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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춘추 Special》시진핑習近平의 굴곡진 전반생 (上) 뉴밸



  이 글은 일본의 거대출판사인 분게이슌쥬文芸春秋에서 특정 주제를 중심으로 삼아 3달에 1번씩 계절별로 출간하는 잡지인《文芸春秋 Special》의 2016년 여름호 p.88 ~ 98, 시바타 테츠오柴田哲雄 아이치가쿠인대학 교수님께서 집필하신《시진핑 비록 - 독재자가 보냈던 동굴생활를 번역한 글입니다. 집필된지 6개월이 넘어가는 글이라는 점을 참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시바타 테츠오柴田哲雄>

  1969년 나고야 시에서 출생. 화둥 사범대학에 유학한 후, 쿄토대학 대학원 인간ㆍ환경학 연구 박사 후기과정을 단위취득하고 퇴학했다. 박사博士. 주된 저서로《시진핑의 정치사상형성》(彩流社) /《중국 민주화ㆍ민족운동의 현재》(集広社)등이 있다.  


  올해(2016년) 3월에 개최된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全人代)에서 조그마한 이변이 보도되었다. 티베트 자치구 대표단 전원의 가슴팍에 두 개의 배지가 달려있었던 것이다. 하나는 마오쩌둥毛澤東 / 덩샤오핑鄧小平 / 장쩌민江澤民 / 후진타오胡錦濤 / 시진핑 다섯 사람이 그려져 있는 배지였고, 또 하나의 배지에는 시진핑 개인이 그려져 있었다.

  과거 마오쩌둥에 대한 개인숭배가 행해지고 있을 당시엔, 공공장소에서 마오의 초상화가 그려진 배지를 다는 습관이 존재했다. 마오쩌둥이 죽으면서 그러한 습관은 사라진 채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런데 이번에 갑자기 등장한 시진핑의 배지를 놓고 중국에서도 '개인숭배의 시대가 재림했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하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있었다.

  중국에서는 공산당에 의한 일당 독재체제가 60년 넘게 계속되고 있는데, 한 마디로 독재라고 단언하는 건 커다란 착각이다. 마오쩌둥, 그리고 천안문天安門 사건 전후의 덩샤오핑 정도가 절대적인 제 1인자로서 개인적 독재를 행했던 반면, 장쩌민이나 후진타오는 상대적인 제 1인자에 불과하여, 공산당의 최고 엘리트 여러 명(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의 합의에 기반한 집단지도가 행해졌다. 시진핑의 정권이 발족했을 당시에는 오히려 장쩌민이나 후진타오보다도 압도적으로 권력기반이 취약했으나, 약 3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개인숭배 징조가 보일 정도로 그 권력은 강대해져가고 있다.


  반부패反腐敗와 언론통제言論統制

  더욱이 주목되는 점은, 시진핑의 정치수법에서 마오쩌둥의 영향이 여실히 감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시진핑이 독재권력을 확립하기 위해 사용한 주된 수법은 크게 2가지이다. 반부패투쟁. 그리고 언론통제다. 이 두 가지 면에서 시진핑은 분명 이전의 정권이 손을 대지 않았던 영역으로 발을 들이고 있다.

  반부패투쟁에 대해서 덩샤오핑은 암묵적인 룰을 만들었다. "적어도 공산당의 최고 엘리트인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경험자들의 죄는 불문에 붙여준다." 는 것이었다. 장쩌민도 후진타오도 부패를 적발한다는 명목하에 권력투쟁을 벌였지만, 적어도 덩샤오핑이 정해놓은 선을 넘진 않았었다.

  그러나 시진핑은 이 선을 태연히 넘어가 정치국 상무위원이었던 저우융캉周永康을 체포하였을 뿐 아니라, 전 인민해방군 제복조의 TOP였던 쉬차이허우徐才厚 등도 실각시킨 것이다.

  언론통제 쪽의 경우, 덩샤오핑은 천안문 사건을 전후한 시기에 언론을 강하게 억압했긴 해도 그 이전에는 후야오방胡耀邦과 자오쯔양趙紫陽을 넘버 2로 발탁하고, 비교적 자유롭게 정치개혁에 대한 논의를 지식인들이 행할 수 있도록 한 바 있다.

  장쩌민과 후진타오도 공산당 일당독재에 저촉되지 않는 한 지식인들이 정치개혁을 포함한 다양한 문제에 대해 발언하는 것을 묵인했다. 그리고 서구 국가들로부터 자금원조를 받는 중국 NGO 단체의 활동에도 관용적인 자세를 보였으며, 홍콩에서의 언론자유에 대해서도 과부족없이 존중하는 태도를 보인 바 있다.

