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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군상》전장을 습격한 공포의 전염병 (2) ┣ 雜誌 歷史群像



  이 글은 잡지《歷史群像》제 42호(2000년 여름호) 106~111쪽의 기사인,《전장을 습격한 공포의 전염병》을 번역한 것으로, 코바야시 나오키小林直樹 씨께서 집필하신 글입니다.


  고대, 중세 시대의 질병에 관한 사고

  전사를 연구하다 보면 식량을 위시한【병참】이 문제시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미비한 병참 때문에 대군을 부양하지 못하고 싸움에 패배한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러나【전장위생학】적 견지에서 보자면, 병사가 매일 배출하는 배설물 쪽이 더욱 큰 문제가 된다. 극언하자면 '먹는 건 명령으로 한동안 참게 할 수 있으나, 싸는 건 명령으로 멎게 할 수 없는 것' 이다.

  그러나 고대, 그리고 중세에 이미 "배설물이나 오염된 물이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아닌가" 하는 자각이 있었다. 단지 현미경 같은 게 없는 시대였기에 이런 불결한 물질에서 병원체가 번식한다는 사고를 했던 것은 아니고, "더러워진 공기가 질병을 유발한다" 고 여겨졌다. 거기에다 전염병에 걸린 병자가 이상한 냄새를 풍기는 경우가 많은 걸 보면서, 병이 사람에서 사람에게 감염되는 건 이러한 나쁜 공기(미아즈마)가 원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예를 들면, 모기에 의해 감염되는 말라리아는 여름이 되면 늪지나 웅덩이에서 위와 같은 나쁜 공기가 올라와 발생하는 것 으로 여겨졌다. 말라리아의 어원이 이탈리아어로 "나쁜 공기" 에서 비롯된 건 이 때문으로, "여름철엔 늪지대에 다가가지 않는 것이 말라리아에 걸리지 않는 최선의 방책" 이라고 생각했다. 기실 이 대책은 여름철에 발생하는 모기와 접촉할 기회를 줄인다는 의미에선 가장 합당한 방법이었다.

  중세 크리스트교 세계에서는 "교만한 인간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벌 내지는 시련" 이라는 인식이 붙여졌다. 이 "천벌" 이란 생각은 과학적 의료사상의 관점에서 본다면 상당히 오컬트적인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는 시기의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는, 이런 종교적이고 점성술적인 원인도 검토되고 있었다. 한 가지 사례를 들면, "인플루엔자가 유행하는 건, 하늘에 걸린 별들의 신비적인 영향을 받았기 때문" 이라고 간주되었다. 이 "영향(influence)" 이라는 단어가 바로 인플루엔자(독감)의 어원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시대배경 속에선 군대에 조직적인 위생대책을 기대하는 게 어렵다. 용병을 중심으로 한 군대조직으로는 통일적인 군사위생대책을 유지해나가는 건 곤란하다는 게 자명했다. 그런 한편으로 당시의 군대는 각지를 다스리는 영주가 각자 모여들어 구성되었는데, 이들도 군사행동이 끝나면 바로 해산했다.

  일반적으로 위생학의 관점에서 본 군대는 "밀집하여 야외에서 자고, 언제나 영양섭취가 부족하고, 살육이라는 커다란 짐을 매일 짊어지고 스트레스 상태에 놓여 있는 피로한 집단" 이다. 이러한 집단에 대한 구체적 위생대책은 국민들로 구성된 상비군이 등장하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이런 상비군을 종횡무진으로 인솔한 인물이 바로【나폴레옹】이다.


  나폴레옹 VS 전염병 장군

  18세기까지의【의학 암흑시대】는 19세기에 들어와 종언을 고했다.

  1796년에는【제너】에 의해【우두 접종법】이 발명되고,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는【파스퇴르】/【코흐】등이 등장하여 오늘날의 세균학 기초를 확립시켰다. 그러나 19세기 전반에는 질병의 원인이 "병원성 미생물이 인체에 침입하면서 일어난다." 는 사고가 아직은 정착되지 못하였다.

