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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 료타로] 벳쇼別所 가문, 광기의 농성 (下) 역사



  이 글은 故 시바 료타로 씨의 역사 에세이집인《역사의 세계로부터》의 9 ~ 18쪽에 수록된〈벳쇼 가문, 광기의 농성〉을 번역한 포스트입니다.

   
  텐쇼 6년(1578) 3월, (오다織田) 노부나가는 츄코쿠(中囯, 일본 혼슈 서부 지방)를 공격하기 위한 제 2차 출병을 실행에 옮겼다. 사령관인 (하시바羽柴) 히데요시秀吉는 대군을 이끌고 우선 반슈 카코가와加古川에 있는 카스야 나이젠노죠糟屋內膳正의 성관城館에 진주하여, 반슈의 호족들을 접견했다. 벳쇼 가문에서는 나가하루의 대관으로서 그 숙부인 벳쇼 야마시로노카미 요시치카別所山城守吉親와 중신인 미야케 히젠노카미 하루타다三宅肥前守治忠가 이곳을 찾았다.

  벳쇼가 보낸 이 두 명의 사신은, 아시가루에서 시작하여 입신하였다는 노부나가의 야전사령관을 보고 내심 그를 경멸하게 되었다. 머리 까진 생쥐같이 생긴 용모 / 빈약한 기골 / 품위 없이 높기만 한 웃음소리. 그 어느 것도 그들의 미의식을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벳쇼 가문의 이 두 노인은, 일가의 운명이 걸린 기로라고 할 수 있는 이 회담에서 히데요시를 상대로 마치 논쟁 좋아하는 사관학교 생도처럼 전술론을 거침없이 전개하다, 결국에는 "무식한 놈. 전쟁도 모르는군." 이라며 자리를 박차고 물러가버렸다. 촌뜨기라곤 해도 이 정도 되면 우스꽝스러울 뿐이다. 두 사람은 성으로 돌아가 나가하루에게 이를 보고하고, "이번에 히데요시는 이 곳으로 내려와, 우리들을 하인 다루듯 하였습니다." 면서 약육강식이란 시세 속에서의 서열적 불만을 호소하였다.

  (벳쇼別所) 나가하루長治는 자신을 선봉대장으로 임명해주겠다고 한 노부나가가, 그 후 한 번도 신통한 소식을 가져다주지 않는 데 화가 나 있었다. "우후(右府, 우다이진右大臣. 노부나가의 관직)는 거짓말을 한다." 고 나가하루는 말했다. 이해利害의 문제가 아니라, 이 청년으로서는 태연히 거짓말을 하는 불결한 정신이 불쾌했던 것이리라. 미키 성에서는 군사회의가 열려, 나가하루는 최후의 결단을 앞두고 이렇게 말했다고《벳쇼나가하루키》에 적혀 있다.


토요토미(하시바) 히데요시 노년의 초상화


  "작금 노부나가에 의해 발탁되어, 이제는 사무라이 행세를 하고 다니는 히데요시를 대장으로 받들며 그 선봉이 되어 싸운다면, 천하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히데요시라는 42세 나이의 성숙한 전략가를 놓고 "사무라이 행세를 하는" 남자라 욕하고, 그 밑에 들어가면 "천하의 웃음거리" 가 된다고 말했다. 이 한 마디가 벳쇼 가문이 결전을 단행하도록 이끌었다. 마키아벨리즘이 횡행하던 전국시대에서 진귀하게도, 돈키호테적인 기사도의 깃발이 미키 성에 나부끼고 있었던 것이다.

  화급히 전술이 논의되었다. 마침 카코가와 성에서 갑주를 벗고 정치공작을 벌이고 있는 히데요시의 방심을 이용하여, 일거에 기습을 감행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만약 이 의견이 채용되었더라면 어쩌면 히데요시는 이 때를 끝으로 역사에서 소멸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비겁하다" 는 의견이 대세를 점했다. 이름난 벳쇼 가문의 무명武名에 맹세코, 당당히 진채를 구축하여 대전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의견이 벳쇼 일족의 기호에 맞는 것으로, 미키 성은 전력을 다하여 농성준비에 돌입했다.

