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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 료타로] 다이묘大名가 된 승병들 (1) 역사



  이 글은 故 시바 료타로 씨의 역사 에세이집인《역사의 세계로부터》의 19 ~ 32쪽에 수록된〈다이묘가 된 승병들〉을 번역한 포스트입니다.


  승병僧兵이라는 존재가 일본사에서 활약한 것은 주로 헤이안平安 말기에서 카마쿠라鎌倉 시대에 걸친 기간이었다. 헤이안 말기의 정정불안과 문화의 퇴폐화는 쿄토의 귀족들을 창백한 염세주의자로 만들었다.

  인간세상을 "물거품"이라 평가한 카모노 쵸메이鴨長明의 염세적인 수필이 독서인들 사이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것도 바로 이 시기이며, 텐노天皇와 쿠교公卿들은 무슨 일이라도 났다 하면 바로 세상에 회의를 품고서 출가하여, 세상을 등졌다.

  사람들의 마음이 쇠약해져 있었다. 그들은 인생의 곤란함을 극복해보려고는 하지 않고, 부처님께 불공을 드리는 길로 도피하였다. 타이쇼大正 시대엔【세기말世紀末】이란 단어가 유행하여 데카당스의 대명사가 되었으나, 헤이안 말기에는 카페를 찾을 수도 없었다. 그들은 카페로 가는 대신 내세來世로 가고 싶어했다.

  이 풍조에 화답한 자들이 바로 히에이 산叡山 / 코야 산高野山 / 코후쿠사興福寺 같은 당시의 교단들이었다. 그들은 열심히【극락정토極樂淨土】를 귀족들에게 팔아댔다.


  "극락에 가고 싶으면 불도에 귀의하라. 귀의하려 한다면, 우선 성의를 보여라."(《지카이닛키慈海日記》)

  성의란 건, 토지와 재물이었다. "토지를 절에 기부하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석가釋迦 님도 미심쩍어하실 사상이 유행하여, 귀족들은 앞을 다투어 히에이 산을 위시한 각 지방의 여러 대사원에 토지를 기부했다. 극락을 돈으로 사려 한 것이다.

  히에이 산 / 코야 산 / 코후쿠사 등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일본에서 손꼽는 대영주들이 되었다.

  이 토지를 누가 지키는가. 지금 시대의 지주들이라면 경찰들이 지켜주므로 괜찮지만, 당시의 중앙정권에는 경찰력이라고 할 만한 존재가 없었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사병을 양성해야만 했다.

  승병이란 건 이러한 용병부대를 가리킨다. 승려라고는 하지만 그 실태는 승려라기보단 무뢰한無賴漢이었다. 농민의 차남, 3남이 먹고 살 수 없게 되면 히에이 산으로 입산한다. 거기서 머리를 밀고, 왜나막신을 신고, 나기나타를 거머쥐면 그것만으로도 내일 끼니를 걱정할 필요는 사라지는 것이다.

  (미나모토노源) 요시츠네義經의 가신 무사시보 벤케이武藏坊弁慶도 그런 자들 중 하나였다. 전설에 따르면 "벤케이는 쿠마노 벳토 가문熊野別堂家의 자식이었다."고 하는 그럴 듯한 내력이 전해지고는 있으나, 그래도 당시의 대부호였던 쿠마노 벳토 가문 출신이 히에이 산에서 승병 대접을 받았을 리는 없다. 어떻든, 이름도 없는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먹고 살기가 힘들어, 히에이 산의 승병이 되었던 것이리라.

무사시보 벤케이


  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히에이 산 / 엔죠사園城寺 / 코후쿠사 / 코야 산 같은 교단들은 쇠미해졌다. 아무리 극락을 외쳐도 이것을 사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마음은 들끓고 있었다.

  "창 한 자루를 휘둘러 공명을 세워, 잘만 하면 다이묘大名도 될 수 있다."는 실력주의 세상에선 종교는 유행할 수 없다. 내세의 극락보다 현세의 극락을 자신의 능력 여하에 따라 쌓아올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러 지방에선 센고쿠다이묘戰國大名라는 새로운 무장집단이 발흥하여, 그들은 맨 먼저 쿠교와 사원의 토지부터 가로챘다.

