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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원나라의 일본 침공蒙古襲來 (完)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48호(2001년 8월호) 66~80쪽의 기사인,《몽골의 침략蒙古襲來 - 몽골의 거대원정군에 맞서 싸운 카마쿠라 무사단을 번역한 것으로, 아리사카 쥰有坂純 씨께서 집필하신 글입니다.


  제 2차 침공(코안 전역弘安の役)

  1281년(코안 4년) 5월 3일, 동로군은 합포에서 출항했다. 작전계획에 따르면 동로군은 쓰시마 섬(對馬, 대마도)을 공략한 후, 6월 15일 이키 섬壱岐에서 강남군과 회합하여 일제히 하카타 만으로 진격하게 되어 있었다.

  아마도 시간 조정 목적 내지는 순풍을 기다리기 위한 목적으로 거제도巨濟島의 기지에서 약 2주간 정박한 후, 동로군은 우선 5월 21일 쓰시마 섬, 26일 이키 섬을 침공했다.

  쓰시마 섬 / 이키 섬에서 벌어진 전투에 대해 신뢰할 만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며 그 정보는 마구 뒤엉켜 있지만, 두 섬 모두 수비대 궤멸 -> 소탕전 -> 비전투원에 대한 약탈과 폭행이라는, 이전 원정과 거의 비슷한 과정을 겪었으리라는 건 우선 의심할 바가 없다고 본다. 참고로 (여몽연합군이) 이키 섬에 침공한 것도 (5월) 21일이었다고 하는 사료가 남아 있는데, 만약 이쪽의 기록이 올바른 것이었다면 동로군은 전력을 둘로 나누어 쓰시마와 이키를 동시에 습격한 것이리라.

  이키 섬을 지배하에 둔 동로군은 강남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일본 본토로 진격했다. 종래의 다수설에 따르면 "동로군이 전공을 독점하기 위해서 독단행동抜け駆け을 한 것." 이라 간주되었으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앞에서 서술한 대로 강남군의 실태란 것이 명확하지 않은 이상 대원제국군의 작전계획에서 언급하는 '회합會合' 이라는 것의 의미를 판단하기 어렵고, 한편으로 힌두를 위시한 현지지휘관의 독단전행을 잘못되었다고 규정할 만한 재료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키 섬에서 회합한다는 방침이 동로군이 출격하기 직전인 5월이 되어서야 갑자기 결정된 것이었다는 기록을 고려한다면, 동로군 사령부가 회합이라든가 협동작전 그 자체에 처음부터 그다지 기대를 하고 있지 않았다는 건 오히려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찌됐든, 동로군은 다시 전력을 둘로 나누어 3백 척(육상병력 약 8천 명)으로 이루어진 별동대를 나가토長門 지방으로 보내고, 남은 6백 척(육상병력 1만 7천 명)의 주력부대를 이끌고 하카타 만으로 진격하였다.

  나가토로 향한 별동대는 칸몬 해협関門海峡을 봉쇄하여 츄코쿠 지방(일본 혼슈 서부)에서 큐슈에 이르는 후방연락선을 차단하라는 임무를 맡고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6월 8일, 그들은 도이가하마土井ヶ浜 / 야츠가하마八ヶ浜 두 곳에 일제히 상륙을 개시했으나 나가토 지방의 슈고守護인 호죠 무네요리北条宗頼가 지휘하는 일본군 약 2만 명이 이들을 요격하여, 병력적으로 열세한 대원제국군이 해안 교두보를 설정하는 걸 저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상륙을 단념한 동로군 별동대는 결국 해안봉쇄를 포기하고 다음날인 9일 내지는 그로부터 며칠 내에 서쪽으로 후퇴, 주력부대가 있는 곳으로 복귀했다.           

  그 동로군 주력부대는 6월 6일, 하카타 만 동부에 진입하여 시가 섬志賀島과 노코 섬能古島 사이에 있는 해협을 정박지로 선택하여 닻을 내렸다. 하코자키筥崎에 사령부를 둔 일본군 병력은 약 4만 명. 제 1차 침공 때와 달리 동일본 군대가 가세하여 전력이 현격히 불어났을 뿐 아니라, 이시츠이치에 기댄 해안방어 시스템의 강도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동로군은 하카타 정면을 강습하여 상륙하는 대신, 방비가 약했던 시가 섬을 공략하여 이 곳에 최초 교두보를 설정했다. 

