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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마와 카이엔타이》타케치 한페이타와 토사 근왕당 (1) 역사



  이 글은《新 歷史群像シリ-ズ 20 坂本龍馬と海援隊》p.64 ~ 68. 아이카와 츠카사相川司 씨께서 집필하신〈외우畏友 타케치 한페이타武市半平太와 토사 근왕당〉을 번역한 것입니다. 막부 말기 시대 토사 번(土佐藩, 역주 : 야마우치 가문山內家 24만 석. 지금의 고치 현)의 거물인 타케치 한페이타를 중심으로 하급무사들을 결집하여 존왕양이尊王攘夷 / 일번근왕一藩勤王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활동한 토사 근왕당土佐勤王党의 흥망을 다루고 있습니다.


  토사 근왕당은 존왕양이파인 타케치 한페이타(호는 즈이잔瑞山)을 중심으로 삼아 분큐 원년(1861)에 결성되어, '일번근왕' 을 제창하였다. 그러나 토사 번에서 공무합체파公武合体派가 주도권을 잡으면서 그들은 탄압당했다.

  그 결과 케이오 원년(1865), 한페이타가 할복 명령을 받으면서 토사 근왕당은 와해되었다. 젊은 시절의 료마를 비롯하여 수많은 지사가 가맹한 토사 근왕당 - 그 4년 동안의 흥망을 추적해보기로 하자.


  토사 번의 신분제도

  분세이 12년(1829), 한페이타는 토사 지방의 후케이 마을吹井村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코다테小楯. 외숙부이자 국학자였던 카모치 마사즈미鹿持雅澄가 지어준 이름으로, "텐노天皇의 방패가 되어라" 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이야기를 계속하기 전에 토사 번의 신분제도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기로 하자.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 케이죠 5년=1600년) 당시 동군인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가담한 야마우치 카즈토요(山內一豊, 토오토우미 카케가와遠江掛川 6만 석 다이묘)는, 서군에 가담하였던 쵸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盛親를 대신하여 토사 지방(24만 석)을 하사받았다.

기후 현 쿠죠 시에 세워진 카즈토요와 그 아내의 동상(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토사 번주가 된 카즈토요는 일약 '한 지방을 다스리는 다이묘' 로 발탁되어【마츠다이라 토사노카미】칭호를 쓰는 것도 허락받았다. 바꾸어 말하자면, 야마우치 가문은 막부로부터 다대한 "은혜御恩" 를 받았단 말이 된다.

  토사 번에서는 카케가와에서 데리고 온 가신들을 상급무사(上士, 상격上格), 쵸소카베의 옛 신하들이었던 토착 무사들을 하급무사(下士, 경격輕格)로 구분하였다. 새로운 영주에 의한 통치책이었다.

  상급무사는 번의 상층인 "가로家老 / 중로中老 / 호위 기마무사馬廻 / 시동小姓 / 잔류반留守居役" 들로, 당연히 그들이 번 정치를 담당한다. 반면 하급무사는 "아시가루足輕 / 서리用人 / 향촌무사鄕士 / 촌주庄屋" 등으로 구성되었다. 번 내부의 신분등급을 제정한 것으로, 현대풍으로 말하자면 여기에는 도저히 넘을 수가 없는 '신분의 장벽' 이 존재했다.

  이와 같은 제도에서 타케치 가문은 '시로후다(白札, 준 상급무사)' 대우를 받았다. 시로후다란 상급무사와 하급무사 사이에 위치한, 실질적인 하급무사들의 리더였다.

  시로후다란 지위는 번주로부터 하사받은 은전恩典으로, 이것은 한페이타의 원점이 되었고 그 자신도 "내 가문은 은혜를 입었다." 고 서술하고 있다. 덧붙여 말하면 한페이타의 먼 친척에 해당하며 6세 연하였던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는, 하급무사 클래스에 속하는 향촌무사 출신자이다.

  그리고 번 검술사범에게 무예를 배운 한페이타는 27세의 나이(안세이 2년=1855년)에 자기 도장道場을 차렸다. 당시 번주였던 야마우치 요우도山內容堂가 문무를 장려하고 있었기에, 실력을 인정받은 한페이타는 번 내를 다니며 출장교습을 할 것을 명 받았다. 이 시기에 수많은 하급무사들과 안면을 튼 모양이다.

야마우치 요우도의 사진(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한페이타는 안세이 3년(1856), 에도에서 검술수행을 할 것을 명 받아, 쿄신메이치 유파鏡新明智流인 모모노이 슌조桃井春藏의【시가쿠칸士学館】에 입문하였다. 이곳은 호쿠신잇토 유파(北辰一刀流, 치바 슈사쿠千葉周作의 겐부칸玄武館) / 신토무넨 유파(神道無念流, 사이토 야쿠로斎藤弥九郎의 렘페이칸練兵館)와 나란히 에도 3대 도장을 구성하는 곳이었다.

  이 검술수행 시대의 동행자 중에는, 훗날 "살인마人斬り" 라고 불리게 된 오카다 이조岡田以蔵도 있었다. 같은 시기, 사카모토 료마도 에도로 출장가서 치바 사다키치(千葉定吉, 슈사쿠의 동생)의 문하로 들어가, 호쿠신잇토류를 배우는 중이었다.

  한페이타는 시가쿠칸의 학생회장塾頭을 맡을 정도로 실력이 올라갔는데, 안세이 4년(1857) 8월에 자신의 친척이자 동문이었던 야마모토 타쿠마山本琢磨가 에도에서 사건을 쳤다. 료마에게도 사촌뻘이 되는 인물이다.