  이 시기, 각국의 군대에서는 전장위생학적인 사고가 싹트기 시작했는데, 당시 나폴레옹이 지휘하던 프랑스군의 위생설비는 최고수준이라 일컬어졌다. 1개 보병연대에는 위생파견대가 항상 배속되었고, 후방지역에는 기능적인【육군병원】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나폴레옹 자신도 위생문제에 주목하고 있었다. 특히 제너의 종두법에 흥미를 가졌던 듯, 생후 8주가 된 아들에게 종두를 맞게 했고, 군대 신병들에게도 종두 접종을 받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래도 프랑스군은 여전히 전염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이【전염병 장군】에 호된 반격을 받은 기록으로는【아이티 반란진압】이 있다.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아이티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1802년 2만 5천 명의 군대를 파견했으나, 현지의【황열병】으로 인해 2만 3천 명이 사망했다. 결국 지휘관【루크레르 장군】은 약 2천 명의 생존자들과 함께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역주 : 기실 루크레르 장군도 현지의 황열병에 걸려 아이티에서 사망했다. 프랑스로 귀국했다는 건 원문의 오류)

  전염병 장군과 나폴레옹의 전면대결은 그로부터 10년 후인【러시아 원정】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이 원정에 나폴레옹은 보병 36만 8천 명 / 기병 8만 명 / 대포 1,100문 / 예비병력 약 10만 명, 그리고 증원부대 전력을 집결시켰다. 나폴레옹이 인솔하는 중앙군만 26만 5천 명을 헤아리며, 총 병력은 60만 명을 상회했다.

  그리고 1812년 원정이 시작되었을 때는【에어푸르트】/【포즈난】 /【베를린】에 육군병원이 설립되어 있었다.

  당초에 진군은 문제없이 행해졌다. 그러나 폴란드 - 프로이센 국경의【니멘 강】을 넘은 시기부터 우선【이질】과【장티푸스】가, 그리고 얼마 안 가【발진티푸스】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발진티푸스는 "불결병" 이란 별명을 지닌 감염증으로 '이' 들에 의해 감염된다. 옛날부터 군대와는 인연이 깊어서 "종군병" 이라 불리기도 했다. 세균에 의해 일어나는 장티푸스와는 달리【리케치아】라 불리는 미생물이 작용하여 고열 / 반점상의 발진 / 정신착란 등의 주요한 증상을 일으켰다.  

  정확한 환자수는 확인할 수 없으나, 후송되어 온 감염자가 너무 많아 앞에서 서술한 육군병원만으로는 대응할 수 없었다고 한다. 어찌됐든 질병에 걸린 병사들에 대비해 당초에 세워놓았던 견적을 뛰어넘는 병자들이 병원으로 쇄도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때문에【쾨니히스베르크】와【단치히】에 새로운 육군병원이 세워졌으나 언 발에 오줌누기였다.

  7월의【오스트로브나 전투】당시엔 8만 명이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사망하거나 전투불능에 빠졌다. 당시의 프랑스군에선 1개 사단은 2개 여단으로 구성되며, 1개 여단은 2개 연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1개 연대가 병사 3682명(장교 제외)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을 토대로 하면, 계산상 발진티푸스가 5개 사단에 상당하는 전력을 괴멸시켰다는 말이 된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어째서 이 정도로 질병의 피해를 받았나 하면, 우선 거론할 수 있는 건 폴란드 국내의 상황이다. 당시 폴란드에는 전체적으로 미개발지가 많았고, 그 도로는 대규모 부대가 이동할 수 있을 만큼 정비되어 있지가 않았다. 비가 오면 진흙탕이 되어버리는 도로 때문에 후방으로부터의 보급이 예정과는 달리 잘 되지 않아 식량이 부족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현지조달방식을 주로 채용하던 나폴레옹도, 러시아로 침공했을 때 러시아군이 초토작전을 채용하면서 자연히 병참선이 중요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폴란드 / 러시아의 대지는 보급부대에겐 천연의 요새와도 같아서, 프랑스군 병사들은 만성적인 영양부족에 빠지게 되었다. 이런 러시아의 대지는 20세기【히틀러】에게도 그 마각을 드러내게 된다.

  거기에다 폴란드 / 러시아가 비위생적인 곳이었다는 점도 한 몫 한다. 농민의 신체와 그 주거지는 이와 벼룩의 소굴로, 발진티푸스를 위시한 다양한 질병이 유행할 토대가 갖추어져 있었다. 보급이 정체되면서 새로운 피복의 보급이 불가능해져, 이윽고 프랑스군 병사의 의복에도 이가 옮기 시작했다. 그 외에도 이상할 정도의 더위로 인해 우물물이 썩으면서, 이질도 미친 듯이 전염되었다.

