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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와다 테츠오] 크리스트 교의 일본 전래 이야기 역사



  프란시스코 자비에르는 왜 일본으로 향했는가?

  포르투갈 사람이 타네가시마 섬에 표착한지 6년이 지난 텐분 18년(1549), 예수회 수사 프란시스코 자비에르가 카고시마에 상륙했다. 유럽 측에서 일컫는【자비에르의 일본 발견】이다.

  이후의 포교 상황을 짚어보기 이전에, 예수회란 무엇이며 프란시스코 자비엘이 어떠한 인물이었는지부터 다루도록 하겠다.


예수회의 문장(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예수회는【야소회耶蘇會】라고도 표기되며, 종교개혁에 자극받아 로마 교회 내부를 개혁하기 위해 결성되었다.【이그나티우스 로욜라】를 총회장으로 삼아 '청빈 / 정결 / 순명'을 중시하던 엄격한 조직으로, 1540년에 로마 교황【바오로 3세】의 인가를 받았다.

  때마침 이 시기에 포르투갈 국왕【주앙 3세】가 무력에 의한 식민지 지배에서 탈피하고 크리스트 교를 앞세운 교화정책을 펴기로 노선을 전환하면서, 예수회 수사들을 파견시켜 인도에 포교활동을 해 줄 것을 교황에게 요청했다. 예수회 수사는 당시 1천여 명에 달해 있었는데 이들은 아프리카, 아시아 순으로 포교 영역을 넓혀 나갔다. 예수회 수사 자비에르가【고아】,【말라카】로 찾아가 포교하고 다닌 건 그러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비에르는 1506년,【나바라 왕국】귀족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나바라 왕국이란 에스파냐와 프랑스 국경에 위치한 소국으로 자비에르가 태어난 직후인 1512년에 에스파냐에게 병합당하였고, 1593년에는 프랑스에 병합당했다. 이 때문에 자비에르를 '에스파냐 인' 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프란시스코 자비에르의 초상(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자비에르는 1542년 ~ 1548년까지 인도 동해안과 서해안 / 말라카 / 몰루카 제도 등지에서 포교하였는데, 1547년 말라카에서 어느 일본인 청년을 만난 것이 자비에르의 운명을 바꾸어놓게 되었다. 그 청년의 이름은【야지로ヤジロ】라고 했다. '안지로アンジロ' 라고 기록한 사료도 존재하는데, 듣는 사람에 따라 그렇게 들릴 수도 있었으리라. 한자로 '야지로弥次郞' 라고 적은 책도 존재하며, 그랬을 가능성은 높다고 생각되지만 확실치는 않으므로, 여기서는 '야지로ヤジロ' 라고 하겠다.

  야지로는 출신지인 오오스미大隅 지방(혹 사츠마薩摩 지방?)에서 사람을 죽이고 국외로 도망친 자였다고 한다. 자비에르는 야지로로부터 일본이라는 나라의 사정을 듣고, 일본어도 배우게 되면서 일본 포교를 결심하였다.


자비에르의 여정(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그리고 텐분 18년(1549) (자비에르는) 카고시마鹿児島에 상륙하여 영주인 시마즈 타카히사島津貴久의 허가를 받아 포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포교가 진척되어가자 토착 불교세력들이 맹렬히 반대하면서, 결국은 카고시마 포교를 단념하고 히젠 지방 히라도平戶로 옮겨가 거기서 다시 쿄토京都로 출발했다. 이는 예수회 방침에 따라 '일본국왕' 으로부터 직접 포교 허가를 받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텐노天皇에게는 실권이 없었고, 쇼군將軍도 쿄토 밖으로 쫓겨난 상태라, 결국은 다시 큐슈로 되돌아왔다. 그 도중에 스오우周防 지방 야마구치山口에서 오우치 요시타카大內義隆의 보호를 받았고, 분고豊後 지방 후나이府內의 영주인 오토모 소린大友宗麟의 보호를 받게 되면서 비로소 포교활동은 순조로이 진척될 수 있었다.


  포르투갈에 의한 일본 식민지화 계획이란?

  말하자면 자비에르 본인은 포교를 하기 위해 길을 닦던 단계에서 일본을 떠났으나, 그 뒤를 이어 일본으로 온【파드레(사제)】. 즉 바테렌伴天連과【이루만(수도사修道士)】들의 활약에 힘입어 크리스트 교는 착실히 뿌리를 내려가게 된다.

