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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마와 카이엔타이》철저해부 카이엔타이海援隊 (4) 역사



   이 글은《新 歷史群像シリ-ズ 20 坂本龍馬と海援隊》p.124~131. 타케시타 토모카즈竹下倫一 씨가 쓰신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막부 말기 일본 역사인물들 가운데 일본에서 가장 사랑받는 인물인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와 그 동지들이 나가사키에 설립한 무역집단으로 혹자는 "일본 최초의 주식회사" 라고 평가하기도 하는, 이들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카이엔타이 설립의 목적과 이상】

  카이엔타이 규약이 의미하는 것들

  카이엔타이 규약에 의하면 조직의 목적은【 운수업, 이익 축적, 개척, 투기 그리고 본 번(토사 번)을 응원하는 것을 주로 삼는다. 】고 되어 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해운사업과 상거래, 개척 따위를 하는 한편으로 군사적 측면 등에서 도사 번을 응원한다는 것이다.

  거기에다 카이엔타이는 서양식 함선의 기술을 습득하는 것도 중요한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카이엔타이 대원은 의무적으로 선박 운전ㆍ조종기술을 익혀야 했고, 그에 관한 훈련도 행해지고 있었다. 서양식 함선을 조종하는 기술이라는 건 당시로서는 최신식 기술이었기에 다른 번들로부터 견습승무원들을 맡아 교육시키기도 했다. 쵸후 번長府藩의 미요시 신조三吉慎藏로부터 료마가 "번의 무사 4명에게 선박 조종을 가르치려고 하니 신병을 맡아 주게." 라는 상담을 받은 기록이 남아 있다.

  그리고 카이엔타이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학문이다. 당시의 지사들에게 학문은 정말로 소중한 덕목이었다. 번과 국가의 입장에서도 젊은이가 학문을 한다는 것은 중요했다. 카이엔타이 규약 내에는【 학문을 목적으로 삼는다 】는 구절은 없지만서도【 학비가 부족할 경우 번에서 대납해 준다. 】는 구절이 있다. '학문이 목적' 이라고 명기되기 이전에 전제사항으로서 '당연히 해야할 일' 이 학문이였다는 것이다.

  카이엔타이 대원들은 다양한 형태로 학문에 힘썼다. 무츠 무네미츠(陸奥宗光, 역주 : 유신 이후 자유민권운동에 손을 댔다가 반정부음모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 출옥 후 그의 재능을 인정하던 이토 히로부미의 도움으로 여권으로 편입되어 농상무대신 / (청일전쟁 당시의) 외무대신 등을 역임. 청일전쟁의 승리와 불평등조약 개정에 공헌하여 지금도 탁월한 외무대신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일본 외무성 건물 앞에는 그의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는 서유럽의 영업 형태를 연구하여〈상법에 관한 어리석은 견해〉라는 상세한 보고서를 쓴 적이 있다. 대원들 중에는 의사 출신으로 시볼트 밑에서 배운 바 있는 나가오카 켄키치長岡謙吉 같은 사람도 있었으니 아마 서양지식을 주제로 한 강의도 행해졌을 것이다.

  그 외에도 카이엔타이는 대원들을 영국 등지로 유학까지 보내주고 있었다. 명확한 기록이야 남지 않았지만 "대원 중에는 영국으로 유학 간 친구들도 있다." 고 사카모토 료마가 누나 오토메乙女에게 쓴 편지가 남아 있다. 유학하고 있다는 '대원' 이 누구인지는 지금도 판명되지 않았으나, 카이엔타이가 유학 같은 것도 적극적으로 보냈다는 건 사실이리라.



【사업은 순조로웠으나 궁핍했던 카이엔타이】

  월급이 올라도 가난은 여전
    
  토사 번으로부터는 대원 1인당 월 다섯 냥이 지급되었다. 카메야마 샤츄 시대에 사츠마 번이 월급으로 석 냥 두 푼을 준 데 비하면 보수는 분명히 인상된 것이었다. 그러나 토사 번에서 보낸 나가사키 유학생들은 매달 여덟 냥을 지급받았는데 여기에 비하면 대원들의 월급은 결코 높다고 할 수 없었다. 거기에다 노잡이(수부)들에게는 임금이 지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카이엔타이가 자체적으로 보수를 지급해야 했다. 그러니 카이엔타이는 결코 유복하지 않았다.  

