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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투 오다 군단》이세 나가시마 섬멸전 (下) ┣ 激鬪 織田軍團 (完)



  이 글은 (舊)《歷史群像シリ-ズ 20 激鬪 織田軍團》의 P. 110 ~ 113페이지에 수록된,《노부나가와 잇키》제 3화로, 일본 전국시대 당시 혼간사의 지부로 이세伊勢 지방 북쪽 끄트머리에서 세력을 떨치던 나가시마 간쇼사長島願証寺가 어떤 내력을 가졌고, 어떤 조직을 형성했으며, 어떤 말로를 맞이했는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필자는 1991년 기준으로 나가시마쵸 중앙공민관 관장이셨던 코지마 사토루小島悟 씨입니다.


  제 1차 나가시마 공격

  입경하여 천하를 통일하는 데 뜻을 두고 있던 노부나가에게 있어 오와리尾張 / 미노美濃 / 미카와三河 지방의 패잔 무사落武者들을 받아들이면서 토카이東海 지방에 권세를 떨치고 있던 정토진종 교단은 반드시 토벌해야 할 상대였다. 노부나가는 나가시마를 철저히 공략하기로 결의했다.

  겐키 2년(1571) 5월 12일, 노부나가는 5만 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나가시마를 공략하기 위해 출진, 츠시마津島에 본진을 구축했다. 그리고 병력을 세 갈래로 나누어 주력부대는 츠시마에서 남하하고, 키소 강가를 따라 남하하도록 한 나카스지구치中筋口 / 타도 쪽을 남하하는 카와니시川西 이상 세 부대로 공격을 개시했다.

  이를 맞아 싸우는 나가시마 군의 총지휘관 시모즈마 부젠下間豊前은, 윤중지대라는 지형적 특색을 고려하여 일단 오다 군을 윤중 속으로 끌어들인 후, 야음을 틈타 강 제방을 터트려 오다 군을 탁류 속에 가둬버리는 게릴라 전법을 채용했다. 조금도 죽음을 두러워하지 않는 농민 신도들은 열심히 염불을 외면서 아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전진해왔기에, 오다 측이 공포심을 느낄 정도였다.

우지이에 보쿠젠의 무덤(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오다 군은 이 나가시마 군의 게릴라 전법에 농락당하여 우지이에 보쿠젠(氏家卜全, 나오모토直元)이 전사하고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가 부상당했으며, 그 외에도 이미 오다 군에 귀복했던 쿠와나桑名 / 이나베員弁의 많은 무사대장들이 죽음을 당했다. 노부나가는 싸운지 고작 며칠 만에 참패를 당하고 5월 16일, 군대를 수습하여 기후岐阜로 철수했다. 이 때 각지에 불을 지른 후 물러났다.

  타도 신사多度神社의 본궁을 위시하여 그 말사(末寺, 역주 : 본사에 배속된 보조 사원) / 신보(神宝, 역주 : 신사의 재보) / 신궁사(神宮寺, 역주 : 신사 내부의 절) 일체가 병화에 의해 소실된 것이 바로 이 때였다. 왜냐면, 쿠와나의 주민이 쿠와나의 수호신總鎮守을 모시는 타도 신사에 노부나가 조복(調伏, 역주 : 신이나 부처님의 이름으로 악인을 물리침) 기도를 드렸기에 보복을 한 것이다.

재건되어 지금까지 전해지는 타도 신사의 본사 건물(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노부나가는 이번의 나가시마 공격을 통해 잇코종 신도들의 무시무시한 저항력을 다시 한 번 체감하게 되었다. 반면 나가시마의 신도들은 노부나가 군을 격퇴하면서 의기충천하여, 그 세력은 절정에 다다르고 있었다.

  노부나가는 그 해 8월에 다시 오우미近江 지방으로 출병, 9월 12일에는 후세에 악명을 남기게 된 히에이 산 방화ㆍ토벌을 강행하였다. 그런 한편으로 노부나가는 겐키 3년(1572) 9월 이후 2개월 간 숙적인 이시야마 혼간사와 강화를 맺었는데, 나가시마 측도 그 사이에 더욱더 수비를 굳히고 전투준비를 다져 나갔다.


  제 2차 나가시마 공격

  타케다 신겐武田信玄 / 아자이 나가마사浅井長政 /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義景들이 멸망당한 데 힘입어, 노부나가는 지난 번의 병력을 상회하는 6만 군대를 이끌고 다시 나가시마 공격을 시도했다. 텐쇼 원년(1573) 9월 24일의 일이다. 이번에는 간쇼사를 지탱하고 있던 쿠와나 / 이나베 지방의 신도들이 소속된 말사들과 간쇼사에 우호적인 토호들을 섬멸하여 그 손발을 끊어놓은 후, 본성인 나가시마를 공격할 작정이었다.