  사원은 쇠약해졌다.

  이젠 승병사단을 먹여 살릴 재력도 없고, 남아 있는 승병들도 그 실전능력을 따지자면 전투로 날을 지새는 신흥 다이묘들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겐키 2년(1571), 히에이 산을 공격했다.

이탈리아인이 그린 오다 노부나가


  히에이 산이 그들의 단가檀家이며 노부나가의 적이었던 오우미 지방近江囯의 아자이浅井 / 에치젠 지방越前囯의 아사쿠라朝倉와 비밀리에 내통하고 있다는 것을 노부나가가 알아내었기 때문이다.

  "전당과 탑을 불태우고, 승병과 속인을 가리지 말고 죽여라."

  일본 최초의 무신론자였던 노부나가는, 중세의 망령과 같은 이 히에이 산에 대철퇴를 휘두르는 데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다.

  승병사단은 적을 상대로 맞서 싸웠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왕조시대 무렵과 같은 실력이 없었다.

  당시 노부나가의 병단은 조총 숫자로만 봐도 일본 내에선 최신예 병단이었고, 거기에다 그 부하들은 역전의 용자들이었다. 이러한 병단들 앞에서 히에이 산의 승병사단은 (태평양전쟁 당시) 사이판 섬에서 일본군이 무너진 것처럼 박살났다. 왕조 말기에 빛나던 벤케이의 영광은 그 편린片鱗조차 찾을 수 없었다.


  히에이 산은 근본중당根本中堂을 위시하여 산노山王 21사 / 동쪽 탑 / 서쪽 탑, 무도우사無動寺 이하 대부분의 주요 건물들이 잿더미가 되었고, 살해당한 승려들은 1천 6백여 명. 부녀자들까지 참살당하였다.

  이로서, 헤이안 귀족의 염세주의에 힘입어 발흥한 승병사단은 센고쿠 무장의 무신론 앞에 멸망당했다. 


덧글

  • 키키 2017/02/25 16:51 # 답글

    이번편은 혼간지켄뇨가 나올려나요? ㅎㅎ
  • 3인칭관찰자 2017/02/25 19:49 #

    켄뇨는 나오지 않네요. 두 사람이 주역인데 둘다 오다->토요토미를 섬긴 승려 겸 다이묘들입니다. ^^
  • 도연초 2017/02/25 18:26 # 답글

    1. 당시 일본 불교의 지나친 염세주의와 귀족(무가, 공경, 황족)과의 유착 때문에 니치렌이 왜 그렇게 극성을 떨었는지 조금은 이해가 가네요

    2. 심지어 천황이 출가하여 법황이 될 때에도 고후쿠지 또는 엔랴쿠지, 고야산의 사찰에서 '우리 절에서 머리깍아주셈' 하고 유치 경쟁의 일환으로 승병끼리 국지적인 전쟁까지 간 사례도 꽤 있고...(사실 이 때문에 황실에서 절을 통제하기 위해 법친왕을 여럿 두거나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모리요시 친왕도 잠깐이지만 소싯적에 천태좌주 즉 엔랴쿠지 대승정을 지내기도 했으니...)

    3. 성질같아선 행패부리는 승병이 우글대는 전국 각지의 절을 조져버리려고 해도 헤이안 시대 당시 시점이면 무사들이 절에다 해코지하면 천벌받는다는 걸 진심으로 믿었던 시대이니...(심지어 타이라노 키요모리도 이 문제로 상당한 골치를 앓았습니다)

    4. 훗날에는 절끼리 말사 등의 상하 서열관계에 따라 연공까지 받아내고 안주면 불적으로 찍어서 조져버리거나 종파끼리 서로 싸움질을 일삼는 쌈박한 사태가 비일비재합니다. 이는 특히 쿄로쿠, 텐분의 난에서 두드러지죠.
  • 3인칭관찰자 2017/02/25 20:38 #

    1. 그만큼 당시 일본 불교가 총체적으로 난국이었다고 볼 수 있겠군요.

    2. 텐노의 출가 문제에까지 끼어들어 피비린내도 불사하면서 비즈니스 경쟁을 할 정도면...