 
  - 미키 성은 후잔 성釜山城이라는 통칭으로 불렸다고 한다. 혼마루 / 니노마루 / 신성新城 세 구역으로 이루어져 동쪽 / 서쪽 / 북쪽 세 방면에는 마른 해자를 파 놓았고, 서남쪽과 동쪽 방향에는 외성外城을 구축하였으며, 성 서북쪽은 절벽이 지켜주는데다 그 저편에는 미노 강美囊川이 흐르고 있었다. 벳쇼 씨를 아카마츠 가문의 일개 지파에서 하리마 동부의 지배자로 성장시켰을 만한 저력을 이 성은 갖추고 있었다. 거기에다 벳쇼 씨의 산하에는 지성 30여 곳 / 1백여 곳에 달하는 소요새가 갖추어져 이들이 연계하여 미키 성을 지키고 있었다.

  텐쇼 6년(1578) 6월 29일, 미키 성을 포위한 히데요시는 급하게 성을 들이치지 않고 우선 센고쿠 곤베이(仙石權兵衛, 히데히사秀久)와 카스야 스케자에몬(加須屋助左衛門, 타케노리武則), 그리고 마에노 쇼우에몬(前野勝右衛門, 나가야스長康)들의 부대를 동원해 소규모 충돌을 벌이게 했다. 그리하여 성루 아래에서 여러 번의 소전투가 벌어졌는데, 그 모두가 고전적인 전투의식을 갖고 있던 벳쇼 측의 승리로 끝났다. 병사를 물린 히데요시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성과를 거둔 셈이었다. 성 측의 병사들이 어떻게 배치되었는지를 파악했기 때문이다. 히데요시는 성을 포위한 후, 장기전에 대비한 중후한 진지를 배비했다.


히데요시의 미키 성 포위 지도


  성 측은 끊임없이 크고 작은 야습을 감행하여 공격군을 피로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퍼펙트 게임" 이라 할 수 있을만한 승리를 거두었다. 어떤 날에는 용맹한 여성이라는 평판이 나 있던 벳쇼 야마시로노카미 요시치카의 아내가 이마에 붉은 머리띠를 두른 후, 낙엽 모양으로 생긴 속옷을 입고 노란 벛꽃 빛깔의 실로 얽어맨 갑옷을 몸에 걸치고서, 새하얀 백마에 카가미구라鏡鞍 안장을 얹어 유유히 올라탄 후 2척 7촌의 오오타치大太刀를 휘두르며 아군과 함께 적진으로 치고 나가는 등,《헤이케 이야기》에서나 나올 법한 막간극도 벌어졌기에 성 측의 사기는 크게 올라갔다.

  그러나 오다 군의 전술사상에는 그러한 구시대적인 전투미학을 부정해버리는 참신함이 있었다. 히데요시는 국지적인 전투에 도취한 성 병사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서, 미키 성 정면에 츠케지로(付城, 역주 : 공격자 측이 적의 성을 공략하려 할 때 공격거점으로 삼기 위해 짓는 성)를 구축하여 소수의 병력을 입성시켜 지키게 한 후, 미키 성을 지탱하던 위성요새들을 끈기 있게 박살내는 데 그 주력을 투입했다. 우선 미키 성 측의 나가이 시로자에몬長井四郞左衛門이 지키는 카코가와 동편의 노구치 성野口城을 함락시키고, 이어서 칸키 민부다유神吉民部大輔의 본거지인 이나미 군印南郡 칸키 성神吉城을 20여 일간의 악전고투 끝에 우려뺀 후, 그 다음에는 시가타 성志方城 / 아카시明石의 하타야 성端谷城 / 타카사고 성高砂城을 함락시켰다.

  미키 성은 계속해서 고립된 성이 되어 갔음에도, 기대하고 있던 모리 측의 원군은 끝내 오지 않았다. 노회한 모리는 이윽고 다가올 오다 군과의 대결전에 대비하기 위해 병력소모를 피하려 했던 것이리라. 벳쇼 가문은 모리를 위해 비지땀을 흘리며 오다 군과 싸우고 있으면서도 모리의 증원을 얻지 못했고, 앞날에 대한 희망도 상실하여 무엇 때문에 싸우고 있는지를 알 수 없는 상태에 빠졌으나, 그럼에도 싸움을 계속했다.