  료마들은 수시로 토사 번의 나가사키 출장소로 찾아가서 돈을 뜯어냈다. 예를 들자면 월급날에 20인 분량인 급료 1백 냥이 지급되자, 료마는 나가사키 출장소에 심부름꾼을 보내어 "대장 몫 급료가 없다." 고 토를 달았다. 나가사키 출장소의 회계 책임자는 훗날 미츠비시 재벌을 일으킨 바로 그,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弥太郎였다. 이와사키 야타로는 "1백 냥 중에 대장의 월급도 포함되어 있다.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郎, 역주 : 메이지 시대에 백작으로 서임됨. 이타가키 타이스케板垣退助와 함께 자유민권운동의 지도자가 되었으나 야권 정치인으로선 무능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작위와 입각을 미끼로 삼은 정부의 회유에 곧잘 낚여들어 지지자들을 여러 번 물먹이기도 했다)도 그러라고 했다." 며 심부름꾼을 쫓아버렸으나 료마는 "대장 몫은 별도다" 고 다그쳐서, 결국 야타로가 손을 들고 별개로 50냥을 지급했다. 거기에다 다른 대원들도 툭하면 야타로에게 돈을 꾸러 들락거렸기 때문에, 이와사키 야타로는 일기에서 카이엔타이를 "성가신 것들" 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토사 번의 중역으로 카이엔타이에 대해 감찰관적인 존재였던 사사키 타카유키(佐佐木高行, 역주 : 메이지 시대에 후작으로 서임됨. 궁중 보수파의 핵심인물로 활약함) 도 당시 카이엔타이의 궁핍함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 그 때의 카이엔타이는 꽤나 가난했다. 이시다(石田, 에이키치英吉. 토사 출신 카이엔타이 대원. 역주 : 메이지 시대에 남작으로 서임됨. 농상무차관 역임)가 선장이 되었는데도 구색을 맞출 의복이 없다고 한다. 사이다니(才谷, 료마의 가명)가 "이시다도 20냥만 있으면 차려입을 수 있을 테니 빌려주게. 그게 안 된다면 자네가 지금 입고 있는 양복이라도 주게나." 라고 부탁하길래 돈을 쥐어주니, 양복을 한 벌 빼 입었는데 그제서야 선장다운 티가 나더라. 】(《사사키 노후 석일담佐佐木老後昔日談》)

  케이오 3년(1867) 10월 중순, 료마는 고토 쇼지로에게 또 돈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나카지마 사쿠타로(中島作太郎, 노부유키信行. 역주 : 메이지 시대에 남작으로 서임됨. 일본의회 초대 중의원 의장.)가 나가사키로 출장을 가는데, 노자를 쥐어주려고 하니 수중에 돈이 없네. 그러니 15냥 정도 융통해 주게. 】라는 내용이다. 15냥이라면 어림잡아 750만 원. 여행비로서는 좀 많다는 느낌도 들지만, 나름대로 구색을 갖추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케이오 3년 10월은 료마가 암살되기 고작 1개월 전이었다. 지사로서 이름을 널리 떨친 료마는 최말년에도 꼴랑 여유자금 750만원이 없었던 것이다.  



덧글

  • 궁금 2016/07/31 17:59 # 삭제 답글

    영국 유학간거면 뽑아서 보낸건데 누군지 모르다니 설마 영국 귀화했나요?
  • 3인칭관찰자 2016/07/31 19:14 #

    대원 중에서 뽑아서 보낸거고 료마가 편지에서 이걸 누나에게 자랑한 건데 정작 유학간 사람이 누군지는 지금 사료로는 확인할 수 없다는 겁니다. 카이엔타이 생존자들끼린 훗날에 변변한 기념사업도 없어서 자신들 조직의 역사편찬도 하지 않은 채로 각자도생했기에... 카이엔타이라는 조직이 오래가지 못했던 것(인프라와 말단직원들만이 미츠비시로 인수됨)이 가장 큰 이유가 되겠지요.
  • 2016/08/01 13:09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6/08/01 17:58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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