    3. 노부나가 이전에 히에이산 제대로 조지려 든 정치가가 없었던 것도 결국은 훗날의 재앙을 두려워했기 때문이겠죠.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집권기에 명문 사사키 가문의 당주와 그 네 아들이 엔랴쿠지와 트러블을 일으켰을때 무가 쪽만 처벌받았고 한 명(차남)은 효수까지 당한 게 생각납니다.

    4. 이미 이쯤 되면 종교단체의 탈을 쓴 하나의 거대한 조폭, 이익집단에 지나지 않았다고 밖에는. 오다 노부나가를 그다지 좋게 평가하시지 않는 스즈키 마사야 씨 같은 분도 "정교분리의 맹아가 되었다" 며 노부나가의 강경한 억불정책에 대해서는 극찬을 하신 적이 있죠. 사람들을 도륙한 게 잘 했다는 건 아니지만 당시 일본 불교계의 모습을 보면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가기도 하는 게....
  • 히알포스 2017/02/26 15:19 #

    4. 종파끼리 power싸움하는건 저도 전국시대 잇코잇키나 혼간지 정도가 생각나는군요.

    2,3 헤이안 시대에는 정말 "불교에 해코지하면 천벌받는다" 라고 생각했다면, 그보다 훨씬 훗날인 센고쿠 시대에서는 불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나요?? 노부나가가 혼간지를 철저히 밀어버린 걸 생각하면 센고쿠 시대의 일본인은 불교에 대해서 생각도 조금 바뀌고, 조금 덜 신성하게 생각했다.....라고 할 수 있나요.
  • 도연초 2017/02/26 22:34 #

    3인칭관찰자//쿄로쿠 텐분의 난은 과정과 경위를 자세히 보면 정치 종교의 야합하여 종파끼리 대결전을 벌인 대표적인 사건이죠(...) 잇코잇키부터 법화종 계통의 세력까지 전쟁에 휘말려 오닌의 난처럼 교토, 나라 일대가 완전히 초토화되다시피 했었으니까요.심지어 법화종 폭도(홋케잇키지만 정확하게는 일련종이 대다수였습니다)들이 일어나서 고후쿠지를 점거하고 방화, 카스가 다이샤의 신수인 사슴을 잡아먹는 막장 사태가 벌어지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혼간지, 엔랴쿠지, 호소카와 하루모토 연합군이 짜여지기도 했고...(여담으로 이때 죽은 미요시 나가요시의 아버지 모토나가는 하루모토와 정치적 적대관계일 뿐만 아니라 종파까지 대립관계여서 그가 사찰에 참배를 간 틈을 타 군대를 보내 죽게 만든 사건은 매우 유명)

    히알포스//전란의 시대라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종교에 의존할 수밖에 없던 시기이기도 하거니와 유민들이나 부랑자들이 절로 유입되어 승병으로 전직(...)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니 당시 대중의 입장에는 신앙도 절실한데다 절의 힘까지 강하니 천벌받는다기보다는 현실적인 시각(절에 개기면 부처님 아니고... 승병에게 혼난다)이 컸으니까요. 승병의 횡포가 하락세의 서막은 노부나가가 히에이산에 복수의 불벼락을 내리는 그 순간이었습니다.(당시에도 히에이산은 엔랴쿠지와 히요시 신사의 소재 때문에 성지 취급 받았습니다!)
  • 플로리몽 2017/02/25 23:34 # 답글

    켄뇨 대신 지금 올려주시는 미야베 젠쇼보, 쓰쓰이 준케이 정도가 나오겠군요.
    다른 인물이 더 있을까요?
  • 3인칭관찰자 2017/02/26 01:05 #

    맞습니다. 이 글에서 다루는 인물은 미야베 젠쇼보와 츠츠이 쥰케이 두 사람입니다.

    승려 출신으로 오다->토요토미를 섬긴 다른 인물이라면 토요토미 다섯 부교 중 하나였던 마에다 겐이 정도려나요. 지휘관이라기보단 행정관에 가깝긴 하지만 그래도 여엿한 5만 석 다이묘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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