  이 무렵엔 불교 그 자체가 쇠퇴해 있던 것도 한몫 하였던데다, 예수회에서 그 지방의 센고쿠다이묘들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하여 다이묘에게 세례를 준 것이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들을【크리스찬 다이묘】라고 부르는데, 히젠 지방의 오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 / 앞에서 거론한 오토모 소린 /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를 위시한 큐슈의 다이묘들이 주로【크리스찬 다이묘】가 되었다.


오토모 소린(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하는 점이 있는데, 그들은 단순히 신앙상의 이유 때문에 세례를 받은 건 아니었다. 예수회 수사들은 센고쿠다이묘戦国大名인 그들이 인접 지방과 싸워서 이기기 위해 조총鉄砲 / 화약火藥 / 가죽皮 / 철鉄 같은 군수물자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포르투갈 상선을 통해 이들 물자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영지 내에 포교를 할 수 있는 허가를 받는 식이었다.

  이렇게 하여 텐쇼 10년(1582)에 이르러서는 미야코(都, 키나이畿內 지방)에 2만 5천 명 / 분고 지방에 1만 명 / 시모(下, 분고 지방을 제외한 나머지 큐슈 일대)에 11만 5천 명. 도합 15만 명의 크리스트 교 신자가 생겨났다. 당시 일본의 전체인구는 1,500만 명 정도였으므로 그 중의 1%가 크리스트 교 신자였다는 말이다. 그리고 몇 년이 더 지나자 크리스트 교 신자는 70만 명으로 급증하였다.


천주교 의식을 수행하는 사제와 일본인들
(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그런데 앞에서도 조금 다루었듯이,【토르데실랴스 조약】을 맺어 아시아 / 아프리카 영유를 주장할 수 있게 된 포르투갈은 이 때의 예수회 수사들이 일본에서 포교활동을 하는 것을 어떻게 지켜보고 있었을까? 인도나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시행하였던 식민지화 방침은 없었던 것일까?

  이 문제를 생각해보는 데는 재미있는 사료가 존재한다. 약간 시대가 흐른 1599년 2월 25일자로【페드로 데 라 크루스】라는 예수회 수사가 나가사키에서 예수회 총회장에게 보낸 서간(〈로마 예수회 문서관 문서〉) 의 한 구절에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 일본은 해군력이 극도로 취약하고, 병기도 부족해졌다. 그렇기에 만일 국왕 폐하께서 결의만 하신다면, 우리 나라의 군대가 일거에 이 나라로 쳐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이 곳은 섬나라이기에, 이들의 주된 섬들 중 하나인 시모下나 시코쿠四國를 포위하는 정도는 용이할 것이다. 】

  '시모' 라는 건 큐슈를 가리키는 단어로, 포르투갈(역주 : 1599년 당시 포르투갈은 에스파냐에게 합병된 상태였다. 본문의 소소한 오류가 아닐까 추측)이 일본에 쳐들어가면 큐슈나 시코쿠 정도는 빼앗을 수 있을 거라고 주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종래 이 문서의 존재에 대해선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았던 듯, 포르투갈의 일본 식민지화 계획도 제대로 논의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서간의 발신자인 페드로 데 라 크루스는 나가사키에서 신학을 가르치던, 예수회 내부에서도 문화인 / 지식인이었기에, 이와 같은 인물이 예수회 총회장에게 일본에 대한 군사력 행사를 권고하였다는 점은 무시할 수 없으리라 생각된다.


에도 시대 신앙검증 용도로 사용되던 후미에(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히데요시 / 이에야스가 그들의 의도를 어느 정도까지 꿰뚫어보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점에 한정해서 볼 경우엔, 히데요시와 이에야스의 크리스트 교 탄압은 결과적으로 포르투갈의 군사적 진출을 저지하는 작용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크리스트 교는 금지되어 갔으나 이들은 일본에 상당히 커다란 영향을 가져다 주었다. 그들의 문화는【남만문화南蠻文化】라는 이름으로 의식주 속에 뿌리를 내렸고, 남만류 외과南蠻流外科라 불리던 외과수술 등을 비롯한 의료적 면에서도 뚜렷한 자취를 남겼던 것이다.


출처 : 오와다 테츠오小和田哲男,《日本の歴史がわかる本 室町ㆍ戰國 ~ 江戶時代 篇》
p.106 ~ 110. 三笠書房, 1991.

      

덧글

  • 2017/03/31 16:15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7/03/31 20:23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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