨께서 집필하신〈외우畏友 타케치 한페이타武市半平太와 토사 근왕당〉을 번역한 것입니다. 막부 말기 시대 토사 번(土佐藩, 역주 : 야마우치 가문山內家 24만 석. 지금의 고치 현)의 거물인 타케치 한페이타를 중심으로 하급무사들을 결집하여 존왕양이尊王攘夷 / 일번근왕一藩勤王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활동한 토사 근왕당土佐勤王党의 흥망을 다루고 있습니다.


  토사 근왕당의 와해

  (야마우치山內) 요우도容堂가 번 정치로 복귀한 것은 공무합체파公武合体派의 반격이 시작되었고, 구 토요 계열(상급무사上士)이 복권되었음을 의미했다.

  분큐 3년(1863) 4월, 토사로 돌아간 한페이타는 요우도에게 히라이(平井, 슈지로收二郞) / 마사키(間崎, 테츠마哲馬) 등을 사면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요우도는 6월, 그들에게 할복처분을 내렸다. 이 소식을 들은 료마는【 히라이 슈지로는 정말 애처롭습니다. 애처로워요. 여동생 오카오お加尾가 얼마나 비탄해할지... 】라고 적은 편지를 누나 오토메乙女에게 보냈다.

  그리고 8월, 쿄토의 정국이 크게 변하였다. 8.18 정변에 의해 사츠마 번薩摩藩과 손을 잡은 공무합체파(막부幕府 / 아이즈 번会津藩)가 존왕양이파(尊王攘夷派, 쵸슈 번長州藩)를 쿄토에서 추방해버린, 일종의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사카이마치고몬堺町御門. 이 곳을 경비하던 쵸슈 번 장병들은 정변에 의해 추방당했다
(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이 극적인 정변은 토사 번의 정쟁에 즉각적으로 반영되었다. 요우도의 의향을 받든 공무합체파(구 토요 계열)는 토사 근왕당에 인정사정없는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다. 여기엔 복수의 의도도 다분히 포함되어 있었다.

  9월이 되자 한페이타를 위시하여 시마무라 에이키치島村衛吉 / 코우노 토가마河野敏鎌 등 간부들이 감옥에 갇혔다. 당시【코베 해군 조련소】에서 수학 중이던 료마에게도 귀번명령이 내려졌으나, 그는 번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토사 근왕당 출신 인물로는 드물게 메이지 시대에 크게 영달한 코우노 토가마.(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상급무사인 한페이타는 차치하더라도, 같이 옥에 갇힌 하급무사들에게는 가혹한 고문이 가해졌다. 토요 암살과 관련한 혐의를 입증받기 위해서였다.

  한페이타와 그 동지들은 부인否認을 계속했다. 그러나 겐지 원년(1864) 4월, 살인마 이조人斬り以蔵가 토사 번으로 송환당해 왔다. 막부 관리에게 붙들린 이조는 '무숙자 테츠조無宿人ㆍ鉄藏' 로 취급되고 있었다.

  이를 알게 된 한페이타는【 그 같은 머저리는 빨리 죽어 주는 게 좋으련만... 】이라고 적은 편지를 옥 밖으로 보내었는데, 고문을 당한 이조는 이노우에 사이치로井上佐一郞 / 혼마 세이이치로本間精一郎 등을 암살했다는 것을 자백하여, 훗날 참수당했다.

  그 결과, 직접 손을 썼는지 여부는 별개로 하더라도 한페이타들은 '살인교사殺人敎唆' 죄를 추궁받게 되었다. 아무리 주의와 주장이 있었다고 해도, 사람을 죽인 건 엄벌에 처해지기 마련이다.


한페이타가 옥중에서 그려 아내에게 보낸 자화상(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케이오 원년(1865) 윤 5월, 한페이타는 할복을 명 받았다. 선고문에는

  1. 도당을 이루어 인심을 선동하였다.
  2. 고귀하신 분(쇼렌인노미야靑蓮院宮)께 용이하지 않은 일을 아뢰었다.
  3. 은거하신 분(요우도)께 패덕한 언사를 아뢰었다... 는 세 죄목이 거론되었다.

  한페이타도 이런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각오하였기에, 훌륭히 할복하였다. 향년 37세. 모든 동지들이 검거되어 처분당한 건 아니었지만, 한페이타의 죽음을 계기로 토사 근왕당의 활동에는 종지부가 찍혔다.

  마침 이 때는, 쵸슈로 찾아간 료마가 삿쵸동맹(薩長同盟, 케이오 2년=1866 성립)의 필요성을 통감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덧글

  • 조훈 2017/04/08 19:24 # 답글

    저는 근대사와 료마가 남긴 족적은 잘 모르지만...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3인칭관찰자 2017/04/08 20:24 #

    익숙치 않으신 시대를 다룬 글에까지 관심을 가져주셔니 감사할 따름입니다.(__)
  • windxellos 2017/04/09 16:06 # 답글

    그러고 보니 한페이타는 할복 당시 스스로 가로로 세 번 긋고 다시 세로로 한 번 그어 왕(王)자로 배를 가르고 나서야 카이샤쿠를 허락하여 그 원통함을 나타냈다...운운하는 글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이게 신빙성 있는 사료에서 나온 건지 그냥 어디 소설의 썰 같은 건지가 의문이더군요. 예전에 읽은 것들은 썰과 사료가 마구 뒤섞인 게 많다 보니 좀 헛갈릴 때가 아직도 종종 있습니다.
  • 3인칭관찰자 2017/04/09 19:55 #

    유신 당시 죽은 동지들(특히 한페이타)을 추모하던 토사 번의 근왕당 생존자들이 《한혈천리구》를 쓴 사카자키 시란으로 하여금 메이지 말년에 편찬케 한《유신 토사 근왕사》라는 책이 한페이타 할복 이야기의 첫 출처라고 알고 있습니다.(단지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 사료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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