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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원나라의 일본 침공蒙古襲來 (4)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48호(2001년 8월호) 66~80쪽의 기사인,《몽골의 침략蒙古襲來 - 몽골의 거대원정군에 맞서 싸운 카마쿠라 무사단을 번역한 것으로, 아리사카 쥰有坂純 씨께서 집필하신 글입니다.



  제 1차 침공(분에이 전역文永の役)

  1274년(분에이 11년) 10월 5일 저녁, 쿠빌라이 칸의 일본원정군이 드디어 쓰시마 섬(對馬, 대마도) 앞바다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다음 날인 6일, 바투르 경질주로 옮겨탄 육상병력 1천 명이 사스우라佐須浦 해안에 상륙을 개시. 쓰시마 섬 지토地頭 소우 스케쿠니宗助囯 이하 80여 기의 무사들이 이를 요격해 싸웠으나, 압도적인 전력차 때문에 몇 시간만의 전투 끝에 궤멸당했다. 급보를 알리기 위해 하카타로 탈출시킨 두 명의 가신郎党들을 제외한 전원이 전사하였다.

  쓰시마 섬의 상황에 대하여 이 이상의 설명은 어느 곳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아마 섬 전역이 여몽연합군 장병의 파괴와 약탈에 노출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왜냐면 쓰시마 섬의 긴요지들을 점령한 후 원정군은 곧바로 공세를 재개하지 않고, 전군을 거의 1주일 가까이 이 섬에 머무르게 했기 때문이다.

  섬 전체를 완전히 소탕하려고 했는지, 아니면 또 다른 의도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결과적으로 이는 실책이 되었다. 쓰시마 섬 함락을 전해들은 친제이부교鎮西奉行가 즉각 카마쿠라로 급사를 보냄과 동시에, 이 1주일을 이용하여 하카타 만에 전력을 집중시키는 데 어떻게든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10월) 14일, 드디어 쓰시마 섬을 출발한 원정군은 이번엔 4백 명을 이키 섬壱岐에 상륙시켰다. 슈고다이守護代 타이라노 카게타카平景隆가 지휘하는 무사단 약 100기가 용전하였으나 다음 날인 (10월) 15일에 이르러 사실상 전멸당했고, 섬 전체가 약탈당했다. 어디까지나 '전해들은 이야기' 이기에 신뢰성은 결여된 면이 있지만, 그 유명한 니치렌日蓮의 편지에 따르면 "원정군은 포로로 잡은 주민들 가운데 남자들은 모두 죽여버리고 여자들의 손바닥에 구멍을 뚫은 후 밧줄로 줄줄이 엮어 배로 끌고 갔다." 고 전해진다. 이종족 전쟁 특유의 무자비함에다, 원정군 장병들 다수가 무려 40년에 걸친 한반도의 처참한 전쟁을 경험하였던 사실에 기초하여 생각해보면, 비전투원에게 이와 같은 잔학성을 발휘한 건 오히려 자연스럽다고 해야 할 것이다.

  (10월) 16~17일에 걸쳐 원정군은 계속해서 히젠肥前 지방으로 침공하여, 해상무사단인 마츠라 당松浦堂의 근거지인 마츠라 반도松浦半島와 주변 도서를 습격, 이곳에서도 쓰시마 / 이키 섬과 같이 옥쇄ㆍ약탈이라는 비참한 참상이 반복되었다.

  이렇게 일본의 해상세력들의 거점을 남김없이 짓부순 원정군은 (10월) 19일, 드디어 하카타 만博多灣 진입을 시도했다. 아마도 당초부터 예정하였을 계획에 따라 함대 정박의 적합지형인 이마즈今津 앞바다에 닻을 내리고, 일부 병력들이 상륙을 개시했다.