  기후에서 오가키로 향한 노부나가는 9월 25일에 지금의 기후 현 카이즈 군海津郡 오오타太田에 있는 코이나바 성小稻葉城으로 본진을 진출시켰다. 그리고 고슈 군江州軍을 주체로 삼은 사쿠마 겐바(佐久間玄蕃, 모리마사盛政) /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들은 고슈의 에이겐사永源寺를 거쳐 핫푸 고개八風峠, 스기토우게 고개杉峠를 넘어 치구사千草를 넘은 후 쿠와나 / 코모노로 진격했다.

우타가와 요시카즈歌川芳員가 그린 나가시마 전투도(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북 이세 지방의 말사와 무사 계급 신도들은 성 / 성채를 구축하여 격렬히 저항했으나 중과부적으로, 필사적으로 저항한 성 / 성채들도 계속해서 함락되어갔다. 마지막까지 저항한 것은 하쿠산 성白山城의 나카무라 죠겐中村將監이었다. 노부나가는 20여 일에 걸쳐 성 내부를 향해 땅굴을 판 후, 이곳을 통해 성으로 침투하여 결국 성을 함락시켰다.

  노부나가는 1개월 간의 전투 끝에 나가시마에 가담하였던 북 이세 일대을 평정하였음에도, 카와치 / 야마토 지방에 反 노부나가 파의 불온한 움직임이 감지되었기에 일단 타키가와 카즈마스를 쿠와나 야다 성矢田城에 잔류시키고, 노부나가는 이번에도 나가시마 성을 공격하지는 않고 급히 오가키 성으로 군대를 물렸다.

  오가키로 귀성하는 도중, 나가시마 신도들은 타도 ~ 요로養老 사이에 있는 산중에 매복하였다 오다 군을 습격하여 다대한 피해를 입혔다. 오다 군은 그 일가붙이와 부하들을 많이 잃었음에도 역습에 나서지 않고,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오가키 성으로 돌아갔다. 한편 나가시마 신도들도 수많은 병력을 잃으면서, 간쇼사의 고립은 심화되었다.


  제 3차 나가시마 공격(나가시마 함락)

  다음 해인 텐쇼 2년(1574) 7월, 노부나가는 장남 노부타다信忠를 데리고 7만 대군을 인솔하여 3번째 나가시마 공격을 시도했다.

  노부나가는 이번의 전투에서 나가시마 간쇼사를 완전히 때려잡을 생각이었다. 카이 지방의 타케다 카츠요리武田勝賴가 서진西上을 위한 군대를 일으켰기에, 이를 요격하기 전에 반드시 나가시마를 토벌해야 할 필요성이 존재했다. 물론 나가시마를 박살내면 자기에게 적대적이었던 전국의 잇코종 신도들에게도 거대한 타격을 줄 수 있으리라, 고 생각했을 것이다.

  노부나가는 츠시마에 본진을 두고, 군을 나누어 사야쵸 방면에서 나가시마를 공격하는 동방 / 타도 카토리에서 마츠노키松ノ木 방면을 공격하는 니시노구치西の口 / 타츠타 마을立田村 하야오 방면에서 남하하는 나카스지구치 세 방면에서 나가시마를 공격했다. 노부나가는 뒤이어 고묘五明 / 카로토加路戸 / 토노나殿名 둥 여러 성채를 함락시켜 야진野陣을 전진배치하며, 본격적으로 철저한 나가시마 공격을 개시하게 되었다.

  육상의 기마전법에 익숙해져 있던 오다 군은 과거 2차례에 걸친 나가시마 공격에서 물의 고장水鄕인 나가시마를 공격하는 데 애를 먹었던 것을 뼈저리게 기억하고 있었다. 노부나가는 이번의 나가시마 공격에선 이미 오다 측에 귀순한 시마 지방의 해적 쿠키 요시타카九鬼嘉隆가 지휘하는 수군을 위시하여 중부 이세의 쿠스노키楠 / 시라코白子 / 아노츠安濃津, 그리고 미카와 지방의 노마野間 / 토코나메常滑 등지의 군선과 소선박을 동원한 수군을 이용해 나가시마 윤중의 성과 성채들을 포위, 적의 군량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쿠키 요시타카의 초상화(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나가시마 측은 하구 앞 해상에서 경계에 나선 오다 군에 의해 기대하던 이시야마 혼간사石山本願寺로부터의 원조가 끊기면서, 서서히 그 전력이 저하되어 갔다. 식량부족에 의해 아사자들이 나오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견고한 수비를 자랑하던 나가시마의 하지로端城들도 서서히 함락되어 갔다.

