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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원나라의 일본 침공蒙古襲來 (5)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48호(2001년 8월호) 66~80쪽의 기사인,《몽골의 침략蒙古襲來 - 몽골의 거대원정군에 맞서 싸운 카마쿠라 무사단을 번역한 것으로, 아리사카 쥰有坂純 씨께서 집필하신 글입니다.


  재정벌을 위한 전비戰備

  힌두의 복명을 받은 쿠빌라이 칸은 즉각 일본 재정벌을 준비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 제 2차 원정의 목적은, 제 1차 원정의 목적과는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양양襄陽이 함락된 후 몽골의 남송南宋 원정군은 파죽지세로 진격을 계속하여, 1276년에는 남송의 제도帝都 임안臨安에 무혈입성했고, 1279년에는 광동広東 앞바다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남송의 어린 황제가 바다로 투신하면서, 320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송나라는 드디어 멸망했다. 

  강남의 영토 / 인민 / 자원을 싸그리 접수한 쿠빌라이는, 그 강대한 제해권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젠 남송을 침공하기 위한 측면엄호를 목적으로 일본원정이 행해지는 게 아니라, 대원제국大元帝國 - 1271년부터 쿠빌라이는 국호를 중화풍으로 고친 바 있었다 - 의 '동아시아 신질서' 에 일본까지 통합시키려는 목적이 생긴 것이다.

  제 1차 원정이 벌어진 다음 해인 1275년, 쿠빌라이는 몽골인 두세충杜世忠과 한인漢人 하문저何文著를 주사主使로 삼은 사절단을 고려를 경유시켜 일본으로 파견했다. 이번의 임무는 이제 통교요구가 아닌, 항복을 권고하는 것이었다. 두세충들은 나가토長門 지방의 무로츠室津에 상륙했으나, 토쿠소得宗와 막부는 어떠한 교섭에도 응할 생각이 없었다. 사절들은 포박당한 후 카마쿠라로 호송되어, (호죠) 토키무네의 명령에 따라 전원이 처형당했다. 고향에 남은 처자를 걱정하는 시문을 남기고 참수당했던 두세충 등이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외교관 신분의 특권 따위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그 당시로서는, 공식사절을 살해하는 것은 명확한 의지를 표시하는 수단 중 하나이기도 했던 것이다. 

  대원제국은 그로부터 4년 동안, 두세충 사절단의 소식을 파악하지를 못했다. 1279년, 남송에서 귀순한 장군이었던 범문호范文虎의 헌책들 받아들여 쿠빌라이는 주복周福과 난충欒忠을 주사로 삼은 새로운 사절단 파견을 허가했다. 그들은 강남에서 곧바로 일본으로 향했으나, 하카타에 상륙한 직후 포박되어 현지에서 처형당하고 말았다.

  그런데 주복들이 처형당하던 시기와 거의 같은 무렵, 두세충 사절단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갔던 선박의 승무원 4명이, 간신히 목숨을 건져 노예가 되었던 것인지 일본을 탈출하여 고려로 도망쳐 돌아갔기에, 쿠빌라이 정부는 이제야 비로소 사절단의 운명을 알 수 있었다.

  사절단이 처형당한 것은 쿠빌라이를 격노하게 했으나, 그는 끈기를 가지고 다시 1년간 주복 사절단의 귀환을 기다렸고, 그들도 두세충 사절단과 같은 운명을 맞았다는 소식이 그럭저럭 밝혀진 시점에서야 제 2차 원정 실시를 최종적으로 승인하였다. 즉 1280년 8월, 그는 원정을 위한 군령軍令과 군정관계 업무를 총괄하는 정일본행성征日本行省을 신설시키고 힌두 / 홍다구 / 범문호 등의 제장을 그 간부로 임명하였다.

  그 해 11월, 고려는 쿠빌라이에게 "함선 9백 척, 승무원 1만 5천 명, 육상병력 1만 명의 동원을 완료" 했다는 소식을 보고했는데, 이들 함선의 대부분은 제 1차 원정군의 함대편제에 들어가 있던 것들이리라. 반면 강남에서는 구 남송 함대가 일본 원정에 투입되는 대신 함선들의 대규모 건조가 행해지고 있었다.

  1281년 1월 1일, 제 2차 일본원정의 전비가 갖추어졌다는 보고를 받고서 쿠빌라이는 제장들에게 정식으로 출진을 명령했다. 2월에는 이 칙명이 제장들에게 전해졌는데, 대 칸은 여기서 이번의 원정목표가 "일본을 정복" 하는 것임을 명확히 밝혔다.

