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칭관찰자

beholderer.egloos.com

포토로그



[시바 료타로] 다이묘大名가 된 승병들 (3) 역사



  이 글은 故 시바 료타로 씨의 역사 에세이집인《역사의 세계로부터》의 19 ~ 32쪽에 수록된〈다이묘가 된 승병들〉을 번역한 포스트입니다.


  토키치로의 밀사가 은밀히 미야베 마을의 젠쇼보를 찾아간 건, 겐키 원년(1570) 초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저희 주인께서 스님께 한 턱 대접하겠다고 합니다. 함께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한가."

  젠쇼보는 궁리했다. 사람의 인생이란 건, 이러한 한 순간에 결정이 나기 마련이다. 그 한 순간을 정확히 파악한 자들만이 인생의 승자가 될 수 있는 법이다.

  "함께 가도록 하지."

  젠쇼보는 이 한 마디에 생명의 위험, 그리고 자기 인생의 운명을 걸었다. 적측인 요코야마 성으로 간다면, 그곳에서 암살당한다 하더라도 손을 쓸 수가 없다. 그러나 앉아 있어서는 기회가 오지 않는다. 생사의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있었다.

  사신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준비를 해 주십시오."

  "잠시 기다리게."라고 말하며 사신을 기다리게 한 후, 젠쇼보는 성 안의 한 방에 아내 야마고젠山御前과 측실인 겟텐月天 / 슈라修羅 / 후겐普賢 / 마리시텐摩利支天을 불러놓고, 히죽 웃었다.

  "내가 만일 내일 밤까지 돌아오지 않는다면, 지불당에 쌓여 있는 금은을 나눠 가지고 도망쳐라."

  호색한이었다.

  다수의 첩을 두고, 그녀들에게 제천과 보살들의 이름을 붙여줄 정도로 시시덕거리는 남자였으나, 자신의 위기를 앞두고도 여자들이 취해야 할 처신만큼은 생각을 해두고 있었다. 다정한 남자였음이 틀림없다.

  사신 앞에 다시 젠쇼보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는 찢어진 삿갓, 누더기 의복을 걸치고서 조잡한 대나무 지팡이를 들고, "가지 않겠나?"고 말했다.

  "그런 차림으로 말입니까?"

  "아아, 이거면 됐어. 도중에 아자이 병사들과 마주칠지 모르니, 주의해야지."

  이 거지 스님은 야음을 틈타 미야베 마을을 나섰다.

  히데요시는 젠쇼보와 만나자, 그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기뻐하였다.

  "그 복장이라면, 오시는 길에 어마한 시주를 받았겠습니다 그려."

  히데요시는 젠쇼보에게 "오다 측에 붙으라."고 권유했다. 노부나가는 앞에서 언급한, 히에이 산을 공격하였던 대장이었으나, 젠쇼보는 원래부터 그런 데는 집착하지 않았다. 부처를 믿어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는 건, 히에이 산에서 학살당한 1천 수백 명의 승려와 속인들이 그 몸으로 알려주었던 것이다. 부처가 정말 존재한다면 이는 히에이 산이 아닌, 젠쇼보 스스로가 부처가 되어야 할 바였다.

  "분부 받들어 모시겠사옵니다!"

  젠쇼보는 오다 씨를 성장할 주식이라 보았다.

  그리고 오다 측 중에서도 토키치로 히데요시를 성장주로 보았다는 점이, 젠쇼보의 뛰어난 안목을 보여준다. 그는 히데요시의 가신이 되었다. '이 대장에게 기대면, 장래에는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리라.

후대에 그려진 요시츠네의 초상화


  마찬가지로 승병 출신이었던 무사시보 벤케이의 경우, 사람들은 요시츠네가 우시와카마루牛若丸라 불리던 시절부터 그를 대장감이라 생각하고 섬긴 벤케이를 "안목이 높다."고 평가했으나, 그 요시츠네에게는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기에 벤케이의 영웅담은 언제나, 그 비운의 분위기 속에서 언급된다.

  그러나 젠쇼보가 선택한 "요시츠네"는 훗날, 역사상 유례없는 강운을 거듭하면서 결국은 "타이코太閤 히데요시"로 영달하였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초상화


  히데요시는 말하자면 밑바닥에서 올라온 자였기에, 후다이譜代 신하들이라 할 부하들을 가지지 못했다. 이 점이 쓸쓸했던지, 자신의 출신지인 오와리 지방에서 대장장이 아들 / 농민의 아들 등을 데리고 와 시동으로 삼고, 그들을 심복으로 길러냈다. 카토 키요마사加藤淸正 /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且元 / 카토 요시아키加藤嘉明 /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등이 그러한 자들이었는데, 젠쇼보가 토키치로 히데요시를 섬긴 건 겐키 3년(1572)이다. 이 당시 그들은 아직 소년에 불과했기에 토키치로 시대부터 히데요시를 섬긴 고굉지신股肱之臣이라면 젠쇼보 쪽이 선배에 해당된다.

  텐쇼 8년(1580),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부장 신분으로 타지마 지방을 평정했을 때, 이 지방의 도읍이었던 토요오카豊岡의 성주로 젠쇼보를 배치하였고, 그로부터 2년 후, 히데요시는 야마시로山城 지방 야마자키에서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를 토벌하고 천하의 패권을 잡음과 동시에, 이 승병 출신의 부하에게 인슈(因州, 이나바) 지방을 주어, 톳토리鳥取 20만 석의 대영주(역주 : 실제로는 20만 석이 아니라 13만 석 영주. 5만 석 내지 8만 석이었다는 설도 있다) 로 삼았다.

에도 시대의 톳토리 성


  말하자면, 전국시대의 벤케이는 그 선배와 같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지 않았다. 비극의 영웅이 아니었기에 젠쇼보는 후세 사람들에게 사랑받지 못했고, 그가 얽힌 전설도 사료도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다.

  젠쇼보 케이쥰 스님은 케이죠 4년(1599) 3월, 톳토리 성에서 병으로 죽었다. 향년 72세.

  히데요시가 사망한 해로부터 고작 1년이 지난 후였다.

  그렇기에 케이죠 5년(1600) 9월에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 때는 이미 이 세상에 없었고, 그 아들인 교부쇼유 나가후사刑部小輔長房가 뒤를 이어 부친이 남긴 영지 가운데 5만 석을 영유했으나, 그에게는 장수로서의 기량將器이 없었다. 동군에도 서군에도 붙지 않고 우물쭈물하던 사이에 전투는 끝이 났고(역주 : 실제로는 동군에서 서군으로 배반하려 하다가 실패하고 감금되었다), 이에야스에게 영지를 빼앗기면서 미야베 가문은 역사로부터 모습을 감추었다.


덧글

  • 도연초 2017/02/26 20:39 # 답글

    츠츠이 가도 오사카의 진에 멸문지화를 당한 것을 보면(...)

    정작 혼간지의 혈통만이 승병 다이묘로서는 몰락했어도 혼간지 법주로 남아 유신을 맞았다는게 아이러니(혼간지 법주는 다름아닌 정토진종의 개조이자 희대의 대처승 신란의 후손이라 합니다)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통계 위젯 (블랙)

2165
435
415099

이 이글루를 링크한 사람 (블랙)

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