  5대 하지로 중 하나인 오오도리이 성채大鳥居砦도 결국 (오다 측에) 항복을 받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포위도 풀어주지 않았다. 8월 2일 밤, 몰아치는 비바람에 편승하여 신도 1천 여 명이 소형 선박을 타고 성에서 탈출을 시도했으나 즉각 노부나가 군에 제압당하여, 노인과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참살당하였다.

  이런 식으로 3개월에 걸친 농성전이 계속되었고, 나가시마 측은 나가시마 본성과 야나가시마屋長島 / 나카에中江, 이상 3개 성만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식량부족은 극한에 달하였기에, 나가시마 함락은 이미 시간문제였다.

《신쵸코우키信長公記》에 따르면 나가시마 함락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9월 29일, 나가시마 성은 항복을 받아달라고 요청했다. 노부나가는 이를 허락했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자들은 기뻐하며 배를 타고 성에서 빠져나와 도망쳤다. 그러나 탈출 도중 노부나가 밑의 조총부대들이 그들을 향해 발포하여, 많은 사람들이 강물 속으로 떨어졌고 강물은 죽은 자들의 선혈로 새빨갛게 물들었다.

  한편 야나기시마 / 나카에 성에 있던 자들에 대해서는 성 사방에 몇 겹으로 된 울타리를 설치한 후, 사방에서 불을 질러 그들을 산 채로 타 죽게 했다. 여기서 죽은 자만 해도 2만 명 정도가 된다고 한다.

  이렇게 나가시마 잇코잇키 신도를 평정한 노부나가는 쿠와나 야다 성주 타키가와 카즈마스에게 나가시마 땅을 하사하여, 기존의 영지와 겸임영유하게 했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간쇼사의 쇼케이(証惠, 쇼이証意의 아버지. 쇼이는 제 1차 나가시마 공격 당시 전사하였다)는 성이 함락되기 전날 81세란 고령의 몸으로 강에 투신자살했고, 사주寺主 겐닌顯忍은 노다와키野田脇에서 전사했다. 겐닌의 조카로 당시 2세였던 쥰케이准惠 만은 성이 함락될 때 갈대로 만든 강보에 싸여 강물을 따라 흘러가는 것을 타도 쇼카쿠사正覺寺의 주지가 구조하여 각지를 전전하면서 양육한 끝에, 장성한 후 쿠와나에서 간쇼사를 재건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나가시마 동란 당시 이시야마 혼간사에서 나가시마로 파견된 시모즈마 부젠을 위시한 대다수의 스님들은 전사하였으나, 난을 피한 자도 있었다. 그들은 한때 호쿠리쿠北陸 지방에 있는 정토진종 교단으로 도망쳤는데, 훗날 나가시마 땅으로 돌아와 절의 기틀을 다시 닦고 교세 부흥을 위해 힘쓴 자들도 있다. 겐로쿠 3년(1690)에 혼간사는 6개 절의 공칭을 허가하였다. 


나가시마 겐죠사源盛寺 시조 오카모토 쇼스케岡本庄介
나가시마 코우에이사光榮寺 시조 이이다 큐조飯田九藏
나가시마 젠묘사善明寺 시조 나가사키 신조長崎新藏
나가시마 신교사深行寺 시조 히라노 치닌平野知忍
스즈카 안요사安養寺 시조 야마우치 나나스케山內七助
기후 츄토사中島寺 시조 스이타니 헤이우에몬水谷兵右衛門

나가시마 잇코잇키 순난비(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그리고, 나가시마 잇코잇키 당시 존재했던 스기에 간쇼사의 후일담은 여러 설이 분분하여 확실하지가 않다. 현재 나가시마쵸 마타키又木에 존재하는 간쇼사는 이 스기에 간쇼사와 직접적인 인연이 있는 건 아닌 듯 싶으나, 정토진종 혼간사 파의 말사로 경내에 나가시마 잇코잇키 400주년 추도법요가 열렸을 당시에 만들어진 순난비殉難之碑가 (이곳에) 세워져 있다. 

  

덧글

  • 깨알같은 하프물범 2017/03/30 23:43 # 답글

    5~6~7만으로 병력을 계속 동원할 수 있었던게 승리할 수 있었던 능력이군요. 신기한 재주입니다. 분명 전사상자들이 나왔을텐데
  • 3인칭관찰자 2017/03/31 07:54 #

    노부나가가 처음(1571)에 5만 명 동원했을 땐 노부나가 포위망 발동 중으로 그의 세력 사방에 적이 있었거든요. 1573년에 적들을 여럿 쓰러뜨려서 병력동원에 여유가 생겼기에 6만, 7만 명씩 동원할 수 있었지요.

    그리고 당시 노부나가의 영지인 오와리 / 미노 / 이세 / 오우미 지방 등이 인구밀도가 높은데다 쌀 생산량 등에서도 대단히 풍요로운 지방이었던 것도 전사상자를 메우고도 남을 정도로 많은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자산이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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