  다음 날인 (10월) 20일 새벽, 원정군은 동진을 계속한 이마즈 상륙부대의 엄호하에 고려군 부대를 모모지바루百道原에 상륙시켰다. 이윽고 회합한 이마즈ㆍ모모지바루 상륙부대 약 5천 명이 하코자키筥崎 주변에 집결해 있던 일본군의 측면을 위협하는 사이에, 주력군 약 1만 5천 명이 하카타 정면에 있는 해안에 상륙을 강행하는 대단히 빼어난 전술이 행해졌다.

  상륙부대의 최초 목표는 하카타, 그 다음으로 다자이후를 점령하는 것이었음은 의심할 수 없다. 만약 일본군이 다자이후를 실함한다면 원정군이 츠쿠시 평야筑紫平野로 진격하는 것을 방해할 방도가 사라지게 되며, 북 큐슈 전체가 분단당할 위기에 놓이게 된다.

  일본군의 총사령관은 친제이부교닌鎮西奉行人인 쇼우니 스케요시少弍資能, 부사령관은 같은 지위의 오토모 요리야스大友賴泰였다. 그 날의 야전지휘관은 스케요시의 아들인 쇼우니 카게스케少弍景資였다. 이 날까지 큐슈 각지에서 모여든 고케닌들의 병력은 약 수천 명 정도로, 최대로 잡아도 1만 명을 넘지는 못했으리라 생각된다.

  쇼우니 스케요시와 오토모 요리야스는 훗날, 이 전역에서 겁쟁이짓을 저질렀다는 비방을 받게 되었는데, 그 진위는 별개로 쳐도 이 날 일본군의 지휘통신력이 원정군에 비하면 대단히 열세였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중세 무사의 주무기는 활과 화살弓矢로, 그 전술과 전투단위는 말에 탄 주인主人을 중심으로 일족 / 가신들을 거느리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보병들로 이루어진 원정군의 대부대에 맞서, 완전히 조직전투에 무지했던 일본의 기마무사들이 야! 야! 거리면서 자기 이름을 댄 후 저돌맹진하였으나 이윽고 우르르 둘러싸여 죽임을 당했다, 】는 식으로 항간에 퍼져 있는 이야기를 쌍수 들고 믿기는 힘들다 생각하지만(귀중한 사료로서 인용되는 타케자키 스에나가竹崎季長의《모우코슈라이에시蒙古襲来絵詞》가 사실을 추구한 전사戰史가 아닌,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을 위시한 개개인의 활약과 그 공적을 불멸의 것으로 남기기 위한 목적에 의해 그려졌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장 전체의 국면으로 볼 때 이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으리란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말하자면 원정군의 편제ㆍ지휘통제 시스템이 수만 명 단위의 회전을 치르는 데 최적화되어 있는 데 비해, 이보다 훨씬 소규모의 전투를 상정하여 구축된 봉건제도하의 일본군의 편제ㆍ지휘통제 시스템은 수많은 부대를 유연하게 운용한다, 는 점에서 도저히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렇기에 안 그래도 열세였던 일본군은, 상륙을 시도하는 적군을 해안가에서 저지하는 데도 실패했는데다 그 후에 벌어진 많은 전투에서도 국지적으로 압도당하게 된 것이었다.

  일본군은 좌측 방면에서는 아카사카 부근에서 적의 조공助攻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으나, 하카타 방면에서는 적 주력부대의 공격을 버텨내지 못하고, 500기를 직접 인솔하여 돌진한 야전지휘관 쇼우니 카게스케 자신이 거의 고립될 뻔한 위기를 간신히 모면하고 패주해버린 상황이었다. 하코자키는 이윽고 적의 수중에 떨어졌고, 하치만구八幡宮는 전소되었다. 하카타 시가에도 적군이 침입했다.

