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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마와 카이엔타이》철저해부 카이엔타이海援隊 (完) 역사



   이 글은《新 歷史群像シリ-ズ 20 坂本龍馬と海援隊》p.124~131. 타케시타 토모카즈竹下倫一 씨가 쓰신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막부 말기 일본 역사인물들 가운데 일본에서 가장 사랑받는 인물인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와 그 동지들이 나가사키에 설립한 무역집단으로 혹자는 "일본 최초의 주식회사" 라고 평가하기도 하는, 이들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비약의 시기를 덮친 료마 암살사건

  이와 같이 경제적으로는 혜택받지 못한 카이엔타이海援隊였지만, 사업 자체가 지지부진하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조금만 더 노력하면 궤도에 올려놓을 수 있을 정도까지 와 있었다.

  사업이라는 건 개업한다고 돈이 벌리는 건 아니고, 수익이 날 때까지는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카이엔타이의 경우 료마의 지도하에 활동한 기간은 고작 반년, 너무나 활동기간이 짧았기에 충분한 이익을 거두는 데까진 다다르지 못한 것이다.

  이 짧은 시간 동안 카이엔타이는 꽤나 활발한 사업을 전개하고 있었다. 케이오 3년(1867) 9월에는 토사 번의 라이플 총 매매를 중개하여 1천 냥(6억) 정도의 수수료를 챙겼고, 비슷한 시기에는 탄고 타나베 번(丹後田辺藩, 역주 : 마키노 가문牧野家. 3만 5천 석)과도 상사계약을 맺었다. 그 내용은

  ■ 타나베 번이 물산을 수출할 때는 카이엔타이가 운송을 담당한다.
  ■ 타나베 번이 서양 국가들로부터 기계 따위를 수입할 때는, 카이엔타이가 중개를 맡는다.
  ■ 타나베 번이 필요로 하는 사업자금 5백 냥(약 3억)을 카이엔타이가 빌려준다.

  는 것으로, 타나베 번의 수출입 사업을 혼자서 책임지는 대단한 거래를 한 것이다.

  그리고 케이오 3년 10월에는 센다이 번(仙台藩, 역주 : 다테 가문伊達家, 62만 석) 상인으로부터 "센다이 특산품의 매매를 책임져 주시오." 라는 타진이 들어왔다. 카이엔타이에게 케이오 3년 가을은, 그야말로 비약을 기대하게 한 호시절이었다.

  그러나 다음 달인 11월, 료마가 암살당한다. 그리고 다음 해(1868) 1월, 토바 후시미 전투鳥羽伏見の戦い가 터진다. 전일본이 내란상태로 돌입한 것이다.

  카이엔타이는 료마가 죽은 후에도 한동안 존속되었다. 대원들은 관군의 일원이 되어 각지의 평정에 나섰다. 조정에서 토벌령이 나온 타카마츠 번(高松藩, 역주 : 마츠다이라 가문松平家, 12만 석)을 무혈항복시키고, 세토 내해의 시와쿠 제도塩飽諸島에서 일어난 도민들의 싸움을 진압하기도 했다.

  케이오 4년(1868) 4월에는, 료마의 비서격 존재였던 나가오카 켄키치長岡謙吉가 2대 카이엔타이 대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얼마 안 가 대원들이 줄이어 메이지 정부의 관료로 임용되어 가면서 카이엔타이는 소멸했다.


  료마의 뜻을 실현시킨 이와사키 야타로

  료마가 살아 있었다면 카이엔타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료마 팬이라면 흥미가 끊이지 않을 화두이다. 물론 역사에 IF라는 것은 없고, 명확한 답을 도출하는 것도 힘든 이야기다.

  그러나 메이지 이후 미츠비시 재벌三菱財閥이 약진해간 모습을 통해, '카이엔타이의 IF' 를 살짝 들여다 볼 수는 있을지 모른다. 그 이유는 미츠비시의 창업주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弥太郎가 카이엔타이가 남긴 유물 다수를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카이엔타이가 소유한 선박들과 수부들은 그대로 이와사키가 인수한 것으로 보인다. 미츠비시는 지금이야 '중공업 회사' 라는 이미지가 연상되지만, 처음에는 증기선을 이용한 운수업으로 돈을 벌었다. 카이엔타이가 하려고 한 사업을 자신이 벌여 대재벌로 가는 기반을 닦은 것이다.

  이와사키 야타로와 료마는 나가사키에서 술을 여러 번 같이 마신 사이다. 그러한 모습은 야타로의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 때 료마의 사업에 대한 구상과 포부를 몇 번은 들었을 것이다. 이것이 이와사키 야타로의 향후 사업재료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틀림없으리라.

  야타로는 당시 토사 번의 일개 관료에 지나지 않았고, "증기선을 움직여 무역과 운수업을 하겠다." 는 건 분명히 료마 쪽이 가지고 있던 발상이다. 미츠비시 재벌이 훗날 융성한 것을 본다면, '만약 카이엔타이가 살아남았다면 대단한 성공을 거두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는 건, 자연스런 결론이리라. 



덧글

  • 키키 2016/08/03 01:24 # 답글

    료마가 오미야 사건에서 비명횡사 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유신지사 료마가 아니라 일본의 최초, 최고 대기업의 총수 료마였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감이야 사츠마, 초슈, 막부 가리지 않고 인맥으로 넘쳤을 것이고 료마의 마인드나 조직은 나름 튼튼했으니까요.

    어차피 토바-후시미 전투로 내전으로 비화된 거, 료마가 과도하게 대정봉환을 주청하지 않았다면 목숨은 부지하고 있었을텐데...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번 편도 잘봤습니다. 언제나 양질의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3인칭관찰자 2016/08/03 18:53 #

    오랫만에 뵙습니다. 잊지 않고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__)

    기껏해야 고토 쇼지로 정도가 사업 시작시의 주된 인맥이었던 야타로와는 달리 료마는 처음부터 사기적인 연줄을 가지고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겠죠.. 사츠마, 쵸슈, 토사, 구 막부인맥까지 동원 가능했을테니(....)

    단지 료마가 일본 대기업의 총수로서 천수를 누렸다면 지금 우리들이 아는 유신지사 사카모토 료마와는 다른 이미지가 정착되어 있을 것 같네요. 뭐 미츠비시가 한국에서 전범기업 취급받는 걸 생각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좀 더 이미지가 마이너스되었을 지도요(.....) 어쩌면 료마는 야타로와는 달리 또 다른 역사를 만들 수 있었을지도 모르긴 하지만.
  • 2016/08/09 10:15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6/08/09 21:03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남중생 2016/08/22 19:11 # 답글

    끝까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번역 감사합니다.
  • 3인칭관찰자 2016/08/22 20:02 #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보셨다니 기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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