  이에 맞서 일본군은 격렬한 역습을 시도했다. 6일 밤, 몇 명의 무사들이 사령부의 금지령을 무시하고 작은 배를 타고서 정박해 있는 적 함대에 야습을 감행했다. 그리고 8일에는 친제이부교닌 겸 분고 지방 슈고인 오토모 요리야스大友賴泰가 지휘하는 일본군은 썰물 때에만 펼쳐지는 "바닷속의 길" 을 통과하여 시가 섬의 해안 교두보를 공격했다. 이 공격은 대원제국군을 바다로 밀어내는 데에는 실패했으나, 상당한 타격을 줄 수 있었다.

  시가 섬에 대한 공격은 (6월) 12일에 이르기까지 연일 감행되었고, 이와 병행하여 작은 배를 이용한 정박 함선 야습도 반복적으로 실행에 옮겨졌다.

  일본군의 기록에 따르면 시가 섬을 둘러싼 전투에서 대원제국군이 입은 손해는 전사자만 1천 명에 달했다고 한다. 하카타에 상륙하기는 커녕 일본군의 치열한 저항을 받아 시가 섬에 구축한 해안 교두보를 확대할 만한 가망은 당장 보이지 않았고, 소선박들의 야습에 의해 장병들의 신경이 마모되면서 동로군의 사기는 침체에 빠졌다. 거기에다 함선들의 선체가 썩어가기 시작하여 몇 주 동안 병사들에게 상륙과 보급을 만족스럽게 해주지 못하였기에, 탑재된 양식은 줄어갔고 역병이 유행하기 시작하여 3천 명 정도의 병사자가 났다고 한다.

  이를 견뎌내지 못한 총사령관 힌두는 작전 중지와 철수를 제안했으나, 고려군 지휘관 김방경金方慶이 맹렬히 반대했다. 결국 타협안이 만들어져, 동로군은 일단 이키 섬까지 물러나서 당초의 예정대로 강남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6월) 12일, 동로군 원정함대는 시가 섬의 해안 교두보에서 철수하고 닻을 올려, 하카타 만을 떠났다.

  그런데 이 무렵, 놀랍게도 강남군은 아직 경원(慶元, 영파寧波)에 있는 기지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있었다. 출격하기 직전에 총사령관인 아라크칸이 병으로 죽으면서 아타하이가 급히 후임 사령관으로 임명되는 불행한 일이 생겨, 스케줄이 크게 어긋난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3백 척으로 이루어진 선견부대를 선행시킨 후, 주력부대 3천 2백 척이 경원을 출항한 건 6월 18일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3천 척이 넘는 함선이 단시간에 일제히 정박지를 빠져나갈 수 있었으리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실제로는 수백 척으로 이루어진 편대를 단위로 삼아 며칠 내지 십 수일에 걸쳐서 축차적으로 닻을 올렸던 것 같다.

  그런 가운데 강남군 사령부는 3월에 포로로 잡은 일본인 표류민을 심문하여, 이키 섬보다도 히라도 섬平戶이 대함대가 회합하기에도 정박하기에도 적합하다고 판단한 바 있었다. 선견부대는 '작전행동을 지연시키고, 정박지를 변경하자' 는 뜻을 동로군에게 전달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있었다.

  강남군 선견부대는 쓰시마 섬을 경유하여 6월 29일, 이키 섬에서 동로군과 회합했다. 그러나 그들은 강남군 주력이 도착할 때까지 이 곳에서 장병들을 휴식시키고 보급을 행하진 못했다. 같은 날, 이키 섬에 적군이 집결해 있다는 것을 탐지한 일본군이 친제이부교닌 쇼우니 카게스케少弐経資의 총지휘하에 적극적인 반격을 시도한 것이다. 이 반격에 참가한 자들은 치쿠젠 / 히젠 / 히고 / 사츠마 지방의 무사들로, 병력은 대략 수천 명에서 1만 명 정도였으리라.

  29일부터 정박지 습격이 시작되어, 4일 간에 걸쳐서 이키 섬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노를 저어 움직이는 작은 배를 타고 대원제국의 대형함에 돌진한 일본군 장병은, 카게스케의 아버지로 제 1차 침공 당시 친제이부교닌이었던 (쇼우니) 스케요시資能가 치명상을 입고, 카게스케의 아들인 (쇼우니) 스케토키資時가 전사하는 등 상당한 희생을 치렀으나 적군에 타격을 입혔다. 7월 2일이 되자 동로군은 결국 일본군의 공격을 버텨내지 못하고 이키 섬을 포기, 강남군 주력부대와 회합하기 위해 다시 히라도 섬으로 후퇴했다.

