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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투 오다 군단》이세 나가시마 섬멸전 (上) ┣ 激鬪 織田軍團 (完)



  이 글은 (舊)《歷史群像シリ-ズ 20 激鬪 織田軍團》의 P. 110 ~ 113페이지에 수록된,《노부나가와 잇키》제 3화로, 일본 전국시대 당시 혼간사의 지부로 이세伊勢 지방 북쪽 끄트머리에서 세력을 떨치던 나가시마 간쇼사長島願証寺가 어떤 내력을 가졌고, 어떤 조직을 형성했으며, 어떤 말로를 맞이했는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필자는 1991년 기준으로 나가시마쵸 중앙공민관 관장이셨던 코지마 사토루小島悟 씨입니다.


  간쇼사와 잇코종 신도들一向宗徒

  신란 상인親鸞上人에 의해 발흥한 정토진종(浄土真宗, 잇코종)은 혼간사本願寺 8대 법주인 렌뇨蓮如 시기에 그 교세를 엄청나게 확대하였다. 렌뇨의 아들인 렌쥰蓮淳이 나가시마 스기에杉江에 위치한 간쇼사의 절 주인으로 맞아들여진 때는 메이오 6년(1497)이다.


지금의 나가시마에 세워져 있는 스파랜드(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이 시기 정토진종 교단은 렌쥰의 아버지 렌뇨가 토카이東海 지방으로 정력적인 포교사업을 벌이면서 미카와三河 / 오와리尾張 / 미노美濃 세 지방에 걸친 일대 세력을 갖추게 되었는데, 그 여세를 몰아 풍요한 곡창지대인 이세 지방으로 교세확대를 도모하는 데는 이 나가시마 땅만큼 적합한 곳도 없었다.

  이렇게 하여 정토진종 교단은 이 지방에서도 불법의 왕국佛法王國을 구축하는 것을 지향점으로 삼았는데, 이들은 천하포무天下布武를 지향하던 노부나가로서도 방심할 수 없는 세력이었다.


혼간사 8대 법주 렌뇨(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당시 나가시마는 분메이 14년(1482)에 이 땅에 도래한 이세 지방 아노安濃의 이토 시게하루伊藤重晴가, 칸겐 3년(1245) 당시 전직 셋쇼였던 후지와라노 미치이에藤原道家가 거처로 삼은 바 있던 바이시(廢址, 현재의 츄부 소학교 / 나가시마 중학교가 있는 땅)에 있는 성채를 재건하여, 이 곳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토 일족은 이세 코쿠시國司 키타바타케 일족北畠一族과 인연이 있는 나가노 일족長野一族의 일원으로, 이세 최북단에 위치한 나가시마 땅에 이세 코쿠시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성을 견고히 한 것이리라.

  처음에 간쇼사는 이 이토 일족과 교유交遊하는 관계였고 평화적으로 교세를 확장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갈수록 이토 일족이 약탈과 행패를 저지르면서 농민들 가운데 굶어 죽는 자가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농민들은 마침 이 무렵에 교세를 확대하던 간쇼사에 호의를 품고서 그들에게 (자기들을) 보호해줄 것을 의뢰했다.

  이에 이르러 간쇼사 측은 이토 일족을 나가시마 땅에서 추방하고, 간쇼사의 쇼이証意가 사실상 이곳의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간쇼사와 핫토리 당服部黨

  이렇게 하여 간쇼사는 동란 속에서 고통을 받던 정토진종 신도 계열 농민들을 지켜나가면서, 지속적으로 교세를 확대하기 위해 노력했다. 간쇼사의 세력이 갈수록 강대해짐에 따라 전국시대 동란 속에서 생겨난 도망 무사落武者들이 간쇼사를 의지하여 모여들면서 간쇼사는 더욱 더 세력을 강대하게 만들 수 있었다. 말사末寺가 되는 절寺門들도 많이 늘어났고, 이세 / 오와리 / 미노 지방 토호들 가운데서도 간쇼사에 귀의하는 자가 많아졌다.