  그러나 시진핑이 사태를 바꿔놓았다. 사소한 정치비판도 허락하지 않을 뿐 아니라 NGO 단체 단속에 나섰고, 나아가서는 납치라는 거친 수단을 쓰면서까지 홍콩의 언론통제를 시도하기에 이른 것이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하는 건, 덩샤오핑 이후 반부패와 언론통제에 대해 일정한 선이 그어진 것은 마오쩌둥 시대 - 특히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이하 문혁文革으로 약칭) - 을 심각하게 반성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는 점이다.

  1966년에 시작된 문혁 당시에는 마오쩌둥에게 선동당한 홍위병紅衛兵들과 노동자들에 의해 당 엘리트들의 태반이 철저히 규탄당하고 뿌리채 실각해버렸기에, 인민해방군이 질서유지에 나서야 했을 정도로 사태가 심각했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문자 그대로 죽음을 강요당하던가, 아니면 강제노동에 종사하든가, 하는 처지에 노출되어 있었다.

  물론 시진핑이 목하 진행중인 반부패투쟁이나 언론통제 같은 건, 문혁의 레벨에 비하면 크게 못 미친다. 그러나 그의 정치 스타일 속에는 마오쩌둥 시대로 회귀하는 면이 농후하다는 점도 역시 사실인 것이다.

  그러나 시진핑이 어떠한 정치사상을 가진 사람이며, 그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져있다고 하기는 힘들다. 본고에서는 일본에선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던 그의 출생 시대부터 시작하여, 시진핑이 무엇을 지향하려 하는지를 해독해보려고 한다.


  부모로부터 떨어져 있던 유년ㆍ소년 시대

  시진핑은 '태자당太子黨' 이라 불리는, 혁명원로들의 자제子弟 그룹에 속하는 그 일원이다. 그러나 그 경력은 일본의 '2세 의원' 이 갖고 있는 이미지와는 완전히 판이하다.

  그의 아버지 시중쉰習仲勳은 1913년 산시성陝西省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조숙했던 시중쉰은 10대 중반에 이미 학생운동에 투신하여, 류즈단劉志丹이 인솔하는 산시성 공산당 조직에 참가하였고, 20대 초반의 나이에 산간변구陝甘邊區 소비에트 정부의 주석으로 취임하였다. 이곳은 당시 중국에서 공산당이 근거지를 활발히 확대해나가던 얼마 안 되는 지역이었다.

  당시 중앙의 공산당은 국민당군의 포위섬멸작전에 의해 '장정長征' 이라고 불리는 대도피행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장정' 의 최종목적지로 선택된 곳이 시중쉰이 지도하는 산시성 당조직이 지배하는 지역이었다. 잘 아시겠지만 산시성의 옌안延安은 공산당 정부의 임시수도가 되었다. 시중쉰들이 중국 혁명에 얼마만큼 공헌했는지가 이해되시리라 생각된다.

  참고로 이 때, 시중쉰은 내부투쟁에 말려들어 거의 살해당하기 직전의 궁지에 몰려 있었는데, '장정' 을 마친 중앙당이 그를 구출해낸 바 있다.

  시진핑은 이와 같은 부친을 두었음에도 그의 유소년기에는 아버지가 남긴 그림자가 대단히 옅다. 아버지는 국무원 부총리 등의 요직에 앉았고, 어머니 치신齊心도 중앙당교中央黨校에서 거주하며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둘 다 대단히 바빴다. 그렇기에 그는 누나와 동생들과 함께 완전 기숙사제인 유치원ㆍ초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시진핑이 다니던 베이하이 유치원은 "자기 자식들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중앙의 지도자들을 위해 개설된 곳이었다. 예를 들자면 류샤오치劉少奇나 천윈陳雲, 보이보薄一波 같은 혁명의 원로들 역시 자식들을 베이하이 유치원에 맡긴 바 있었다. 현재 시진핑(1953년 출생)의 맹우盟友인 류위안(劉源, 1951년 출생. 전 인민해방군 상장, 류샤오치의 아들)도, 격렬한 권력투쟁을 벌였던 보시라이(薄熙來, 1949년 출생. 전 충칭시 당위원회 서기. 보이보의 아들)도, 이 베이하이 유치원에서 자라난 사람들이다.

  베이하이 유치원에서 중시하는 건, 당연히 사회주의 사상을 교육시키는 것이었다. 이 유치원의 제 1주임이었던 우루린于陸琳의 말에 따르면, 유치원의 아이들은 언제나 당이 칭찬하는 노동영웅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고, "가장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사회주의, 그리고 자본주의가 무엇인가를 주입받았다.

  그 결과, 어느 왕국의 친 중국파 요인이 참관하러 왔을 때 유치원 아이들은, "왕국은 좋지 않아. 국왕은 인민들을 압박하고 착취하고 있어." 라며 비판하였고, 베트남의 호치민이 참관하러 왔을 때는 한 유치원 아이가 호치민의 무릎 위에 앉아서 "호 할아버지는 좋은 분이야. 호 할아버지는 민중을 사랑하셔. 호 할아버지는 인민을 착취하지 않아!" 라고 찬미했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이 정도로 유치원 아이들은 '세뇌' 당해 있었다. 그 사상교육 중에는 마오쩌둥 숭배도 포함되어 있었다.

