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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원나라의 일본 침공蒙古襲來 (3)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48호(2001년 8월호) 66~80쪽의 기사인,《몽골의 침략蒙古襲來 - 몽골의 거대원정군에 맞서 싸운 카마쿠라 무사단을 번역한 것으로, 아리사카 쥰有坂純 씨께서 집필하신 글입니다.


  몽골군의 전비戰備

  쿠빌라이 칸은 귀순해 온 고려 정부의 개성開城 재천도도 기다리지 않고서 1268년, 함선 1천 척을 정비해 놓으라고 명령했다. 이렇게 전비를 갖추도록 하는 목적은 "남송南宋 내지는 일본을 탐하려는" 것이라고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1270년 무렵에 들어서는, 통교 요구에도 카마쿠라 막부가 "묵살" 방침을 고수하는 것을 더이상 간과할 수 없게 된 쿠빌라이가 일본에 대한 징벌원정군을 파견할 의지를 확고히 굳히고 있었다. 삼별초가 멸망당하고 마지막 사자가 돌아가버린 1273년 연초에는, 한수漢水에 있는 요새도시로 남송의 하천방어 시스템의 요지였던 양양襄陽이 6년간의 공방전 끝에 결국 함락되었다. 주 전역인 남송 영토에서의 전쟁이 우세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은, 쿠빌라이로 하여금 고려에 있는 병력을 걱정없이 일본으로 보내는 것을 가능케 하였다.

  다음 해인 1274년 1월, 쿠빌라이는 고려에게 일본 원정에 대한 전비로서 다시 대형 항양선航洋船 300척을 정비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3월에는 힌두 장군을 정동도원수(征東都元帥, 총사령관), 홍다구를 우부원수(右副元帥, 수석 부사령관), 한족인漢人인 유복형劉復亨을 좌부원수(左副元帥, 차석 부사령관), 그리고 고려군의 지휘관인 김방경金方慶을 도독사都督使로 삼은 일본원정이 정식으로 발령되기에 이르렀다. 원정군의 출격기지는 진해만鎭海弯을 끼고 있는 합포合浦로 정해져, 진발進發은 그해 7월로 결정되었다.

  작전에 동원되는 병력은, 우선 고려가 제공하는 함선이 합계 9백 척으로 그 중에서 대형함이 300척 / "바투르 경질주"(輕疾舟, "바투르" 는 몽골어로 "용자" 라는 뜻)라 불리던 소형 쾌속선이 300척 / 수급주(水汲舟, 보급용 소형선박 내지는 범용 특무 소형선박)가 300척. 경질주와 수급주는 아마 바다를 건너갈 능력이 없었을 것으로, 외양에서는 대형 선박의 갑판에 탑재되었으리라 생각된다.

  대형선 1척의 탑승원 수는 50~60명 정도로, 함대 전체의 탑승원은 약 1만 5천 명. 그러나 근년의 연구에 따르면 탑재된 소형 선박의 운용에 관여된 요원들을 별도로 계산하여, 도합 2만 ~ 3만 명 정도로 잡는 학설도 존재한다.

  이들 함선의 정비는 6월 내로 완료되었으나, 대부분은 신조선이 아니며 정규군의 함선 내지는 구 삼별초에게서 포획한 함선들을 긁어모은 것이었다.  

  그런 한편, 동원된 육상병력은 2만 5백 명. 그 구성은 힌두 밑에 있던 고려 주둔군이 4,500명 / 홍다구 밑의 둔전병 500명 / 새로이 본국에서 도착한 증원병력이 1만 명 / 고려군 5,500명이었다. 오오바 쇼이치大葉昇一의《분에이 전역에서 일본원정군의 구성》(군사사학 138)에 따르면, 몽골군은 도착 상륙지점이었던 하카타 만을 약 2만 ~ 3만 명이 양륙가능한 지형이라 분석하고 있었고, 원정군의 병력규모는 이에 기반하여 결정된 것이라 한다.

