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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원나라의 일본 침공蒙古襲來 (2)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48호(2001년 8월호) 66~80쪽의 기사인,《몽골의 침략蒙古襲來 - 몽골의 거대원정군에 맞서 싸운 카마쿠라 무사단을 번역한 것으로, 아리사카 쥰有坂純 씨께서 집필하신 글입니다.


  호죠 가문北条家의 토쿠소 전제

  이윽고 몽골군과 칼날을 겨루게 되는 카마쿠라의 고케닌御家人들에게는《원나라의 침략元寇》에서 언급하는 "이 곳에서 나라를 위해"라는 의식이 실제론 전혀 없다시피했다.

  글 첫머리에서 서술했듯이 고케닌 제도를 축으로 삼은 중세 (일본의) 봉건제도는 사회를 광범위하게 군사화시킨 시스템이긴 했으나, 그런 반면 중앙권력에 의한 통합력은 극도로 취약했다. 고케닌들은 각기 카마쿠라도노鎌倉殿=쇼군將軍으로부터 영지를 하사받은 "은혜御恩"의 대가로 군역을 제공하여 "봉공奉公"하는 쌍무적 계약관계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들이 생명을 걸고 싸우는 건 오로지 자신의 영지=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집안家"의 권리를 지키며, 더 나아가 전공을 세워서 이를 확대해 나가려는 데 불과했다.

  덧붙여 말하자면, 이 시대에 무사 집안들의 지배는 결코 절대적인 게 아니었으며, 조정을 정점에 두고서 쿠게公家나 사원寺社이 소유한 장원을 기반으로 삼고 있던 고대 이래의 세력에게도 아직은 커다란 힘이 남아 있었다.

  1199년, 카마쿠라 막부의 창시자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가 상당히 때이른 죽음을 맞은 후, 쇼군 권력은 무사 가문들의 동량棟梁다운 실력과 신망을 잃어가며 급격히 쇠퇴, 막부의 운영은 호죠 씨를 위시한 유력 고케닌들의 합의체로 넘어가게 되었다.

  호죠 씨는 쇼군 가문의 외척이라는 입지를 가지고 있긴 했으나, 요리토모를 섬긴 여타 고케닌들과 비교해보면 그 영지나 위세는 현격히 열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대의 여걸인 비구니 쇼군 마사코尼將軍政子와, 처음으로 싯켄執權=쇼군 후견인으로서 실력을 거머쥐게 된 그 남동생 요시토키義時 2대에 걸쳐 호죠 일가는 생존을 위한 온갖 권모술수를 부려대며, 쇼군 가문까지 포함하여 경쟁자들을 계속하여 매장해나가면서 권력을 신장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1221년에 벌어진 죠큐의 난承久の乱, 즉 막부를 타도하고 정권을 쿄토의 조정으로 되돌리기 위한 구세력들의 마지막 군사적 도전을 분쇄함으로써, 호죠 씨는 무사 가문의 이익을 옹호하는 자로서의 시험에 멋지게 합격, 다른 고케닌들들과는 차별되는 지도적인 지위를 확립하였다. 싯켄 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하극상이 판치던 먼 훗날의 전국시대戰國時代와는 달리, 결국은 권위적 뒷받침을 갖지 못한 일개의 찬탈자에 불과했던 호죠 씨의 권력은 결코 절대적인 것이 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싯켄 정치는 현실에선 이전과 다름없이 유력 고케닌들의 합의와 동의에 의해 행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일변시킨 것이 요시토키의 증손자에 해당하는 토키요리(時賴, 출가 후 사이메이지 뉴도最明寺入道)였다. 형을 독살하고 가문을 가로챘다고도 하는 비정불굴非情不屈의 토키요리는 안으로는 호죠 씨 일가의 서출 세력들을 압박하고, 밖으로는 유력 고케닌들을 분열시켜 각개격파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리고 1247년 호우지 전투宝治合戰에서 호죠 씨를 위협할 만한 실력을 갖춘 최후의 호족인 미우라 씨三浦氏를 멸망시키면서 그의 소망을 달성하였고, 이로서 호죠 씨의 독재는 명실공히 실현되기에 이르렀다.