  3천 2백 척의 강남군 주력부대가 히라도 섬 앞바다에 위용을 드러낸 건 7월 7일이었다. 그들은 드디어 동로군 / 선견부대와 회합하였으나, 즉각 하카타 만을 들이치려고는 하지 않고 27일까지 히라도 섬에 머물렀다.

  강남군이 3주 동안이나 정지해있던 건, 코안 전역을 통틀어 커다란 수수께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강남군의 편제와 운용을 논리적으로 되짚어보면 의문은 해소된다. 즉 경원 출항 당시와 마찬가지로 강남군의 함대는 단일한 군대구분으론 외양에서 행동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컴퓨터도 무선통신도, 심지어 해도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당시에 3천 2백 척이나 되는 함선을 일원적으로 통제하는 건 불가능했다. 아마 7월 7일에 히라도 섬에 도착한 건 전위부대에 불과하고, 축차적으로 도착한 전 부대가 최종적으로 집합을 완료한 것이 (7월) 27일이었던 것이리라.

  물론 이 3주 간의 시간이 좁은 배 안에서 지내는 육상병들을 더욱 피로하게 했으리란 건 의심할 바 없다. 이 시점에서 강남군이 즉각적으로 육지에서 발휘할 수 있는 전투력이란 건, 10만 병력이 본래 발휘할 수 있는 역량의 몇 분의 1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원제국군은 소기의 목적인 하카타 만 침공을 다시 시도했다. (7월) 27일, 원정군은 우선 히라도 섬에서 타카시마 섬鷹島으로 정박지를 추진시키기 위해 닻을 올렸다.

  그러나 또 다시 적군의 대규모 이동소식을 전해들은 일본군 사령부는 즉각적으로 반격을 결심, 타카시마 앞바다를 가득 메운 대원제국군 함대를 습격했다. 일본군은 다음 날인 (7월) 28일부터 맹렬한 파상공격을 반복하여, 소모되어 있던 동로군과 전투경험이 전혀 없었던 강남군에게 상당한 손해를 입히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4천 척이 넘는 대함대 쪽에서 본다면, 이 정도의 손해는 모기에게 물린 정도에 불과했다. 일본군의 반격을 한 손으로 뿌리치듯이 (7월) 28일 원정군은 - 이는 히라도 섬 집합 당시의 추리를 입증하는 것인데 - 8개 부대로 갈라져 동쪽으로 진격, 다시 하카타 만에 진입했다.

  결과를 아는 사람의 입장에서 감히 말하자면, 견고한 방어진지에 기대어 있었고 전의도 왕성하던 일본군 4만 여 명을 상대로, 피폐할 대로 피폐해져 전투력이 많이 감퇴된 강남군 약 10만 명의 상륙시도가 성공했으리라곤 생각하기 힘들다.

  그렇다곤 해도, 두 집단간의 전투가 벌어지는 일은 결국 없었다. 7월 30일 밤, 큐슈 지방에 대형 태풍이 상륙하여 하카타 만의 원정군 함대를 그대로 직격한 것이다. 

  폭풍우의 밤이 물러간 다음 날인 윤 7월 1일, 대원제국군의 함대는 꿈과 같이 해상에서 쓸려나가 있었다.

  적어도 2천 척의 함선이 침몰하여,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기량이 뛰어난 동로군의 피해는 비교적 미미했으나, 그럼에도《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고려군 장병 중 귀환하지 못한 자는 거의 절반에 달했다고 한다. 원정군에게는 아직 히라도 섬의 정박지에 배치되어 있던 유력한 예비병력들이 있었으나, 작전 속행은 명백히 논외시되어 제장들은 군사회의에서 후퇴하기로 결의했다.

  시가 섬 / 타카시마 섬에는 아직도 2만 ~ 3만 명의 병사가 상륙해 있었으나, 그들은 사령부로부터 버림받고 그대로 적지에 유기되었다. 일본군은 윤 7월 5일 무렵부터 북큐슈 일대에서 소탕전을 개시, 대원제국군의 남은 병사들을 용서없이 사냥했다. 일본과 우호관계에 있었던 옛 남송 출신자들만이 목숨을 건져 노예 신분으로 전락했으나, 그 외 몽골인 / 고려인 / 한인漢人 / 여진인들은 모두가 학살당했다.

  코안 전역은 아렇게 끝이 났다.  