  특히 우구이우라(鯏浦, 현재의 아이치 현 야토미쵸弥富町)에 본거지를 둔 핫토리 토모사다服部友貞를 수령으로 삼은 핫토리 당은 간쇼사 밑에서 허다히 지휘채를 휘둘렀고, 훗날 오다 노부나가가 나가시마 간쇼사를 공격해왔을 때도 크게 분투하게 된다.

  핫토리 당의 당수 토모사다가 간쇼사와 행동을 같이 하게 된 이후, 핫토리 당은 노부나가에게 대항하여 그 위령에 따르지 않는 행동을 노골적으로 하였기에 노부나가는 코지 2년(1556)에 모리야마 성주守山城主였던 오다 마고쥬로織田孫十郞에게 이들을 정벌하도록 했으나, 오히려 오다 군이 패퇴하고 말았다.

한때 핫토리 당의 거점이었던 오와리 카니에 성蟹江城 성터(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그 이후에도 아마 군海部郡 토다노쇼의 이시바시 요시타다石橋義忠 / 기후 성주 사이토 타츠오키斎藤龍興 등도 오다 노부나가의 공격을 받아 나가시마로 패퇴한 후 핫토리 당과 결탁하는 등, 수많은 도망무사들이 나가시마로 모여들어 노부나가에게 반항하였다.


  노부나가의 이세 공략

  노부나가는 에이로쿠 10년(1567) ~ 에이로쿠 13년(1570)까지 세 번에 걸쳐 이세 지방을 공격했다. 그는 미카와 / 오와리 / 미노 세 지방 대부분을 자신의 지배하에 두었으나, 염원하던 입경을 위해서는 다시 오우미近江 일대를 평정할 필요가 있었고, 정면에 위치한 오우미 지방과 마찬가지로 이세 지방의 세력들도 커다란 장애물이 되어 있었다. 이 이세 공격에서 중심이 되었던 인물이 노부나가의 부장인 타키가와 카즈마스滝川一益였다.


에도 시대에 그려진 타키가와 카즈마스의 삽화(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타키가와 카즈마스는 우선 북 이세 지방을 공격하였는데, 그는 오와리 / 미노 지방과 가장 가까운 데 위치하였던 나가시마 성을 피하고 이부키 산의 산기슭으로 빠져나가 타도多度를 우회하여, 쿠와나桑名 / 이나베員弁 / 아사아게朝明 등의 성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이후 노부나가는 3년 여의 세월을 들여 이세 지방 최대의 세력이었던 키타바타케 일족들까지도 자신의 지배하에 두는 데 성공했다. 남은 건 나가시마 성 뿐이었다.

  당시 나가시마 성은 성주인 간쇼사 쇼이 아래 약 10만 명의 신도를 보유한 일대세력으로 거듭나 있었다. 쇼이는 수많은 하지로(端城, 성채砦)를 쌓게 하고, 윤중지대라는 천험의 지형을 이용하여 강력한 세력을 휘둘렀다.

  당시 성채의 모습은 대략 다음과 같다.


  ■ 간쇼사의 배비 : ○가 붙여진 곳은 그 중에서도 특히 견고했다.

