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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 료타로] 다이묘大名가 된 승병들 (完) 역사



  이 글은 故 시바 료타로 씨의 역사 에세이집인《역사의 세계로부터》의 19 ~ 32쪽에 수록된〈다이묘가 된 승병들〉을 번역한 포스트입니다.


  - 흔히 남도북령南都北領이라고 한다.

  북령은 히에이 산을, 남도란 나라奈良의 코후쿠사興福寺를 가리킨다.

  중세 시대에 이들은 불교계를 양분하는 양대 교단으로, 승병들의 숫자로만 봐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러나 전국시대로 접어들면서 양쪽 다 쇠미해졌다.

  히에이 산 출신으로 전국시대의 풍운에 편승한 자가 젠쇼보 케이쥰이라고 한다면, 츠츠이 요슌보 쥰케이筒井陽舜坊順慶는 코후쿠사에서 배출되어 센고쿠다이묘戰國大名로 영달했다. 이제부턴 그의 흥망을 보도록 하자.

  츠츠이 호인筒井法印 가문은, 오래된 집안이다.

  먼 옛날에는, 카와치 지방의 히라오카묘진枚岡明神을 섬기며 사원의 영지를 관리했다. 말하자면 신사神社의 집사執事였던 것이다.

  이 신사는 후지와라 씨藤原氏의 씨족신氏神을 모신 곳으로, 도읍이 나라로 옮겨지면서 카스가 신사春日神社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 후 오래도록 카스가 신사 밑에서 먹고 살았으나, 아시카가 막부 중엽에 쥰에이順永라는 호걸이 나와 코후쿠사의 승병으로 전직하였다. 카스가가 후지와라 씨의 씨족신이라면, 코후쿠사는 후지와라 일가의 절이었다. 같은 계열회사 비스무리한 것이었으니만큼 적을 옮기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코후쿠사 토가네도東金堂와 5층 목탑


  그는 호인法印 위계를 하사받아, 그 후손들이 대대로 승병단 단장을 세습하였다.

  이 쥰에이라는 인물은 야마토大和 사이다이사西大寺의 고문서에 따르면, 오에이 27년(1420년, 아시카가 요시모치足利義持 쇼군의 말년)에 사이다이사의 영지를 가로채어 강탈했다고 하니, 계율을 철저히 지키는 스님은 아니었다.

  그의 아들인 쥰슈順秀라는 자도 아버지처럼 막무가내인 남자로《도다이사 야쿠시원 일기東大寺藥師院日記》에 따르면, 카키츠 3년(1443) 10월, 코후쿠사의 영지인 고카이세키五箇関를 가로챘다고 한다. 고용한 승병단의 단장이 탐욕을 부려 사원의 영지를 빼앗은 것이므로, 강도를 길러준 셈이다.

  그 후 이 가문은 야마토 지방 내 여러 사원들의 영지를 계속 제압해가면서 차츰차츰 대호족이 되어갔다. 야마토 지방에는 사원들의 영지가 많았으므로, 사원을 전문으로 다루는 강도 일가가 흥한 것도 당연한 것이다.

  쥰케이의 아버지인 에이슌보 쥰쇼榮舜坊順昭에 이르렀을 땐 야마토 지방 내의 판도는 20만 석에 달했다고 한다. 요슌보 쥰케이는 (토쿠가와德川) 이에야스家康 소년이 슨푸 이마가와 가문駿府今川家의 인질이 되기 위해 미카와三河 지방을 떠났던 텐분 18년(1549)에 야마토 츠츠이 성筒井城에서 태어나, 20세가 되던 해 츠츠이 가문의 가법에 따라 나라 세이신원成身院에서 머리를 깎았다.


츠츠이 쥰케이의 초상


  당시 쿄토를 중심으로 키나이 지역에 급속히 세력을 뻗기 시작한 마츠나가 탄죠쇼히츠 히사히데松永彈正小弼久秀가 야마토 지방을 병탄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츠츠이 씨의 여러 성들을 줄줄이 우려뺐다.

  탄죠가 야마토로 침입하기 직전에 쥰케이의 아버지 쥰쇼는 병으로 세상을 떴는데, 병상에서 중신들을 불러모아 "단지 마음에 걸리는 건, 쿄토에 있는 탄죠의 야망이다. 내가 죽었다는 걸 알면 즉각 병사를 야마토로 파병할 것이다. 3년 동안 내 죽음을 숨겨라."