  막부의 실권은 이제 싯켄 지위가 아닌, 호죠 가문 적류嫡流의 당주(호죠 요시토키의 법명인 "토쿠소得宗"에서 따왔다)가 거머쥐게 됨에 따라, 이 체제를 일컬어 "토쿠소 전제정치"라고 부른다.

     
  외교교섭과 결렬

  쿠빌라이는 정복하는 데 성공한 고려 정부에게 일본과의 외교교섭을 하도록 명령했다. 1266년에 보낸 최초의 사자使者는 아마도 일본과의 교섭, 나아가서는 대 일본전쟁에 앞장서는 것을 꺼린 고려 정부의 의도에 의해 결국 바다를 건너가지 않고 무마되었다.

  이를 알고 격노한 대 칸의 엄명에 의해, 제 2차 사자가 일본에 상륙하여 다자이후太宰府에 들어간 게 1268년의 일이다. 흔히 알려져 있듯이 쿠빌라이의 국서는 "하늘의 명을 받은 대 몽고국 황제, 일본국왕에게 국서를 보낸다上天眷命大蒙古國皇帝奉書日本國王"라는, 유라시아 대륙의 지배자치고는 상당히 정중한 인사로 시작되어, 고려를 통해서 일본과 제국이 우호관계를 맺고 싶다는 뜻을 전달하고, "불선不宣" 즉 일본을 신하로 삼을 의도는 없다는 것을 밝히는 내용으로 끝을 맺고 있다. 

  이 문면이 드러내는 건, 적어도 이 시점에서 쿠빌라이에겐 일본을 정복할 의지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의 목적이란 건 기껏해야 당 황조 이래의 형식적인 조공관계를 부활시킴으로써, 일본을 경제적 / 군사적 / 심리적으로 남송으로부터 떼어내는 것이었을 것이다.

  대륙과 한반도의 정세를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면, 이 제안을 받아들이는 쪽이 일본에겐 커다란 이익이 되었으리라. 한편으로는, 반대로 형식적으로나마 일본이 "팍스 몽골리카"란 새로운 세계질서에 편입되는 것을 거부하고 쿠빌라이의 제안을 거절한다고 하면, 지체없이 싸울 준비를 시작함과 동시에 남송과 베트남, 내지는 이미 몽골에 굴복한 고려 등에게 공작을 하여, 동아시아의 반 몽골세력들을 결집할 수 있도록 도모하는 것이 타당한 방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일본정부=카마쿠라 막부는 단순하게 그저 국서를 묵살해버리는 최악의 방침을 선택하였다. 이는 우선, 당시의 일본인들이 국제정세나 외교에 관련한 지식&경험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했고, 몽골의 군사력의 실태가 어떠한 것이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며, 다른 면으로는 5년 전 아버지 토키요리의 죽음으로 토쿠소 지위를 상속받은 (호죠) 토키무네時宗가 아직 18세의 젊은이에 불과하였기에, 막부의 권력이 반드시 안정되었다고 할 수 없는 상태였다는 점에도 원인이 있다. 사실, 1272년엔 토키무네의 이복형인 토키스케時輔가 모반혐의로 막부의 토벌을 받아, (쿄토) 로쿠하라六波羅에서 패배하여 죽음을 당한 사건(2월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던 것이다.

  분명, 항만도시 하카타博多를 중심으로 삼은 큐슈의 사람들은 이른 시기부터 대륙과 활발히 교역하는 데 종사하였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사적인 사업으로서 자유로이 행하는 것이지, 막부나 조정이 공적으로 관여하는 바가 아니었다.  교토든 카마쿠라든 대륙의 사정을 알기에는 너무나 먼 곳에 위치했다. 실제로 1271년, 진도珍島로 여몽연합군이 진공한다는 절박한 정황을 알고서 삼별초三別抄가 일본에게 화급히 구원을 요청한 적이 있었으나, 막부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은 채 이를 '묵살'하였었다.