 
  과거에서 학습한 일본군

  제 2차 일본원정 대패의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으나, 서두에서 언급한 대로 수만 명 규모의 도양침공전을 벌이기 위한 경험 내지 준비가 대원제국군에게는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이 가장 큰 요인이라 생각된다.

  아테나이의 제 4차 시칠리아 원정(기원전 415~413)이나 스페인 무적함대(1588), 그리고 러시아의 제 2 태평양 함대(1905) 같이 비참한 결말을 맞은 여타 수많은 도양원정 사례와 마찬가지로, 공격목표 정면에 유력한 전진 병참기지가 없었다는 점이 치명적이었다. 어쩌면 강남군을 큐슈로 직접 항해시키는 대신 일단 고려로 먼저 회항시킨 후 움직이게 했다면 경과는 약간 변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대원제국군은, 제 1차 원정의 전훈에서 학습하는 데 실패했다. 그들은 일본의 잠재적 군사력을 과소평가했을 뿐 아니라, 또다시 하카타 만을 상륙지점으로 선택하는 실패를 범했다. 이시츠이지 건설로 문자 그대로 요새화된 하카타 만을 정면에서 공격하는 건, 절대로 회피해야 할 '직접적 어프로치' 였다.

  그리고 동로군이 유력한 해안 교두보를 설정하여 병참기지에 적합한 항만을 조기에 확보하지 못하는 이상은, 강남군이 도착해도 그 거대한 몸집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키 섬에서 강남군과 회합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최초 공격을 실시한 힌두의 판단은 잘못되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일본군 쪽은 대원제국군과는 대조적으로 제 1차 침공작전에서 자기들이 저지른 수많은 실수들을 돌아보며 많은 학습을 했다. 전국적으로 병력과 자원을 동원하고 집중시켰고, 상륙예정 지점 방비 / 해안 방비시설의 철저화 / 소형 선박을 이용한 집요하고 치열한 반복야습, 그리고 토쿠소 정부 아래 강력히 일원화된 지휘통제 등, 모든 점에서 현격히 개선되었다.

  제 2차 침공전에서 막부가 서일본에 배치한 병력은 큐슈에 4만 명 / 츄코쿠에 약 2만 명 / 쿄토에 약 6만 명이었다. 전투지역에서의 양군의 질과 양 / 후방지원태세 / 전력보충 여부 등을 고려한다면, 아무리 태풍이 불지 않고 하카타 만의 해안 방어진지가 결정적으로 뚫린다 하더라도 제 2차 원정군이 소기의 목적 - 일본열도 정복 - 을 단독으로 달성할 수 있었으리라곤 생각하기 힘들다.

  중앙집권적인 관료제와 강력한 상비군을 가지고 있던 대원제국에 비해, 자원과 권력이 널리 분산되어 있던 봉건사회였던 일본은 분명히 먼 거리를 향해 원정을 벌일만한 힘은 크게 뒤떨어졌으나, 역으로 바깥에서 쳐들어오는 공격에 대해서는 대단히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봉건사회라는 건, 극도로 긴밀하면서도 고도로 군사화된 사회였던 것이다.   
 


그 뜻은 츠쿠시筑紫 바다의 파도를 헤치며
헌걸찬 이 사나이 원수를 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으리,
죽어서 호국의 귀신이 되리라. 며 맹세를 바친 하코자키의
신께서만은 살피시니 야마토타마시이大和魂 고결하도다.

하늘은 노하여 소용돌이치는 거대한 파도에
이 나라와 척을 진 십여 만의 몽고군은
바다 속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살아남은 건 단 세 명,
어느 새 구름은 걷히고 현해탄에 달이 밝았네.    


(나가이 켄시永井建子 作《원나라의 침략元寇》)

          

덧글

  • 조훈 2017/02/09 18:44 # 답글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 3인칭관찰자 2017/02/09 19:14 #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 2017/02/09 20:38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7/02/09 23:20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라라 2017/02/18 00:18 # 답글

    총사령관이 후퇴하잔데 거부한 고려군 장수의 이유가 있는지요?
  • 3인칭관찰자 2017/02/18 07:15 #

    저 당시에 아직 강남군 10만 명이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압니다. 강남군과 합세해서 공격하면 충분히 이길 수 있으니 지금은 철수하지 말자... 는 주장이었다고.

    김방경은 1차 원정 때도 후퇴에 반대했는데 이때는 지금 이기고 있고 결사적으로 나가면 크게 이길 수 있는 싸움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주장했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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