  놀라운 일이지만 전쟁 속에서 텐쇼 6년(1578)이 저물고, 그 다음 해에도 싸움이 계속되어 만 2년 동안 신들린 듯이 싸웠다. 양식이 다 떨어져 풀과 나무껍질을 먹고, 흙벽을 먹고, 나중에는 군마까지 잡아먹었음에도 기가 꺾이지 않았다. 2년 농성이라면 아마 일본 전사에서는 최장기록일지도 모르나, 이 정치성 빈약한 고전파 무사도주의자들은 꿋꿋하게 싸웠다. 성장城將인 나가하루는 주된 무장들을 소집하여 참회하였다. "노구치 / 칸키 두 성이 오다 군에게 함락된 건 우리 사졸들의 죄가 아니라, 내 지략이 치졸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청순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일종의 감상주의는, 도저히 전국의 권모시대를 살아가는 무장이 할 만한 이야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역으로 말하자면, 나가하루가 지닌 귀족적인 고상함이야말로 참담한 농성전 속에서 지내던 부하들을 능히 통솔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으리라.      

  텐쇼 8년(1580) 1월 6일, 다섯 치 두께의 장나무 판자에 쇠를 감아서 만들었던 성의 정문이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가 지휘하는 3백 명의 오다 군에 의해 부서지면서, 미키 성의 명맥은 경각에 달했다.

  나가하루는 성문을 열기로 결심하고, 히데요시에게 항복조건을 제시했다. "벳쇼 가문 일가는 배를 가르겠다. 그러나 사졸들의 목숨은 살려주길 바란다." 라는 내용이었다. 히데요시는 술과 안주를 선물하며 이를 허락했다.

  1월 16일, 나가하루는 농성하던 사졸들을 모두 혼마루의 큰 방으로 모아서 오랜 전쟁을 치러준 노고를 치하함과 동시에 작별인사를 하고, 다음 날인 17일. 붉은 매화가 피어 있는 정원에 위치한 다다미 30개짜리 객전에 흰 능직물로 만든 이불을 깐 후, 아내 하타노 씨波多野氏 / 두 아들 / 어린 딸 / 친동생인 히코노신 부부와 함께 자살하였다. 사세구는 "이제는 아무 원망도 없노라 내 생명으로 뭇 사람들의 목숨을 대신한다 생각하니" 였다. 벳쇼 나가하루라는 인물은 태어난 시대가 달랐다면야, 무장으로 살아가기보단 오히려 시인이 되는 쪽이 더 어울렸을 자질을 가졌던 것이리라.

  반슈의 어느 농촌에서는 지금도 정월 대보름을 기리는 집안이 있다고 한다. 성문을 염과 동시에 사방으로 흩어진 성 병사들은, 강화조건에도 불구하고 살기등등한 공격 측 병사들에게 살해당한 자가 많았다. 쫓기고 쫓겨 강변에 다다랐을 때, 마침 구름을 비집고 나타난 보름달이 나룻배가 어디 있는지를 알려주었고, 그 덕에 배를 타고 간신히 목숨을 보전하였기 때문에 자손대대로 이 달 대보름을 기리는 것을 가법家法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찾아보면 허다할 정도로 많으며,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1703년 1월 31일, 주군의 원수 키라 요시나카吉良義央 저택으로 쳐들어가는 47명의 아코 무사들


  미키 농성 당시 광기狂氣라고 할 수 있는 고조된 정신은 토쿠가와 시대로 이행한 후에도 여전히 이 땅에서 숨쉬면서 아사노 나가노리浅野長矩의 결벽한 광기를 낳았고, 그리고 그의 가신단 중에선 아코 의사赤穂義士들을 낳았다. 양쪽 다 자신의 미의식을 관철하기 위해 가문을 버리고 신세를 망쳤다. 기실 아코 의사들 가운데는 미키 성에서 농성한 자들의 자손들이 몇 명 섞여 있다. 미키의 광기가 겐로쿠 시대로 접어들어 다시 아코에서 부활한 거라고 하지 못할 것도 없다. 역사는 반복되는 듯하다.