  이러한 사정에 의해 사자는 아무런 소득도 없이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쿠빌라이는 인내심을 발휘하여 이후에도 1272년에 이르기까지 다시 또 4차례나 사자를 보내었으나, 이를 '묵살'한다는 막부의 기본방침은 변하지 않았다. 쿄토의 조정에서는 어디까지나 통교를 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일단 몽골과 고려에게 그러한 뜻을 회답하기 위한 답장의 초안은 만들어 두었으나, 막부에서는 이를 채용하는 것조차 거부했다. 

  이렇게 하여, 양국 간의 외교교섭은 완전히 단절되었다. 이제는 활과 화살에 의한 결착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덧글

  • 손모가지 걸기 운동 2017/01/21 15:46 # 답글

    운좋게 몽골의 침공을 막았지만 사실은 백성들을 굉장히 위험한 상황에 노출시킨 것이군요.
    태평양전쟁때도 핵폭탄 맞는 것을 피할 수 있었는데, 운좋게 몽골의 침공을 막은 역사로부터 잘못된 교훈을 얻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 3인칭관찰자 2017/01/21 19:26 #

    두 번 모두 일본이 상당히 위험한 도박을 했다는 점은 사실이지요.
  • 명림어수 2017/01/22 03:23 # 삭제 답글

    저 때 일본 조정은 삼별초와 고려정부도 구별 못 했다는데요, 막부는 정보가 좀 나았을려나요?
  • 3인칭관찰자 2017/01/22 08:48 #

    아마 오십보백보였을 겁니다. 막부 역시 삼별초가 뭘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말이 있어서..
  • 김대중협정 개정안 2017/01/22 08:58 # 답글

    저 글을 쓴 사람은 일본인인데도 상당히 냉철하네요.
    일본인 중에는 기록의 일부를 떼어와 한국이 일본 침공을 부추겼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황 속에서 기록을 읽어내지 못하는 것이지요.
    저 글에서는 당시의 일본 지배도적들이 알고서 모험을 건 것이 아니라 하룻강아지 범무서운 줄 몰랐던 것으로 분석하는 거 같습니다.
  • 3인칭관찰자 2017/01/22 18:00 #

    이글루스에도 고려가 일본침공을 부추겼다는 주장을 했던 사람이 있긴 있었죠.
  • 바람불어 2017/01/22 12:30 # 답글

    2ch류에서 보면, 역사덕후를 제외한 그런 일본애들(넷우익?)은 조선도 원과 함께 일본을 '침략했다' 정도만 알고, 그걸 강조해서 이용해먹더군요. 그것만 필요하니까. 저고여 피살, 무신정권 대몽항쟁의 내용, 강화천도, 원종과 쿠빌라이칸의 대면 이런 건 몰라도 되니까요.

    상대방 국가의 역사적 사실을 단편적으로 지금의 논쟁에 이용해먹는 건,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일이겠죠?^^; 요즘엔 오키나와에 대응해서 제주도를 들이미는 넷우익 글도 봤습니다. 공통점도 있지만 차이점도 분명 있는데 넷우익뿐만 아니라 한국일본의 진보쪽에서도 미군기지,본토가 식민지화 요런 공통점을 갖고 그 부분을 강조하더군요.
  • 3인칭관찰자 2017/01/22 18:58 #

    징비록에서 대마도주의 외교승이었던 겐소(현소)가 "너희가 옛날에 원나라 앞세워 침략했으므로 우리가 복수하는 건 당연하다" 고 말했다고 하니 고려의 사정을 고려않고 앞뒤맥락 자른 후 침략받은 것만 강조하는 태도는 요즘의 넷우익 이전에도 꽤나 유구한 역사를 지녔다고 할 수 있을지도요(....)