  9월 12일, 프랑스군은【모스크바】에 입성했으나 3일 후에 발생한 대화재로 인해 가옥과 시설이 소실되었다. 화재에서 살아남은 커다란 건물들은 부상병과 질병에 걸린 병사들에게 할당되고, 건강한(부상병과 질병에 걸린 병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병사들은 겨울을 앞두고 모스크바에서 야영하게 되었다. 이 처치가 더욱더 병자를 늘리게 만들었으리란 건 말할 필요도 없다.

  피폐해진 프랑스군은 10월 19일 모스크바에서 철수를 개시했으나, 이 때 전투를 감당할 수 있던 병사는 8만 명에 불과했다.(물론, 이는 전투 등으로 인한 감소도 한몫 했으리라.) 그들이 철수하는 지역은 진군 당시 스스로의 손으로 뿌린 전염병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기에, 더욱더 병자들의 수는 증가하게 되었다.

  결국 독일 영토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건 약 4만 명에 불과했다. 물론 질병만으로 이런 손해가 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을 무너트리는 데는【동장군】만이 아니라 전염병 장군도 기여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고【크리미아 전쟁】(1853~1856)에서도 발진티푸스를 위시한 온갖 질병이 러시아 / 프랑스 / 영국군을 가리지 않고 습격한 바 있다.

  이 크리미아 전쟁에서 질병은 엄청나게 맹위를 떨쳐 프랑스 군은 약 31만 명의 병사들 가운데 20만 명이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부상으로 죽은 사망자가 2만 명이었던 데 비해, 병으로 죽은 자는 약 5만 명이었다고 하니 이는 이미 군사행동에 기인한 손해라 할 수 없다. 프랑스의 크리미아 전쟁 참전은 질병의 구렁텅이 속에 병사들을 집어넣은 행위라고 해도 될 것이다.       

 

덧글

  • 레이오트 2016/10/30 10:40 # 답글

    1. 지금도 신병훈련소는 병자집합소인데 그 때는 오죽했을까요?

    2. 발진티푸스는 특히 아우슈비츠로 대표되는 절멸노동수용소를 다루는 자료나 매체에서 빠지지않고 나오는 감염병이며 안네의 일기 작가의 사망원인이기도 하지요.

    3. 오히려 서양에 페스트를 전파시켜 (결과적으로는) 유럽을 부활시킨 유목민족이 위생관념에서는 더 앞선 모습을 보였지요.

    4. 다른 이야기지만 저런 형편없는 위생관념은 외과수술 성공률을 떨어뜨리기까지 했습니다.
  • 3인칭관찰자 2016/10/30 14:34 #

    2. 후달리면 죽어버리라는 식으로 일부러 위생 개판으로 만들고 방치하다 보니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안네 프랑크가 발진티푸스로 죽었었군요.

    3. 뭐 서양에 제대로 된 위생관념이 보급된 것 자체가 의외로 얼마 안 되었던지라..

    4. 그렇군요.
  • 레이오트 2016/10/30 17:55 #

    2. 발진티푸스의 감염매개체가 이이고 이 이가 당시 수용소 침대에 쓰였던 짚을 통해 전파되었지요.

    3. 당장 의사만 해도 신사의 손은 결코 더럽지 않다면서 진료 전후로 손을 씻지않았다고 하니 말 다했죠.

    4. 세균의 존재를 입증한 파스퇴르가 제안한 석탄산 소독법이 보급되면서 외과수술 후 2차 감염으로 인한 사망자 수가 줄어들었다는건 잘 알려진 이야기죠.
  • 3인칭관찰자 2016/10/30 19:03 #

    2. 그렇군요.
  • 올드캣 2016/10/30 16:06 # 답글

    아이티 원정대 지휘했던 르클레르 장군은 현지에서 병사하지 않았던가요?
  • 3인칭관찰자 2016/10/30 18:41 #

    확인해 보니 올드캣님 말씀이 맞습니다. 원문의 오류인 듯 하니 포스트에 반영하겠습니다.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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