  원정군 전군은 고려에서 출격하는【동로군東路軍】과 강남에서 동진하는【강남군江南軍】, 이상 2개 부대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 중 동로군의 병력편성은 앞에서 서술한 대로 제 1차 원정군의 그것과 거의 비슷했다. 즉 함선 9백 척(대형함 3백 척 / 바투르 경질주 300척 / 수급주 3백 척)과 거기에 탑승한 승무원 1만 5천 명. 그리고 육상병력은 고려군 부대가 약 1만 명에, 한족 군대를 기간基幹으로 삼은 대원제국의 파견부대가 약 1만 5천 명이었다. 지휘관들의 인사도 제 1차 원정의 진용을 그대로 물려받아, 정동도원수에 힌두 / 동로군 도원수로 홍다구洪茶丘 / 고려군 도원수로 김방경金方慶이 각각 임명되었다.

  한편 강남군의 병력은 동로군의 그것을 아득하게 뛰어넘는, 그야말로 유례없는 규모였다. 신조함들을 중심으로 정비된 함선은 무려 3천 5백 척. 세세한 편제나 승무원 수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동로군과 마찬가지로 대형함 / 바투르 경질주 / 수급주가 1:1:1 비율을 이루고 있었다고 간주하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이 대함대가 수송하는 병력은 약 10만 명. 그들은 투항한 구 남송군 장병들의 일부로, 일본정복에 성공하는 날에는 둔전에 임할 수 있도록 농기구까지 준비해갔다고 전해진다. 지휘관 인선은 도원수로 몽골 장성인 아라크칸 / 강남군 도원수로 범문호가 기용되었다.

  그러나 압도적인 병력이긴 해도, 강남군 장병의 질은 동로군의 그것보다 훨씬 저열했으리라 생각된다. 구 남송의 금군(禁軍, 야전군) 병력은 약 40만 명으로, 수비대까지 포함한 전군의 총병력은 아마 그 2배 내지 몇 배에 달했으리라 간주된다. 스기야마 마사아키杉山正明 교수님께서 지적하셨듯이 대원제국에 접수된 이들 구 남송군 부대들 가운데, 가장 정예한 장병들은 대 칸의 직속부대에 근무하거나 중앙아시아 방면의 기동전 / 남송 잔존세력 소탕전 등에 즉각적으로 전용되었다.

  바꿔 말한다면 강남군으로 편성된 10만 장병들의 실체는, 결국은 육상전에선 그다지 쓸모가 없다는 평가를 받아 어느 전선의 장군들도 마지막까지 탐내지 않았던 자들 뿐이란 것이다. 남송군 장병들은 원칙적으로 직업군인으로, 본인들의 자질이나 사기와는 관련 없이 자동적으로 급여가 주어지는 존재들이었다. 도저히 군사적으로 써먹을 수 없는 병자들이나 노인병사들도 남송에는 그다지 드문 존재가 아니었다.

  강남군은 애초부터 전투력을 가지지 못한, 둔전병이라기보단 오히려 비무장 이민집단이었다고 주장하시는 스기야마 교수님 학설의 옳고 그름을 사료를 통해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필자에겐 없으나, 군사적으로 보면 설령 강남군을 순수한 전투부대라 가정한다고 해도, 제 2차 원정이 실패한 원인은 충분히 설명되리라 생각한다. 

  동로군의 항행거리가 약 1백 해리인데 비해 강남군의 출격기지인 경원(慶元, 영파寧波)에서 큐슈에 이르는 거리는 5백 해리로, 동중국해를 가로질러야 하는 도양항해였다. 수륙 연합 기동부대로서 활동하는 데 숙달되어 있던 정예병인 구 남송 금군이라면 몰라도, 악취가 진동하는 비위생적인 구획 속에 수많은 사람과 함께 가두어져, 배멀이와 난파의 공포 속에 24시간 짓눌리는 선상생활을 경험하지 못하였고 체력도 떨어지던 이들 병사집단이 십 수일 동안 이를 감내할 수 있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큐슈 앞바다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아마 강남군 장병들은 이미 심신 공히 피폐해져 있었을 것으로, 우선 무엇보다 휴양할 시간을 주지 않고서는 도저히 전투 - 그것도 쉽지 않은 상륙작전 - 에 투입될 만한 상태가 아니었으리라. 범문호를 위시한 원정군 지도부가 이런 상황을 어디까지 예상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결과적으로 하카타 만에 상륙하여 해안보루를 설정하고 이를 확대시킬 때까지는 적어도 동로군이 "송곳 끄트머리" 가 되어 단독으로 이를 시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큐슈 방비의 추진과 반격계획

  제 1차 침공에서 뼈아픈 전훈戰訓을 얻은 막부는, 이번에야말로 진지하게 대원제국 군대를 요격하기 위한 전비를 거국적으로 추진했다. 실제로 대원제국의 위협이라는 외압은 막부가 국내정책을 펴 나가는 데 요행으로 작용했다 할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얄궂은 면이 존재했던 것이다. 