  하루의 전투가 끝이 난 저녁 무렵, 일본군 전선의 좌익과 정면은 붕괴되기 직전이었다. 이렇게 되자 일본군 사령부는 하카타를 포기하고 주 저항선을 다자이후로 후퇴시키기로 결심했다. 다자이후의 요새는 방치된지 오래였으나 아직도 이곳에는 대규모의 토루와 해자로 이루어진 방어시설이 갖추어진 수성水城 유적이 존재했기에, 지금도 상당한 방어력을 발휘하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불안 속의 하룻밤이 지나고 날이 밝은 (10월) 21일, 일본군을 대경하게 만드는 사태가 발생했다. 하카타 만을 메우다시피 한 대형함 3백 척으로 이루어진 대함대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단 1척의 선박만이 시가 섬志賀島에 좌초된 채로 남겨져 있었는데, 자결을 선택한 지휘관을 제외한 나머지 승무원들은 전원 포로가 되는 길을 선택했으나, 훗날 모두가 처형당하고 말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정확하게 전해주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려사高麗史》가【 밤중에 급작스럽게 일어난 대폭풍우에 의해 수많은 함선이 침몰하여, "전선에서 돌아오지 못한 자, 무려 13,500여 명" 】이라고 서술하고 있는 데 비해,《원사元史》는 간결하게【 관군이 통제되지 못했던 데다 화살이 다 떨어져서 】라고 적고 있을 뿐이다.

  아마도 폭풍우는 일어났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13,500명이란 수치의 여부를 떠나, 원정군이 폭풍우로 인해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는 것도 사실이리라. 

  그러나, 군사적 상식을 통해 생각해보면 원정군이 철수한 이유는《원사》가 기술한 그대로라 생각된다. 일몰 이후 사령부에서 군사회의가 열려, 고려군 지휘관 김방경金方慶이 공세를 계속하여 전과를 확대할 것을 강경히 주장했으나, 총사령관 힌두가 이를 기각하고, 상륙부대 전원을 즉각 해상으로 철수시킨 것이다.

  세 지점에 설정해놓은 해안 교두보는 고사하고, 일단 점령에 성공한 하코자키와 하카타까지 쉽사리 포기한 것은 작전을 속행하려는 의지가 힌두에게 전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다음 날에 전투를 재개하는 건 불가능했다.

  이것은 추측의 영역을 넘지 않는 이야기이나, 일본군의 저항이 예상 이상으로 치열했던 데다,《원사》의 서술대로 주무기인 화살이 다 떨어졌으며, 그리고 좌부원수 유복형이 가슴에 화살을 맞아 중상을 입었다는 점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한 후 내려진 결심으로 보인다. 그리고 몽골군 사령부에는 이윽고 하카타 방면으로 급행해오리라 예상한 일본군의 증원부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는 점도, 후세의 우리는 망각해선 안 될 것이다.

  쓰시마 섬 / 이키 섬 / 마츠라를 유린하고, 하카타를 불태웠으며, 일본군에 큰 타격을 주었고 나아가서는 일본 정부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것은 원정군이 거둔 성과로선 결코 적은 건 아니었다. 실제로 쿠빌라이 자신도, 1차 원정의 결과를 패배했다고 간주하지 않은 바 있다.

  참고로 유복형에게 화살을 쏜 것은 다름아닌 쇼우니 카게스케 본인이었다. 카게스케는 하카타 정면부에서의 전투에 패하고 패주하던 중에, 천천히 고개를 돌려 추격에 나선 적 지휘관을 향해 활을 쏴 정확히 명중시켰는데, 그 지휘관이 유복형이었다는 것이다.  

 

덧글

  • 도연초 2017/02/03 17:17 # 답글

    니치렌이 당시로서는 워낙에 사이비 교주같은 행각으로 악명을 떨쳤기 때문에 그의 말이 더더욱 신빙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생각이...
  • 3인칭관찰자 2017/02/03 17:49 #

    솔직히 상식적으로 행동하면서 포교하는 부류와는 영 거리가 먼 양반이었으니(....) 일련종 신도라면 니치렌이 한 말이니 사실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요.
  • 재팔 2017/02/05 00:21 # 답글

    갑자기 드라마 호조 도키무네의 그 장면이 생각나네요.
    "조게 모야?"
    "가루매기겠지. ㅋㅋㅋㅋ"
  • 3인칭관찰자 2017/02/05 08:35 #

    아.... 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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