  육해군 병력의 동원업무가 완전히 완료되어 원정군이 진해만에 집결을 완료한 것은, 예정보다 늦어진 9월의 일이었다. 함대는 10월 3일에 닻을 올려, 최초의 공격목표인 쓰시마 섬(對馬, 대마도)으로 침로를 잡았다.


  카마쿠라 막부鎌倉幕府의 전비戰備 

  아무리 국제정세에 무지했다고 해도 사자가 오는 족족 묵살하였던 이상, 이윽고 일본의 국토가 몽골군의 군사원정을 입을 공산이 적지 않다는 건 카마쿠라 막부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서술한 대로 토쿠소得宗 권력을 둘러싸고 호죠 일가가 안팏의 적들과 투쟁하는 데 힘을 할애해야 했던 점도 한몫하여, 막부의 대응은 전체적으로 대단히 둔중한 것이었다.

  1273년, 2월 소동이 종식된 후 드디어 막부는 이코쿠케이코반야쿠異國警固番役라는 제도를 신설하였다. 이는 큐슈九州의 고케닌들을 대상으로 삼은 것으로, 순번에 따라 교대로 쿄토와 카마쿠라의 경비에 임하는 오오반야쿠大番役 의무를 면제시키는 대신, 치쿠젠筑前 / 히젠肥前 연안 지방의 방비병력으로 차출하는 것이었다.

  그건 그렇고, 고대 율령국가 당시 대당對唐 / 대신라전對新羅戰을 상정한 요새 겸 광역방비사령부로서 큐슈 일대의 군사적 지휘권을 관장해온 곳이 바로 다자이후大宰府였다.

  일본과 당나라가 조공 시스템을 통해 우호관계를 맺은 이후엔, 다자이후는 군사기능을 상실하고 외교관청이자 무역을 통괄하는 관청으로서의 역할을 주로 수행하게 되었다. 율령국가가 붕괴한 이후, 헤이시平氏 정권은 대륙무역을 독점하려는 목적으로 다자이후를 자신들의 지배하에 두는 동시에 새로이 친제이부교鎮西奉行를 설치하였는데, 이미 그 임무는 국토방위전을 지휘하는 게 아닌, 서일본의 무사단들을 중앙정권이 엄중히 감독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카마쿠라 막부는 다자이후의 관할권 뿐만 아니라 친제이부교 지위를 헤이시로부터 이어받았는데, 동일본 무사단의 결속에 의해 성립된 막부의 권력이란 것도 서일본에서는 고케닌御家人이 아닌 자는 물론이요, 고케닌들에게조차 그 위령이 먹혀들게 할 수가 없었으며, 그러한 상황은 조큐의 난에서 승리한 후에도 그다지 변하지 않고 있었다.

  당시 친제이부교 지위는 오토모 씨大友氏와 쇼우니 씨少弍氏가 세습하고 있었고, 각 지방의 슈고들이 교대로 담당하도록 정해진 이코쿠케이코반야쿠를 지휘하는 것도 사실상 복수 지방의 슈고직을 겸임하고 있던 이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중앙에서 보내진 예산과 자재가 빈약하여, 적 정보를 분석한 후 이에 의거하여 합리적인 작전계획을 책정하기는 커녕, 국토방위전을 치를 만한 전비를 갖춘 것이라곤 도저히 말할 수가 없는, 어디까지나 보다 강화된 경비행동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 이 제도의 귀결이었다.

  밀어닥칠 몽골군의 침공에 맞서 일본군에게 기대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전략적인 기습을 회피하는 것 정도였던 것이다.