덧글

  • 명림어수 2016/08/28 00:52 # 삭제 답글

    어째 히데요시를 상대로 되어가는 꼴이 그 옆의 바다 건너 어느 나라하고 비슷합니다.
  • 3인칭관찰자 2016/08/28 07:29 #

    둘다 상대(=히데요시)에 대해 꽤나 무지했고(서로 엮여서 일이 터지기 전까지 관심도 없었..), 문화적인 우월감의 발로 때문인지 은근히 상대를 내심 경멸했다가 심하게 데였다는 점이 비슷하다 생각됩니다. 물론 조선은 벳쇼 가문처럼 패배하고 종가의 대가 끊어지는 일을 겪진 않았지만.
  • 도연초 2016/08/28 14:46 # 답글

    1. 사족으로 단절된 벳쇼 가문의 가독은 친척 요시하루(아카마쓰 가문 출신으로 동군 지지, 오사카성 공방전에서 막부측으로 참전)에게 이어지다가 이에미츠 때 사소한 실수로 3만석에서 700석 하타모토로 몰락합니다(......................)

    2. 벳쇼 나가하루의 장인이 아케치 미츠히데의 친족을 인질로 뒀다가 살해한 하타노 히데하루였긴 하지만(물론 굳이 저거말고도 명분은 넘쳤으니)

    3. 저 지방에서 미키성 말고도 다른 주변 지역의 성주들도 식량이 떨어져 병졸과 주민의 목숨을 구하는 조건으로 할복을 하는 일이 줄줄이... 뭐 이런 말려죽이기가 히데요시가 산요 산인지방에서 즐겨써먹은 전법이긴 했습니다만(시미즈 무네하루가 대표적)
  • 3인칭관찰자 2016/08/28 21:10 #

    1. 반 오다파에게 밀려 미키 성에서 내쫓겼다가 벳쇼 나가하루가 자살한 후 벳쇼 가문의 당주가 된 (나가하루의) 삼촌 벳쇼 시게무네의 아들인 것 같네요. 세키가하라 / 오사카 전쟁을 무난히 헤쳐나왔음에도 가문을 유지하지 못했었군요(....)

    2. 벳쇼가 반기를 들기 2년 전부터 하타노가 노부나가를 배신하였던 걸 감안하면 장인의 근황과 그 의향이 벳쇼 나가하루에게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높아보입니다.

    3. 산인 지방의 톳토리 성 공방전에서는 사람 시체를 식량으로 먹으며 연명하는 수라장이 히데요시 군에게 포위된 성 안에서 벌어졌었죠.
  • 도연초 2016/08/28 22:57 #

    원인이 바로 참근교대 명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꾀병을 부려서 면제받은게 들통나서였죠;(아들 모리하루는 서군출신이지만 나중에 막부편으로 옵니다. 그도 부친과 함께 꾀병 부리다가 사이좋게 개역크리)
  • 3인칭관찰자 2016/08/29 06:51 #

    참근교대를 태만히 한 것 때문이었군요.
  • 진냥 2016/08/28 16:52 # 답글

    [헤이케 이야기]에서 교활하고 탐욕스러운 겐지 무사들에 의해 고결하고 아름다운 헤이케 무사들(...이라고 묘사되어 있을 뿐이지만)이 쓰러지는 장면을 떠올리면 역사는 반복된다.. 정도가 아니라 반복하고 싶어하는 유전자가 일본 무사들에게 남아있는지 의아스러울 정도입니다....
  • 3인칭관찰자 2016/08/28 21:20 #

    헤이케의 멸망을 안타깝게 생각한 뒷사람이 헤이케를 모방하고, 헤이케를 모방하여 멸망한 사람의 비극을 또 다른 사람이 아름다운 최후의 전형으로 삼고... ㅜㅜ 구전이나 책이나 연극 등으로 멸망의 미학 비슷하게 후세에 연면히 전해졌기에 행동마저 닮은 게 아닌가하는 추측도 해봅니다.
  • 도연초 2016/08/28 22:35 #

    비단 단노우라 뿐만 아니라 판관비희의 대명사인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도 그중 하나겠구요...
  • 키키 2016/08/30 21:59 # 답글

    잘 읽었습니다.
  • 3인칭관찰자 2016/08/30 22:13 #

    감사합니다!
  • 2016/08/31 10:55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6/08/31 21:09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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