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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마와 카이엔타이》타케치 한페이타와 토사 근왕당 (2) 역사



  이 글은《新 歷史群像シリ-ズ 20 坂本龍馬と海援隊》p.64 ~ 68. 아이카와 츠카사相川司 씨께서 집필하신〈외우畏友 타케치 한페이타武市半平太와 토사 근왕당〉을 번역한 것입니다. 막부 말기 시대 토사 번(土佐藩, 역주 : 야마우치 가문山內家 24만 석. 지금의 고치 현)의 거물인 타케치 한페이타를 중심으로 하급무사들을 결집하여 존왕양이尊王攘夷 / 일번근왕一藩勤王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활동한 토사 근왕당土佐勤王党의 흥망을 다루고 있습니다.


  요시다 토요吉田東洋 암살사건

  당시의 토사 번 번주는 요우도容堂의 양아들인 (야마우치山內) 토요노리豊範였고, 그 밑에서 참정參政에 취임하여 번 정치를 주도하던 자가 바로 요시다 토요였다. 토요는 요우도가 등용한 상급무사로, 그의 일파들이 공무합체 노선을 추진하고 있었다.

  한페이타는 번의 방침藩論을 쇄신하자고 토요 일파를 설득했다. 사츠마ㆍ쵸슈薩長 두 번과 연대하여, 번의 방침을 존왕양이尊王攘夷로 바꾸어야 한다. 이것이 '일번근왕一藩勤王' 의 내용이었다.


요시다 토요의 사진(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그러나 토요는 "토사 번은 막부幕府의 은혜를 입은 집안으로, 태생부터가 사츠마ㆍ쵸슈 두 번과 차이난다.", "한페이타는 부랑자(浮浪, 로시浪士)들에게 놀아나고 있는 게 아니냐." 고 하며, 요구를 일축해 버렸다.

  그러자 한페이타는 토요에게 반대하는 일파(야마우치 일가붙이들山內一門 / 다른 상급무사들)들과 결탁하여 토요 배척을 도모하며, 암살暗殺을 실행에 옮겼다. 분큐 2년(1862) 4월, 토사 근왕당원인 나스 신고那須信吾 / 야스오카 카스케安岡嘉助 / 오오이시 단조大石団藏 세 사람이, 퇴근하여 집으로 돌아가던 토요를 습격해 베어 죽였다.

나스 신고의 초상화(출처 : 막부 말기의 모든 것)


  토요의 목을 자른 그들은 미리 기다리고 있던 코우노 토가마河野敏鎌에게 수급을 넘긴 후, 그대로 번 밖으로 도망쳤다. 훗날 나스 신고와 야스오카 카스케는 텐츄구미天誅組의 야마토 거병(분큐 3년=1863)에 참가하였다가 전사討死하였다.

  토요가 암살되기 3개월 전인 (1862년) 1월, 의뢰를 받은 료마는 한페이타의 편지를 가지고 쵸슈의 쿠사카 겐즈이久坂玄瑞를 찾아갔다. 나랏일國事을 논한 후 료마가 번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쿠사카 겐즈이는 한페이타에게 보내는 서신을 료마에게 맡겼다.

  그 편지에는【 제후(諸侯, 다이묘大名)도 쿠쿄(公卿, 역주 : 조정 귀족)도 의지할 수 없습니다. 초망의 지사草莽志士들을 결집하여 의거(義擧, 막부 토벌討幕) 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저희 동지들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실례되는 말이오나, 귀하의 번(토사 번)과 저희 번(쵸슈 번)이 멸망한다 해도 대의를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필자 의역) 라고 적혀 있었다.

  이를 통해, 존왕양이 급진파가 지향하는 길과 한페이타가 주창하는 '일번근왕' 이 어떻게 다른지를 엿볼 수가 있다. '번으로부터 받은 은혜' 를 소중히 여기는 한페이타로서는 번에서 뛰쳐나갈 마음은 없었고, 토사 번이 궤멸되는 사태는 더더욱 바라지 않았다. 즉 토사 근왕당이란 '번' 이라는 프레임을 전제로 삼은 조직으로, 그렇기 때문에 번 내부에서의 투쟁으로 종시終始하게 되었다.

  그러나 방향성을 달리하는 요시무라 토라타로는 3월 상순에 탈번脫藩하여, 무력에 의한 막부 토벌의 선봉에 서서 텐츄구미를 결성하였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나라 현에 있는 요시무라 토라타로의 무덤(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료마도 역시 3월 하순에 탈번하였다. 번의 접경지대를 넘어 이요伊予 지방을 거쳐 쵸슈로 향했다. 이 때 료마를 자택에 숨겨주면서 길 안내까지 도맡은 사람이 바로 나스 슌페이那須俊平 / 신고 부자父子였다.

  이 신고가 토요 암살사건을 일으키기 2주 전에 료마는 탈번한 것이다. 무엇이 료마를 탈번하게끔 만들었느냐? 그 이유는 확실히 밝혀지진 않았으나, 탈번 소식을 들은 한페이타는 "료마는 토사와는 맞지 않는あだたぬ 놈이다. 그냥 내버려 둬라." 고 말했다고 한다. 'あだたぬ' 란 "포용할 수 없는, 틀로 묶을 수 없는" 이란 의미로, 료마의 스케일을 짐작케 하는 말이다.

말년에 찍은 사카모토 료마의 사진(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료마가 탈번하자, 토사 근왕당의 유력자인 히라이 슈지로平井收二郞는 쿄토에 있던 자신의 여동생 카오加尾에게 편지를 보내, "료마가 찾아가도 상담에 말려들어가서는 안 된다." 고 충고하고 있다. 카오는 료마의 소꿉친구로, (료마의) '첫사랑' 상대였다고 전해진다.