덧글

  • 진냥 2017/01/27 21:49 # 답글

    ...그래도 가마쿠라 막부의 대응 중 긍정적으로 볼 만한 점이 백 가지 중 하나쯤 있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보고 있는데... 야아 안되겠어 생각 이상으로 글렀어 하는 답이 나오지 않을지 두려워집니다...
  • 3인칭관찰자 2017/01/27 22:24 #

    몽골에게 어그로를 잔뜩 끈 전쟁 이전은 물론이고(...) 몽골의 1차 침공이 끝날 때까지도 막부는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고(오토모 가문이나 쇼우니 가문 같은 북큐슈의 무사들만으로 맞서 싸웠다고) 여몽연합군이 철수한 후에야 부랴부랴 대응에 나서서 7년 후에 시작된 2차 침공 때에는 제법 사전준비를 잘 했다.. 는 평가를 듣더군요.
  • Hyth 2017/01/27 23:37 # 답글

    대비가 이정도밖에 안됐으니 그 태풍에 카미카제란 이름이 붙을만했군요;;
  • 3인칭관찰자 2017/01/28 11:20 #

    일본이 준비를 등한히했던 여몽연합군 1차 원정 때의 태풍이 그야말로 천우신조가 아니었을지..

    단지 15년 전에 쓰인 이 글과 달리 요즘의 일본 학계는 태풍의 영향은 제한적이었다 - 개중에는 그 때 태풍이 오지 않았다고 하는 학자도 있는 - 고 하면서 무사들의 활약으로 원나라의 침공을 막을 수 있었다며 일본군의 정예함을 부각시키는 추세더군요.

    특히 당시 일본 무사들의 고리타분한 전법이 몽골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해당 사료의 가치를 신뢰할 수 없다면서 부정해버리는 분위기가 급격히 퍼지고 있습니다(...)
  • 도연초 2017/01/29 22:16 # 답글

    하지만 큐슈 무사들이 실전에서 발휘한 역량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가 문제... 가마쿠라 막부의 실질적인 대규모 실전경험은 조큐의 난이 마지막일테고 더욱이 2월소동의 후속처리 문제로 큐슈 무사당들의 알력이 채 가시기도 전일 텐데...

    거기다가 당시 원의 정벌군 거의가 중국인들이라 전쟁에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 3인칭관찰자 2017/01/29 23:06 #

    《하치만구도킨》이라는 일본사료가 있는데 20세기 끝날 무렵까지 이의없이 1차사료로 평가되던 이 책을 바탕으로 일본 무사들은 몽골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으며, 몽골군은 각지에 상륙하여 일본군을 격파하며 하카타와 하코자키까지 불바다로 만들었다... 고 되어 있었기에 패전 이전의 일본에서조차 그걸 사실로 받아들였고 지금까지 이어져 왔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앞의 사료의 신빙성에 한계(신사가 남긴 기록의 특성상 태풍을 불게 한 신의 영험함을 강조하는 게 자신들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몽골군의 강함을 강조하고 무사들을 폄하할 필요가 있었다.. 는) 를 그으며 일본의 다른 1차 사료(주로 당대의 편지들)들을 인용하면서, "몽골군은 하카타와 하코자키에 상륙한 사실이 없고 북큐슈의 무사들은 하카타 코앞에 있는 아카사카赤坂란 곳에서 몽골군을 격파하여 하카타가 유린당하는 것을 막아냈다." 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아졌더군요.
  • ff 2019/06/05 21:03 # 삭제 답글

    일본 넘들의 자기중심적 역사관으로 인한 자의적인 사료 부정은 한두끝도 없는 법이지요 하치만 구도킨이라는 자국측 사료에서 객관적으로 인정된 일본군의 전투력 열세 사실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려고 그런 어거지를 부리는 것이지요
  • 3인칭관찰자 2019/06/06 00:39 #

    저도 근래 일본에서 번지는 주장에 대해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하치만구도킨이란 사료 자체는 문제가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원나라 침공 이전 내용으로 신공황후 삼한정벌 이야기가 당당하게 등장할 뿐 아니라, 한반도 세력이 일본을 먼저 침략하여 남편인 텐노를 죽인 걸로 나와 있고 신공황후는 이에 맞서 원수를 갚기 위해 반격에 나선 데 불과하다고 극력 옹호하기까지 하는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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