  - 본성 : 나가시마 성(지금의 나가시마쵸 니시도모西外面)
  - 승려들의 거처 : 간쇼사(지금의 나가시마쵸 스기에)
  - 하지로 오오지마 성채(大島砦, 지금의 나가시마쵸 오오지마) ○
  - 하지로 오다미사키 성채(小田御崎砦, 지금의 나가시마쵸 니시도모)
  - 하지로 나카에 성채(中江砦, 지금의 쿠와나 시桑名市 후쿠시마福島) ○
  - 하지로 오오도리이 성채(大鳥居砦, 지금의 타도쵸多度町 노시로野代) ○
  - 하지로 카토리 성채(香取砦, 지금의 타도쵸 카토리)
  - 하지로 야나가시마 성채(屋長島砦, 지금의 쿠와나 시 유리아게汰上) ○
  - 하지로 마츠노키 성채(松ノ木砦, 지금의 나가시마쵸 마츠노키)
  - 하지로 시노하시 성채(篠橋砦, 지금의 나가시마쵸 코지마小島) ○
  - 하지로 이치노에 성채(一ノ江砦, 지금의 아이치 현 사야쵸佐屋町)
  - 하지로 우구이우라 성채(鯏浦砦, 지금의 아이치 현 야토미쵸)
  - 하지로 에비에 성채(蛯江砦, 지금의 아이치 현 야토미쵸)
  - 하지로 카로토 성채(加路戶砦, 지금의 키소자키쵸 카로토)
  - 하지로 오시츠케 성채(押付砦, 지금의 나가시마쵸 오시츠케)
  - 하지로 토노메 성채(殿名砦, 지금의 나가시마쵸 토노메) 


  노부나가가 나가시마 간쇼사의 정토진종 신도왕국에 손을 대지 않고 이세 공략을 추진한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 첫번째 이유는 나가시마 간쇼사의 뒤에 더욱더 강대한 이시야마 혼간사石山本願寺 세력이 있으며, 이와 같은 종교집단을 적으로 돌려 고전하였던 카가加賀 / 미카와 / 에치젠越前 등지의 상황을 잘 아는 노부나가로선, 북부 / 중부 / 남부 이세를 우선적으로 공략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지도에서 빨간 색으로 칠해진 부분이 이세 지방(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거기에다 나가시마 땅은 수많은 수로들에 의해 육지와는 격리된 하중도들로 이루어져 있어, 섬 하나하나가 요새를 형성하는 성새였기에 노부나가가 득의로 삼는 기마전을 벌여선 공략에 곤란을 겪는 건 물론이요, 커다란 희생을 치러야 한다. 이런 나가시마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군이 필요하다. 그걸 위해서라도 오와리 / 미카와 지방은 물론, 이세와 시마志摩 지방을 손에 넣어 이세 만 전역의 군선들을 동원할 수 있는 태세를 확립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시야마 혼간사의 회문回文

  에이로쿠 11년(1568), 노부나가는 오우미의 롯카쿠 씨六角氏를 공격한 후 이어서 쿄토에서 권세를 누리던 미요시 일족三好一族을 쿄토에서 몰아내고, 9월에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를 옹립하여 쿄토로 입성했다. 요시아키는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으로 임명되었고, 천하는 노부나가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노부나가는 미노 / 오와리 / 이세 / 오우미 지방을 평정하였고, 아시카가 쇼군도 옹립한 상황이었음에도 이시야마 혼간사 세력에는 애를 먹고 있었다. 노부나가로선 어떻게든 이를 평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혼간사 측도 노부나가에게는 격렬히 저항하였다.

  겐키 원년(1570) 이시야마 혼간사는 여러 지방의 신도들에게 격문을 보내어, 결기하여 노부나가에게 대항하라고 호소하였다.

  이시야마 혼간사의 켄뇨顯如로부터 격문을 받은 나가시마 간쇼사는 이에 호응하여, 그 해 11월 16일에 오와리 지방 코키에 성(小木江城, 타츠타 마을立田村에 있던 오다 군 최전선에 위치한 성)을 공격, 노부나가의 동생인 오다 노부오키織田信興를 자살하게 만들었다.


성터만이 남은 코키에 성(출처 : 일본 위키피디아)


  화가 난 노부나가는 나가시마를 철저히 공략하기로 결의했다. 이대로 나가시마의 잇코종 신도들을 방치해두면, 기껏 힘들게 손에 넣은 이세 지방에서부터 본 영지인 오와리 지방을 향해 항상 비수가 겨눠지는 형국이 되므로, 마음 놓고 천하통일에 매진할 수 있는 여건을 잃게 된다.

  이로부터 약 5년 간, 3번에 걸친 노부나가의 나가시마 공격이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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