  료마가 탈번한 후로 약 1년이 지나, 같은 식으로 탈번한 동지 키타조에 키츠마北添佶摩는 료마와 함께【코베 해군 조련소】에서 수학했으나, 겐지 원년(1864)에 일어난 이케다야 사건 때 신센구미에게 살해당했다.

 
  횡행하는 텐츄天誅

  분큐 2년(1862) 4월에 토요가 암살당한 것을 기점으로 그 일파는 번의 중추부에서 쓸려나갔고, 수구파 문벌들과 토사 근왕당에 동조하는 상급무사들이 번의 요직에 취임하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한페이타가 직접 번 정치에 참가하였던 건 아니다. 여기에는 엄연히 신분에 따른 장벽, '분수' 가 존재했던 것이다.

  이 무렵, 사츠마ㆍ쵸슈 두 번에 궁궐 경비를 명한 조정은 그 후 '근왕 번' 으로 간주한 토사 번에게도 동일한 칙명을 내렸다. 이에 따라 번주 토요노리를 수행한 한페이타 / 히라이 슈지로 등의 토사 근왕당들도 8월에 입경하였다. 다음 달인 윤 8월, 한페이타는 타 번과의 응접을 담당하는 지위에 취임했다. 국사를 주선하는 지위라고 간주할 수 있으리라.

야마우치 토요노리의 사진(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이렇게 되자 정국은 일변하였다. 존왕양이파 3개 번이 쿄토 경비를 위임받았기 때문이다. 과거에 막부의 앞잡이가 되어 지사들을 탄압하였던 사람들은 벌벌 떨었다. 그렇게 존왕양이파에 의한 복수,【 텐츄(天誅, 역주 : '천벌' 이란 의미) 】가 시작되었다.

  아래로 토사 근왕당이 관여한 사건들을 열거하자면 -

  우선, 토요 암살사건의 하수인이 들통날 것을 두려워하여 8월, 토사 번의 시타요코메(下橫目, 하급 감찰관) 이노우에 사이치로井上佐一郞를 오사카에서 살해하였다. 이노우에가 사건 수사를 계속하였기 때문으로, 히라이 슈지로 / 오카다 이조 등이 사이치로를 불러낸 후 목을 졸라 살해하고, 그 시체를 강에 내던져 익사한 것으로 가장시켰다고 한다.

  두 번째 텐츄는 윤 8월, 사츠마ㆍ쵸슈 두 번을 이간질하려 했다고 하여 혼마 세이이치로(本間精一郎, 에치고 지방의 로닌浪人)를, 그 다음에는 막부에 조정의 정보를 흘렸다고 하여 우고 겐바(宇鄕玄蕃, 친 막부파인 쿠죠 가문九条家 휘하의 무사)를, 그리고 지사들을 탐색하는 데 종사했던 '원숭이' 분키치(猿の文吉, 말단 포졸目明し)를 차례차례 암살하였다. 그리고 다음 달인 9월에는 수많은 지사들을 포박한 바 있던 쿄토 행정청의 포리与力 4명을 습격하여 참살하였다.

혼마 세이이치로가 살해당한 장소(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이를 위시한 사건들 중 다수에는 '살인마 이조人斬り以蔵' 가 간여했던 듯하다.

  그 동안 한페이타는 양이 결행을 재촉하기 위해 파견되는 부 칙사副勅使의 수행원 신분이 되어, 에도로 내려갔다. 이 공적에 의해 쿄토로 돌아온 한페이타는 잔류반원留守居役으로 임명되었다. '시로후다(白札, 준 상급무사)' 였던 타케치 가문이 상급무사로 등용된 것이다. 그의 가치관으로 볼 때, 대단한 영예라 생각했으리라.

  그러나 12월이 되어 히라이 슈지로 / 마사키 테츠마間崎哲馬 등이 커다란 사건을 일으켰다. 그들은 "존왕양이를 하는 데 사츠마ㆍ쵸슈에게 뒤쳐지지 말자" 고 서두른 나머지, 쇼렌인노미야(靑蓮院宮, 황족皇族으로 나카가와노미야中川宮로도 불림)에게 받은 영지(令旨, 역주 : 문서의 경칭)를 앞세워 번 정치를 철저히 쇄신하려 시도했던 것이다.

  하급무사下士들의 월권행위는 요우도의 격렬한 분노를 사, 히라이들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토사 번은 원래 신분등급이 엄격한 번이었고, 안 그래도 요우도는 토사 근왕당이 토요를 암살한 데 분개해 있었다. 그리고 분큐 3년(1863)이 되자, 드디어 막부는 요우도에게 토사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가를 내렸다.



덧글

  • 히알포스 2017/04/07 23:06 # 답글

    항상 수고하십니다.

    야마우치 한페이타라는 사람의 저 사진, 웬지 메이지 덴노랑 찍은 구도가 비슷해보이네요. 의자에 앉았지만 살짝 "삐딱한" 자세나 (학생이 저런 자세를 하면 불손하다고 생각될만큼) 칼을 찬 부분이라든지.

    당대의 유행일수도 있겠지만요.
  • 3인칭관찰자 2017/04/08 14:21 #

    감사합니다.

    정말로 사진 찍은 구도가 메이지 텐노의 사진과 비슷하군요. 친 막부 성향의 어느 화가가 유신 후에 막부 말기 인물들을 그린 그림을 본 적이 있는데 거기엔 타카스기 신사쿠가 조금 더 비스듬히 저 자세로 앉아서 따봉각을 세우고(...) 있었던 기억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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