  1275년 연말, 막부는 큐슈 방비병력의 지휘통제를 강화한다는 명목으로 큐슈와 츄코쿠(中囯, 혼슈 서부 지역) 십 수개 지방의 슈고守護 지위를 교대시켰는데, 새로이 슈고로 들어온 자 대부분은 호죠 가문 일가 내지는 그 여당에 해당하는 인물들이었다. 종래 친제이부교닌인 오토모 씨大友氏와 쇼우니 씨少弍氏를 제외한 큐슈의 슈고들 대부분은 자기들의 본 영지가 있는 동일본에서 움직이지 않고 임지에서의 직무수행을 슈고다이守護代에게 위임하는 게 통례였으나, 이번에 새로이 임명된 슈고들은 직접 병력을 이끌고 실제 임지에 부임했던 것이다.

  그리고 분고豊後 지방이나 아키安芸 지방 등 몇 개 지방의 슈고들에게는, 고케닌御家人뿐만 아니라 본래는 막부의 지배하에 있지도 않았던 비고케닌 무사들까지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이코쿠케이코반야쿠異國警固番役 제도는 확대되고 강화되어, 이윽고 이는 유명한 이시츠이지石築地 수비임무와 연동되게 된다. 이시츠이지란 적이 상륙할 해안방비를 목적으로 삼은 방어시설로, 떼어낸 석재를 층층이 쌓아서 만든 누벽을 경사진 점토로 보강한 것이다. 유적을 확인해보면 높이 약 2미터 / 폭원(幅員, 넓이)은 기부基部 약 3미터, 상부上部는 약 1.5~2미터 정도였다.

  케이코반야쿠와 마찬가지로 그 축성작업은 큐슈의 무사들이 영지의 크기에 따라서 각자 부담하였다. 작업은 켄지 2년(1276) 3월에 시작되었는데, 고작 5개월 만에 돌관공사를 통과, 총 길이는 하카타 만 부분만 해도 약 20km에 달했다. 최종적으로는 하카타 만 일대에서 상륙에 적합한 지형은 남김없이 이시츠이지에 의해 폐쇄되어, 만 전체가 강력히 통합된 방어 시스템으로 변모한 것이다.

  그렇게 방비를 추진하는 한편으로, 막부는 대륙을 향한 적극적인 반격을 계획했다. 즉 1275년 연말, 막부는 큐슈와 아키 지방의 무사(비 고케닌 포함)들에게 "이국 정벌" 의 군역을 준비하도록 통달하였다. 그 계획에 따르면 "이시츠키치 축성을 면제받은 내륙부 무사들에게도 병력을 제공하게 하고, 큐슈와 츄코쿠의 함선을 징발하여 하카타를 출격기지로 삼아, 아마 한반도를 목표로 삼은 반격을 발동"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수많은 무사들이 새로운 군역 추가에 반발하였던 데다, 실제로 방어와 반격이란 두 가지 전비를 동시에 병행추진할 자원을 확보할 방도가 도저히 없었기에, 이 웅대한 외국 정벌계획은 결국 소멸되고 말았다.

  제 1차 침공에서 얻은 전훈에 따라, 막부는 정보의 가치까지 인식하게 되었다. 개전 이후에도 계속되던 사적인 대륙무역을 이용, 막부는 상당히 신뢰성 있는 정보를 수집하고 견적을 내어, 제 2차 침공군이 내습하리란 것을 이미 그 전년에 탐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덧글

  • 함부르거 2017/02/04 13:39 # 답글

    정일본행성? 제가 알기론 정동행성이었는데요. 정식명칭은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이군요. 일본인들의 자의식을 알 수 있어서 재밌군요.
  • 3인칭관찰자 2017/02/04 14:45 #

    정동행성의 정식 명칭은 "정동등처행중서성" 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초엔 일본 정복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기구("동" 자가 일본을 가리켰다고)였기에 원나라랑 일본에서 속칭으로 "정일본행성" 이라고 불렀다고 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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