  술에 취한 야마모토 타쿠마는 상인에게 난폭하게 굴면서 값비싼 시계를 빼앗아 전당포에 맡겨놓았다. 그러나 강탈사건은 얼마 안 가 발각되어, 번 저택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이 때, 한페이타는 료마와 상담하여 사건을 조용하게 처리케 하고, 야마모토를 도망보냈다고 한다.

  이러한 계기도 존재하였기에 한페이타와 료마의 관계가 돈독해진 것이리라. 그러나 다음 달, 가족이 병에 걸리면서 한페이타는 토사로 되돌아갔다.    

    
  토사 근왕당의 결성

  페리 내항(카에이 6년=1853년) 이후, 일본 안팏의 정치정세는 긴박해져 갔다. 막부에서는 쇼군 후계자 문제가 부상하여, 야마우치 요우도들은 히토츠바시 요시노부(一橋慶喜, 훗날의 15대 쇼군) 옹립을 도모했으나 다이로大老인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와의 정쟁에서 패배하여, 요우도는 은거한 후 에도에서 근신할 것을 명 받았다.

이이 나오스케의 초상화(출처 : 세타가야 구 홈페이지)


  위세를 더해가던 이이 나오스케는 존왕양이파 지사들을 격렬히 탄압하였다. 흔히 말하는 '안세이의 대옥安政の大獄' 이다. 그러나 만엔 원년(1860), 미토 번(水戸藩, 역주 : 미토 토쿠가와 가문水戸德川家 25만 석. 지금의 이바라키 현茨城県 일부)의 로시(浪士, 역주 : 번을 뛰쳐나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무사. 낭인)들에 의해 이이는 사쿠라다 문桜田門 앞에서 암살되고 만다. 그러나 그것은 요우도의 즉각적인 복권復權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여론이 끓어오르는 가운데, 분큐 원년(1861) 4월, 한페이타는 에도로 향했다. 번에는 '검술수행' 을 명목으로 달았으나, 실제로는 향토무사 출신인 오오이시 야타로大石弥太郞의 초대를 받은 것이었다.

  카모치(역주 : 한페이타의 외삼촌)의 문하생이었던 오오이시 야타로는 번의 명령에 따라 에도에서 서양 학문을 배우고 있었는데, 그런 한편으론 존왕양이파 지사들과 교류하였고, 막부가 요우도에게 내린 처분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의 소개로 한페이타는 쵸슈 번(長州藩, 역주 : 모리 가문毛利家 36만 9천 석. 지금의 야마구치 현山口県)의 쿠사카 겐즈이久坂玄瑞, 그리고 사츠마 번(薩摩藩, 시마즈 가문島津家 77만 석. 지금의 카고시마 현)의 무사들과 교류하여 존왕양이 사상을 확고히 하게 된다.

(료마를 그다지 좋게 평가하지 않았던) 쿠사카 겐즈이(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중망衆望이 높았던 한페이타는 8월, 토사 번의 저택인 츠키지 저택築地屋敷에서 오오이시 야타로 / 시마무라 에이키치(島村衛吉, 한페이타의 사촌동생) / 코우노 토가마(河野敏鎌, 당시의 이름은 마스야万寿弥. 훗날 자작子爵이 됨)를 위시한 동지 8명과 상의하여, 토사 근왕당을 결성하였다.

  맹약서에는 존왕양이가 제창되었고,【 한번 비단깃발(錦旗, 역주 : 텐노를 상징하는 깃발)을 내걸 수 있다면 단결하여 물불을 가리지 않을 것을 신명에게 맹세한다. 위로는 미카도(帝, 텐노)의 지극하신 마음을 받들어 모시고 우리 노공(老公, 요우도)의 뜻을 이어받으며, 아래로는 만민의 근심을 덜어주고자 한다... 】(필자의 의역) 는 식으로 이어진다.

  말하자면 "前 번주였던 요우도의 뜻을 이어 존왕양이 운동에 투신하겠다." 는 스탠스로, 요우도에 대한 충성심을 전제로 두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바꿔 말하면 "번을 뛰쳐나가 막부 토벌 활동에 투신하겠다." 는 식의 래디컬한 발상을 한페이타는 갖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 달인 9월, 토사로 돌아간 한페이타는 동지들을 모집하여, 위에서 9번째(토사에 있던 자들 중에서는 TOP)로 이름을 올린 료마를 위시하여 히라이 슈지로平井收二郞 / 마사키 테츠마間崎哲馬 / 나카오카 신타로中岡慎太郎 / 타나카 미츠아키(田中光顕, 당시 켄스케顯助라 불렸다. 훗날 백작伯爵이 됨) / 히지카타 히사모토(土方久元, 당시 쿠스자에몬楠左衛門이라 불렸다. 훗날 백작이 됨) 등이 가맹하였다.

  그 숫자는 192명. 상급무사 2명(역주 : 히라이 / 마사키)을 제외하면 모두가 항토무사 / 촌주 등 하급무사 출신자들이었다. 그리고 명부에서는 삭제되었으나 요시무라 토라타로吉村寅太郎 / 오카다 이조 등도 참가하였기에, 실제 숫자는 2백 명이 넘었으리라 생각된다.

  지금까지는 일개의 격검가(擊劍家, 검술가)에 지나지 않았던 료마는, 이 타케치의 영향을 받아 근왕사상에 경도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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