  베이하이 유치원을 졸업한 시진핑은 바이八一 초등학교에 진학하였다. 이곳도 수많은 당 / 군의 고급간부들 자제들이 교육을 받던 완전 기숙사식 학교였는데, 이 학교에는 마오쩌둥이나 저우언라이周恩來를 위시한 중앙지도자들이 여러 번 시찰을 위해 찾아오곤 했다. 참고로 보시라이는 베이징 제 2 시얀 초등학교에 진학했는데, 여기도 역시 고급간부들의 자제들 다수가 재적하고 있던 완전 기숙사식 학교였다.

  가장 기초를 이루는 유소년기에 시진핑은 (결과적으로) 부모로부터 떨어져, 베이하이 유치원과 바이 초등학교라는 의사적인 가정에서 자라난 것이다.


  네 번 투옥된 후 하방하다

  시진핑의 전반생 가운데 최대의 시련이라면 말할 바 없이 문혁이다.

  문혁에 앞서서 1962년, 아버지 시중쉰은 소설《류즈단劉志丹》사건에 연루되었다. 자살을 강요당했던 산시성 시대의 전우 가오강高崗의 명예회복을 도모했다고 일방적으로 문책받은 것이다. 이 때문에 당 중앙위원 / 국무원 부총리 등의 요직에서 해임당한 후 뤄양洛陽 광산 기계공장으로 좌천당한 시중쉰은 홍위병들의 박해를 피하지 못했다. 1968년에 그는 베이징에 있는 감옥으로 이송당했는데, 이는 홍위병들의 손이 닿지 못하는 곳으로 신병을 옮겨주려던 저우언라이의 배려였다. 결국 출옥할 수 있었던 건 1975년이 된 이후였다.

  시진핑은 문혁 당시에 중학생이었다. 홍위병들이 생가를 박살내놓았기 때문에 시진핑들은 어머니의 근무지인 중앙당교로 옮겨가 살게 되었다. 혈기왕성하던 시진핑은 홍위병들의 폭거에 반항했으나 오히려 "네놈은 자신의 죄가 얼마나 무거운지 아느냐?" "백 번 총살당해도 모자란다." 는 식으로 위협당했다. 그리고 홍위병들에 잡혀 대소 규모 합쳐 십 수 회나 비판투쟁 대회로 끌려갔으며, 네 번이나 감옥에 던져졌다.

  당시 15세였던 시진핑이 스스로 산시성의 한촌으로 '하방下放' 하겠다고 지원한 것을 봐도 그 처절함을 짐작할 수 있다. 베이징을 떠나, 홍위병들의 박해로부터 도망치려 한 것이다.

  그러나 현지에서의 생활과 노동은 가혹한 것이었다. 딱딱한 황토에다 굴을 파서 지은 '야오톤' 이란 이름의 동굴주거지에서 묵게 되었는데, 이가 득실거려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거친 잡곡밥은 너무나 맛이 없어 목으로 넘어가지 않을 정도였고, 처음으로 해 보는 중노동에는 체력이 따라가지 못하여, 현지의 여성노동자들보다 일을 더 못했다. 최초의 '하방' 은 이윽고 그가 베이징으로 도망쳐 돌아가면서 막을 내렸다.

  그러나 시진핑은 다시 '하방' 지로 돌아가, 현지의 생활과 노동에 적응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여기에서 그의 아버지 시중쉰의 과거 활동이 빛을 발했다. 현지의 농민들은 혁명 덕분에 토지를 얻을 수 있었기에 시중쉰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았고, 시진핑을 은인의 아들이라 하며 보호해주었던 것이다. 이윽고 시진핑은 농민들의 신뢰를 얻어 공산당원이 되었고, 현지 당 지부의 서기로 올라갔다.

  오늘날 시진핑의 측근으로 반부패투쟁에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고 있는 왕치산王岐山도, 마찬가지로 산시성의 한촌으로 하방해 왔다가 이웃 마을에 있던 시진핑과 당시부터 교류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가혹한 체험을 했다는 점에서는 보시라이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 보이보는 류샤오치에 연좌되는 형태로 실각한 후 오랫동안 감옥생활을 보내게 되었으며, 어머니 후밍胡明은 홍위병들에게 박해받아 자살하였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보시라이는 홍위병 조직에 참가했음에도 아버지를 박해하는 데 가세하도록 강요받기도 했다. 그 후, 반혁명죄에 더하여 동료들과 지프차를 절도한 죄를 추궁받아, 5년 가까운 감옥생활을 보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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