  그의 죽음과 동시에 쥰케이가 가문을 이어 가장 먼저 한 일은, 나라 시가에 거주하던 모쿠아미默阿彌라는 맹인을 사로잡아오게 한 것이었다.

  츠츠이의 포리들을 향해 모쿠아미는 "뭐야, 맹인에게 무슨 짓을 하시는 거요." 라며 분개했을 것이리라. 쥰케이는 붙들린 맹인을 밀실로 불러 포승줄을 풀어주면 말하길,

  "걱정하지 마라. 3년 간 빈둥거리기만 하면 된다. 먹을 것도, 금은도 주겠다."

  결국 아버지와 지독히 빼닮은 이 맹인 스님을 대역으로 삼은 것이다. 아버지의 유해가 비밀리에 매장된 후, 곧장 모쿠아미를 아버지가 덮던 이불 속에 눕혀놓고서 3년 동안 아버지처럼 섬겼다.

  얼마 안 가 에이로쿠 12년(1569)에 마츠나가 탄죠와 전쟁을 벌였다가 패배하여 성을 버리고 도망쳤으나, 겐키 2년(1571) 8월, 야마토 분지에서 탄죠의 군대와 전투를 벌여 크게 격파하고, 그 다음 해(1572) 5월에 오다 노부나가와 우호를 통하게 되었다.

  얼마 후 탄죠가 카와치河內 지방과 야마토 지방 접경지대에 있는 시기 산성信貴山城에 농성하며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었을 때, 쥰케이는 노부나가의 부장들과 함께 공성전에 참가하여 성을 함락시켜, 그 공적으로 야마토 지방을 하사받아 24만 석 영주가 되었다.


  - 이것 뿐이라면 요슌보 쥰케이란 이름이 후세의 서민들에게까지 알려지는 일은 없었으리라.

  그에게는 용기가 있었고, 두뇌도 뛰어났음이 분명하나, 승부사 기질은 없었다. 그러나 전국시대 무장의 자질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도박사와 같은 배짱, 그리고 감이었다.

  요슌보 쥰케이에게는 두뇌와 용기가 있었다. 그러나 감과 배짱이 없었다.


  - 텐쇼 10년(1582) 6월, 노부나가는 혼노사에서 반역의 무장叛將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에게 살해되어, 천하는 미츠히데가 계승하리라 점쳐졌다.


아케치 미츠히데의 초상


  이 때 이미 하시바 치쿠젠노카미 히데요시羽柴筑前守秀吉는 츄코쿠中國 지방을 공격하던 도중 일거에 군대의 방향을 돌려, 산요도를 거쳐 쿄토를 향해 급격히 진격하고 있었다. 일본 역사가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쥰케이는 야마토의 본거지에 있었다. 미츠히데에게도 야마토 24만 석의 향배는 중요했다.

  사신을 보내어, "만약 아군으로 가담해준다면, 큰 이익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쥰케이는 서둘러 중신들을 불러모아 협의를 했다.

  "치쿠젠(하시바)과 휴우가(아케치) 중 어느 쪽에 붙을까?"

  "코레토 휴우가노카미 님께 붙읍시다. 휴우가노카미를 도와 이번 기회에 키슈(紀州, 키이紀伊 지방) / 와슈(和州, 이즈미和泉 지방) / 카슈(河州, 카와치 지방) 세 지방을 병탄하는 게 어떻습니까." 란 의견이 많았으나, 히데요시 주식도 버리기는 힘들었다. 결국은 미츠히데가 보낸 사신을 후하게 대접하며 "차후에 출병할 것이네." 라 약속하고, 히데요시 쪽에도 가로家老인 시마 사콘島左近을 급파하여 "기회를 보아 아케치의 배후를 칠 생각입니다." 라고 말하게 한 후, 그 자신은 1만 여 명의 대군을 이끌고 눈 아래의 요도가와 강淀川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오토코야마男山 하치만 산에 올라, 눈 아래에서 펼쳐지고 있는, 천하를 판가름하는 결전의 귀추를 관망하려고 했다.(역주 : 쥰케이가 히데요시에게 밀사를 보내 복속하기로 서약한 건 사실이나, 직접 출병하지는 않았다. 그는 야마토 고오리야마 성大和郡山城에 틀어박혀서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야마자키 전투 양군 포진도


  "호라가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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