    자기에게 편하고 유리한 대목만 찾아서 그것만 부각시키고 그와 반대되는 증거는 무시하거나 감추려하는 경우가 너무 허다한 건 (분야, 국가불문) 정말 맞는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넷우익들 베트남전쟁으로 물타기하는 건 많이 봤는데 이제는 제주도와 오키나와를 등치시키려는 건가요 ㅋㅋㅋ
  • 바람불어 2017/01/26 21:48 #

    추측하기론 부라쿠민, 아이누, 오키나와 등에 대한 반격소재로 넷우익이 선택한게 노비, 백정 그리고 제주도 등인 것으로 압니다.

    사실 제주도의 특수성(?)은 여러모로 가치(?)가 있어서 국내외에서 주목받죠. 미군기지 관련해서만 진보쪽에서 주목해온 건 꽤 오래되었고, 제주특별자치도 설치(2006년)에 대해 오키나와쪽에서 당연히 관심갖고 시찰이나 논문도 나왔고요.

    본토 vs 제주 = 본토 vs 오키나와라는 방식이 일리는 있지만 공통점만 강조해버리면 서로 다른 역사,현재상황을 왜곡할 우려도 많잖아요. 본토에 대한 종속성도 다르고 본토의 정치행정제도도 달랐고, 종속되기 시작한 연대부터 차이가 나고, 하다못해 본토의 미군기지 분포까지도 많은 차이가 있는데 저마다 특정부분만 강조하더군요. 무슨 오키나와 역사기행 이런 거 보면 의도는 나쁘지않은데 선입견을 딱 정해놓고 그 안에서만 이해하려 하더군요. 넷우익이야 의도 자체가 악이지만.
  • 3인칭관찰자 2017/01/27 17:04 #

    연대의 대상이란 거군요. 제주도에는 4.3 사건이, 오키나와에는 1945년 오키나와 전투가 도민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아있는데다, 군사기지 둘러싼 문제로 갈등 빚고 있다는 점은 유사하겠지요. 오키나와가 제주도의 특별자치구화에 관심을 보였다고 지적하셨듯이 제주도로서도 오키나와 도민들의 반 미군기지 투쟁에서 배워나갈 게 있을테고.

    그리고 오키나와나 제주도가 상대를 바라보는 모습이 고정해놓은 틀에 갇혀 있다는 건 맞는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그 두 곳이 밟아 온 비극적인 역사라든가 민초의 고난이라든가 본토로부터 받은 차별이라든가 이런 쪽으로만 강조하다보면 다른 점을 놓치기가 쉬울 듯 합니다. ;;;
  • 바람불어 2017/01/27 18:48 #

    또 댓글 써서 미안함다^^; 이런 얘길 딱히 쓸데가 없어서 여기다 쓴거니 이해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오키나와 수리성 복원에 자극받아 제주 왕궁(성주청?)도 복원해보자는 전 제주문화원장의 칼럼도 링크해놓습니다. 두 지역의 공통점에 근거해서 이런 식의 자극도 받는가봅니다.

    http://www.jej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661356
  • 3인칭관찰자 2017/01/27 19:10 #

    뭐 댓글 더 다는 걸로 죄송하다고 하실 게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연휴기간이라 시간이 널널하니 말이죠) 류큐 왕국 재조명이 탐라국에 대한 자각(?)으로 이어질 줄은... 링크해주신 글 잘 읽겠습니다.
  • 레이오트 2017/01/22 21:07 # 답글

    이걸 보니 지금까지 일본 특유의 비뚤어진 자신과 외부 세계에 대한 인식이 무엇에서 기저하는지 알것도 같습니다.
  • 3인칭관찰자 2017/01/22 21:25 #

    바다로 인해 보호받는 '섬나라' 특유의 기질과 자신감(근자감?)이 느껴진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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